미국의 경제잡지 <포브스>는 매년 10억달러 이상의 자산을 보유한 세계 부호들의 명단을 발표한다. 2015년에는 1826명의 억만장자들이 이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 중 중남미 사람들이 62명이나 포함됐다. 브라질(35명)과 멕시코(10명)에 가장 많은 부자들이 집중돼 있으며 그 다음으로 칠레(5명), 아르헨티나(4명), 콜롬비아(2명), 베네수엘라(2명), 페루(2명) 그리고 벨리즈(1명) 순이다. 중남미 부자들의 국적은 주로 브라질과 멕시코이며 이들은 통신, 금융, 광산, 맥주 수출로 거부가 됐다.

뿐만 아니라 세계 100대 부호들의 명단에 7명의 중남미 부자들이 이름을 올렸다. 중남미에서 가장 돈이 많은 사람은 771억달러의 자산을 보유한 카를로스 슬림 엘루다. 그 뒤를 이어 브라질의 호르헤 파울로 레만(250억달러), 요셉 사프랄(173억달러), 멕시코의 헤르만 라레라 모타(139억달러), 칠레의 이리스 폰트보나(135억달러), 콜롬비아의 루이스 카를로스 사르미엔토(134억달러) 그리고 브라질 에르난 테예스(130억달러)다.

세계 2위 부호이면서 중남미 최고의 갑부인 슬림은 빌 게이츠와 비교하면 우리나라에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그는 텔멕스와 텔셀, 아메리카모바일 등 통신회사와 그루포 카르소(Grupo Carso)와 그루포 피난시에로 인부르사(Grupo Financiero Inbursa)를 보유하고 있다. 텔멕스는 멕시코 유선전화 시장의 90%를 그리고 텔셀은 이통통신 시장의 약 80%를 장악하고 있다. 인부르사는 보험과 은행 등의 금융사업을, 카르소 그룹은 석유, 항공, 백화점, 요식업, 음반 산업, 자동차·세라믹 부품, 건축자재, 담배 등 200개에 달하는 계열사를 보유하고 있다.

슬림은 레바논 출신 멕시코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나 멕시코의 명문인 멕시코 자치대학교(UNAM)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했다. 젊은 시절부터 싼값에 매물로 나온 작은 회사들을 사들여 경영을 정상화하는 수완을 발휘했다. 경영의 마이더스 손이라고 불릴 정도로 손을 대는 사업마다 성공적이었다. 1990년대 신자유주의 정책이 중남미를 휘몰아치면서 헐값으로 시장에 나온 금융과 통신기업을 인수해 멕시코의 통신 산업을 장악했다. 전형적인 ‘문어발 확장’을 통해 이뤄낸 그의 자산은 멕시코 전체 GDP의 5~6%에 이를 정도로 엄청나다. 슬림은 얼마 전 미국 통신회사 AT&T가 보유한 자신의 회사 아메리카모바일의 지분 8.3%를 사들였다. 그리고 지난 1월에는 뉴욕타임스의 최대주주가 됐다.

혹자는 슬림이 부자가 된 비결을 그의 검소한 생활방식에서 찾기도 한다. 슬림은 30년 동안이나 같은 집에서 살고 있다. 항상 같은 옷을 입고, 그가 소유한 식당 체인 산보른스에서 늘 식사를 하며 가족에 대한 애착이 각별하다. 그의 부의 출발점이 된 카르소 그룹의 이름도 그의 이름 카를로스와 아내의 이름 소우마야의 앞자를 따서 지었다.

호르헤 파울로 레만은 맥주로 돈을 번 부호다. 하버드경영대학원 출신 금융인이었던 레만은 투자회사 3G캐피털을 세운 후 기업 인수합병(M&A)에 나섰다. 1999년 브라질 맥주회사 암베브(AmBev)를 인수해 중남미 맥주 시장을 석권한 뒤, 2004년에 벨기에 맥주회사 인터브루(Interbrew)까지 합병하며 인베브(InBev)를 탄생시켰다. 그가 세계 맥주산업의 왕좌에 오른 것은 2008년이다. 당시 세계 3위 맥주업체였던 미국의 안호이저-부시를 사들이면서 AB인베브를 탄생시켰다. 그의 옷차림은 수수해 눈에 잘 띄지 않으며 집무실은 소박해 직원들과 거리를 두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칠레의 이리스 폰트보나는 남미를 대표하는 여성 부호다. 세계에서 7번째로 큰 구리 광산인 안토파가스타와 구리 제조업체 마데코, 칠레에서 두 번째로 큰 은행, 남미에서 가장 큰 선박회사(CSAV) 등을 보유하고 있다.

루이스 카를로스 사르미엔토는 콜롬비아 최대의 은행지주그룹 그루포 아발을 통해 콜롬비아 금융계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 그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주당 60시간 이상을 일하는 ‘일벌레형’ 회장으로 유명하다.

포브스가 판매, 이익, 채권 그리고 주가를 기준으로 선정한 세계 2000대 대기업 가운데 브라질 기업 33개, 멕시코 기업 16개, 칠레 기업 9개, 콜롬비아 기업 6개, 아르헨티나 기업 2개, 페루 기업 2개, 베네수엘라 기업 1개, 파나마 기업 1개가 포함돼 있다.

빈부격차 심해
세계에는 부자기업뿐 아니라 몇 백년 동안 대를 이어서 가문의 명맥을 이어오는 전통기업이 있다. 이러한 세계 100대 전통기업에 선정된 중남미 기업이 2개 있다. 1575년에 설립된 이래 현재 15대 자손이 운영하고 있는 칠레 산페르난도에 있는 ‘아시엔다 로스 린게스’가 20위를 기록했다. 그리고 86위에 오른 멕시코의 유명한 테킬라 생산기업 호세 쿠에르보는 1758년에 설립돼 현재까지 대를 이어 내려오고 있다.

중남미 지역의 인구는 약 6억명 정도다. 그 중에서 3000만달러 이상의 자산을 보유한 사람들이 1만4805명 그리고 10억달러 이상을 가진 사람들은 151명이다. 부자들의 숫자는 해마다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3000만달러 이상의 자산가는 전년대비 5% 증가했고, 10억 달러 이상을 가진 자산가들은 38%로 늘었다. 중남미 갑부들이 가진 자산규모는 총 2조2250억달러에 달한다. 중남미 부자 1405명 중에서 1075명이 중미에 집중돼 있으며, 이들이 가진 자산은 총 1420억달러다.

중남미는 세계에서 불평등이 가장 심한 지역이다. 유엔 경제개발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보면,  중남미 불평등의 가장 큰 특징은 빈곤층의 규모가 아니라 부의 집중이다. 브라질에는 3000만달러를 가진 부자들이 4225명이 있으며 이들이 보유한 부는 총 8200억달러에 달한다. 그리고 멕시코에는 3000달러 이상을 보유한 부호들의 총 자산 규모가 4600억달러다.

불평등의 정도를 알 수 있는 지니지수가 이 지역 불평등의 정도를 잘 보여준다. 중남미 지역의 지니지수는 52.9로 아프리카와 근소한 차이(56.5)를 보이고 있으며 아시아와는 큰 차이(44.7)를 나타낸다.

중남미의 빈부격차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더욱 더 심해지고 있다. 현재 중남미지역 2억의 인구가 빈곤층으로 전락할 위기에 있다. 중남미의 평균 빈곤율은 34.6%다. 이는 곧 10명 중 3~4명은 기초적인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할 만큼 소득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루과이(12.4%)와 칠레(14.4%)만 빈곤율이 20% 미만이다. 브라질(21%), 아르헨티나(27.5%)는 20%를 웃돌고 있으며, 세계 2위 부자가 사는 멕시코의 빈곤율은 절반을 넘어서는 52.3%나 된다.

중남미지역의 부의 집중화 현상은 소비패턴의 변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최근 중남미 지역은 세계 명품과 사치품의 중요한 시장으로 부상하고 있다. 명품의류, 시계, 자동차, 화장품 회사들이 앞 다퉈 중남미 시장으로 진출함에 따라 명품시장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2019년 시장규모는 2014년 대비 88.4%나 성장한 2560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세계 2위 부자이면서 중남미 최고 갑부인 카를로스 슬림 엘루.
세계 2위 부자이면서 중남미 최고 갑부인 카를로스 슬림 엘루.

부자들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브라질과 멕시코는 명품산업의 주요 격전지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프랑스의 명품기업인 에르메스의 최고경영자(CEO)인 악셀 뒤마는 최근 멕시코, 아르헨티나, 칠레 그리고 파나마에서의 핸드백과 실크스카프 판매실적이 증가했다고 하면서 전망을 밝게 봤다. 중남미 시장에 진출한 지 이제 15년이 된 독일 포르쉐의 판매량은 초기 300대에서 현재 연간 3900대로 증가했다.

중남미 지역의 수입명품에는 높은 수입관세가 부과되고 복잡하고 비효율적인 관료주의로 인해 추가적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에 판매가격이 유럽이나 미국보다 평균 20~30% 이상 비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외 명품기업들은 중남미 시장의 잠재성을 높게 평가하고 앞 다퉈 중남미 시장으로 몰려들고 있다. 전문가들은 중남미 명품시장이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의 성장률을 보일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그렇다면 누가 명품을 사들이고 있는가. 최근 중남미 경제성장률이 1~2%대로 부진을 겪고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경기침체와 명품 열풍은 모순적이다. 그러나 중남미 명품시장의 주요 고객은 브라질, 멕시코 그리고 아르헨티나뿐 아니라 그동안 가난한 국가로 인식됐던 페루, 과테말라, 니카라과 등 중남미 전역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세계적 경제침체에도 불구하고 중남미 지역에서 10억달러 이상 보유한 부자들의 비율은 2014년 38% 늘었다. 뿐만 아니라 소비를 주도하는 중상류층의 비율도 빠르게 증가하면서 중남미 지역은 명품업계의 큰손으로 자리 잡고 있다.

중미에서 가장 갑부가 많은 나라는 과테말라로 260명이 300억달러를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빈곤층이 전체 인구의 42.5%인 니카라과는 10명이 국가 GDP의 254%에 해당하는 300억달러를 가지고 있다. 개인이 국가보다 더 부자인 셈이다. 10억달러 이상을 보유한 갑부가 파나마에 12명 그리고 코스타리카에 100명이나 있으니, 명품업계가 이 지역에 눈독을 들이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