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빙하는 오랜 세월 동안 눈이 쌓이고 다져져 만들어졌다.
- 빙하는 오랜 세월 동안 눈이 쌓이고 다져져 만들어졌다.

파타고니아는 남미의 최남단에 있다. ‘파타고니아’라는 이름은 1520년 대서양 해안가에 처음으로 상륙했던 포르투갈의 탐험가 마젤란이 이 지역 원주민들의 발이 유난히 큰 것을 보고 이들을 ‘파타곤(patagon)’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했다. 파타고니아의 면적은 아르헨티나 쪽의 크기만도 80만km²에 달한다. 여기에 남극의 면적을 포함할 경우 자그마치 170만km² 에 달한다고 하니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파타고니아 지역은 석유와 가스를 포함한 탄화수소, 금, 은, 석탄, 철광석, 납 등의 광물자원에서부터 우라늄에 이르기까지 실로 천연자원의 보물창고와도 같은 지역이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동물과 식물들이 둥지를 틀고 있는 숲과 호수 그리고 얼음과 바람이 만들어내는 자연의 하모니는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이라면 평생 파타고니아를 그리워하며 살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이렇게 파타고니아의 자연은 세상에 둘도 없는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며 오늘도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마술을 걸고 있다.

수려한 자연경관을 가진 만큼 이 지역엔 국립공원으로 지정돼 보호되고 있는 지역이 많다. 특히 총 4459km²의 면적으로 아르헨티나의 국립공원 중 두 번째로 방대한 지역인 로스 글라시아레스(빙하) 국립공원은 아르헨티나 정부에 의해 1937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됐고, 1981년에는 유네스코에 의해서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돼 보호되고 있다. 로스 글라시아레스 국립공원은 크게 남쪽과 북쪽으로 나뉘는데 남쪽의 입구는 47개의 대형 빙하들과 200여개의 소형 빙하들이 군집돼 있는 엘 칼라파테가, 북쪽의 입구는 세계 5대 미봉으로 꼽히는 피츠로이 봉우리로 향하는 엘 찰텐이 자리 잡고 있다.

- 전망대에서 바라본 빙하.
- 전망대에서 바라본 빙하.

연기를 내뿜는 산 ‘엘 찰텐’
수억 년 전에 얼음 속에 갇혔던 다람쥐가 얼음을 깨고 나와서 잃어버린 도토리를 찾아 헤매고, 도도하고 차가운 얼음왕국의 여왕이 마법을 걸어 세상을 꽁꽁 얼게 하는 그림들이 오버랩 되면서 눈을 떠 보니, 엘 칼라파테 국제공항에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공항은 작고 아담했고, 바람의 동네답게 초봄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거센 바람이 불었다. 이 여행의 하이라이트가 될 빙하는 천천히 보기로 하고 우선 트래킹을 하기 위해 엘 찰텐으로 향하는 버스표를 샀다. 엘 찰텐은 엘 칼라파테에서 3시간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주변으로 펼쳐지는 광경에 인간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오직 수억 년 시간의 흔적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세 시간을 달렸지만 휴게소도 주유소도 볼 수가 없었다. 상업화와 편리함에 익숙해진 나에게는 이색적인 광경이기도 했다. 로스 글라시아레스 국립공원이라는 큰 표지판을 지나자 멀리서 만년설이 쌓인 뾰족한 봉우리가 자태를 드러냈다. 피츠로이봉(峰)이었다. 엘 찰텐 마을로 들어서자 마치 동화 속으로 빨려들어 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아기자기하고 소박한 마을이었다. 

해발 450m에 위치한 엘 찰텐은 이곳 원주민인 테우엘체족의 언어로 ‘연기나는 산’을 의미한다. 변덕스러운 기상조건으로 봉우리가 항상 구름에 가려 있기 때문에 이들에겐 불을 뿜어내는 산처럼 보였다. 비글호(號)의 함장 피츠로이를 기념하기 위해 1877년부터 피츠로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나 다시 ‘엘 찰텐’이라는 이름을 되찾아 최근에는 엘 찰텐과 피츠로이 두 이름이 동시에 쓰이고 있다. 피츠로이봉까지의 트레킹 코스는 왕복 4시간 코스부터 10시간 코스까지 다양하다. 10시간 코스를 위해서는 하루저녁 산속에서 캠핑을 해야 한다. 캠핑준비 없이 온 터라 왕복 4시간 코스인 카프리 호수까지 다녀오기로 했다.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일 게다. 입구부터 인공적이고 인위적인 것은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최소한의 이정표는 있지만 편의(便宜)를 위한 과도한 배려는 없었다. 이 때문에 모든 것은 직감과 자연에 의존해야만 한다. 관리사무소가 없으니 입장료를 받는 곳도 안내직원도 없다. 이곳에서는 흙에서 나고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자연의 순환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카모마일, 높게 솟아 그 위용을 자랑하는 피츠로이와 토르레봉(峰), 빙하가 녹아내린 개울과 호수, 새들의 지저귐과 바람의 노래 그리고 짙푸른 하늘이 만들어 내는 황홀함이란 직접 보고 느끼지 않고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풀냄새를 맡고 바람의 노래를 들으며 도착한 카프리 호수는 맑고 아름다웠다. 모래사장에 놓인 고목에 앉아 세계에서 가장 오르기 힘들다는 피츠로이봉을 바라보았다. 뾰족뾰족한 봉우리가 얄궂기도 했지만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있었다. 운이 좋아야만 온전한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그 귀한 자태를 보는 행운을 누렸으니, 여행은 성공적인 셈이다. 카프리 호수에 더 머물고 싶었지만 해 지기 전에 내려가야 하기에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애써 돌려야만 했다.

아름다운 카프리 호수를 돌아 피츠로이 전망대에 도착하니 정면에 피츠로이가 위엄있는 모습을 당당히 드러냈다. 다음엔 또레스 호수와 로스 뜨레스 호수까지 가 보겠다는 다짐을 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그러나 짙은 미련 때문에 자꾸 뒤돌아 볼 수밖에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어린 시절 만화영화 속에서나 들었던 딱따구리의 울음소리를 따라가 보니, 빨간 모자를 쓴 검은색의 커다란 딱따구리 한 쌍이 고목의 밑동을 열심히 쪼아대고 있었다. 딱따구리의 나무 쪼는 소리는 메아리가 돼 숲속에 울려 퍼졌다. 해가 지기 전에 무사히 마을로 내려와 엘 칼라파테로 가는 버스를 탔다.

1. 빙하 위를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분된다. 2. 로스 글라시아레스 국립공원을 나타내는 이정표. 3. 높이 솟아 그 위용을 자랑하는 피츠로이봉.
1. 빙하 위를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분된다.
2. 로스 글라시아레스 국립공원을 나타내는 이정표.
3. 높이 솟아 그 위용을 자랑하는 피츠로이봉.

지구상 유일하게 늘어나는 빙하 ‘페리토 모레노’
두 번째 날엔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빙하트레킹을 했다. 빙하는 오랜 세월 동안 눈이 쌓이고 다져지고 압축되면서 지구표면에 생긴 거대한 얼음층이다. 따라서 빙하는 타임캡슐과 같다. 수억 년 전부터 현재까지의 모든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

지구 전체 면적의 10%는 빙하로 덮여 있고, 그 중 84%가 남극지역에 있다. 빙하는 세계 담수(淡水)의 75%를 차지하고 있는 만큼 인류의 생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원이다. 로스 글라시아레스 공원은 면적의 30%인 2600km²가 빙하로 둘러싸여 있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많은 천연생수를 생산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웁술라, 스페가찌니 그리고 페리토 모레노 빙하가 로스 글라시아레스 공원에서는 가장 대표적인 빙하다.

특히 페리토 모레노는 하루에 최대 2m, 연간 700m의 속도로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지구 온난화로 줄어들고 있는 대부분의 다른 빙하들과 다르다. 아직까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페리토 모레노가 주목받는 또 다른 이유는 주기적인 얼음벽 붕괴가 장관을 연출하기 때문이다. 빙하 하부에서 흐르는 물의 방향이 빙벽을 약화시키면서 얼음벽을 무너뜨린다.

빙하를 구경하는 방법은 유람선을 타고 아르헨티나호수를 돌면서 큰 빙하들을 보고 스페가찌니 빙하에 내려 점심을 먹는 관광, 4시간 동안 페리토 모레노 빙하 위를 걷고 주변 숲을 산책하는 미니트레킹, 조금 더 강도가 높은 7시간에 걸친 빙하트레킹, 그리고 크루즈를 타고 선상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편안하게 웁살라와 스페가찌니 빙하를 관람하는 방법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나는 미니트레킹을 선택했다. 터키석 빛을 띠는 빙하 녹은 물을 직접 만져보고, 계속 전진하고 있다는 빙하 위를 직접 걷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흥분되는 모험이었다. 바람이 깎아 놓은 푸른 성벽과 보이지는 않지만 계속해서 들리는 빙벽 무너지는 굉음을 들으니 순간 ‘하얀 괴물’이 튀어나와 금방 집어 삼킬 것만 같은 두려움이 느껴졌다. 이곳에서도 우선순위는 당연히 자연이었다. 산장(山莊)은 잠시 몸을 녹이고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을 뿐 그 어떤 편의시설도 없었다. 빙하까지는 1시간 정도 숲속 길을 걸어야만 한다. 곳곳에 짙은 보라색 열매를 맺은 노란색 꽃나무들이 많았다. 바로 칼라파테다. 이 칼라파테 열매를 먹는 사람은 반드시 이곳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빙하트레킹을 위해서는 반드시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자외선 차단제를 바르라는 가이드의 당부가 있었다. 강렬한 반사빛을 받으며 크램폰(고산 등반용 아이젠)을 신고 한발 한발 아찔한 빙하벽을 오르는 스릴은 최고의 쾌감을 선사해 주었다. 간간히 갈라진 얼음벽으로 작은 얼음조각들이 떨어질 때는 등골이 오싹해지기도 했다. 끝이 보이지 않게 펼쳐진 빙원(氷原) 위에서 바라보는 도시는 마치 다른 세계처럼 느껴졌다. 내려올 때 가이드는 긴장감과 피로감을 풀라면서 빙하 얼음을 넣어 만든 위스키와 달콤한 초코파이를 건넸다. 색다른 경험이었다. 빙하물은 소듐과 미네랄이 전혀 들어있지 않기 때문에 갈증해소에 도움이 안 된다고 가이드가 설명해 주었다.

우리 일행은 곧바로 페리토 모레노 빙하 전망대로 이동했다. 이곳에서는 페리토 모레노를 가장 가까이에서 파노라마로 볼 수 있다. 전망대에서는 천둥소리 같은 하얀 괴물의 포효  소리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으며, 운이 좋다면 얼음기둥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도 볼 수 있다. 푸른 하늘과 터키석 빛 호수, 눈부신 태양과 흰색 망토를 덮어 쓴 설산(雪山), 바람이 조각해 놓은 거대한 얼음성벽, 높이 60m, 넓이 5km 그리고 길이 35km에 달하는 끝이 보이지 않는 빙원 등 눈앞에 펼쳐지는 믿기 어려운 절경 앞에서 두려움마저 들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40번 국도 표지판이 보였다. 먼지를 뒤집어쓴 오토바이를 타고 흙길을 달리는 체 게바라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40번 국도는 지구 끝에서 시작해 안데스 산맥을 따라 5244km나 뻗어 있는, 세계에서 가장 길고 아름다운 도로다. 영화 ‘모터싸이클 다이어리’에서 체 게바라는 친구 알베르토와 40번 국도를 달렸고, 그 길은 그를 의학도에서 혁명가로 바꿔 놓았다. 칼라파테 열매를 먹으면 다시 돌아온다는 전설을 기억하며, 다시 돌아와 40번 국도를 달릴 그 날을 위해서 칼라파테로 만든 아이스크림이라도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아이스크림 가게로 들어갔다. 이 지역은 오래전부터 양목축으로 유명하다. 영국의 산업혁명으로 양모산업이 활황을 맞으면서 유럽으로의 양모수출로 많은 부를 축적했다. 그래서 양젖으로 만든 치즈, 아이스크림, 초콜릿 등이 지역 특산품이다. 시내에는 양고기 구이 식당들이 즐비하다. 양고기 숯불구이에 와인을 결들인 저녁식사와 칼라파테 아이스크림 후식은 트레킹과 빙하모험으로 지친 몸을 회복하고 여행을 마감하는 데 좋은 활력제가 될 것이다.

이 장엄한 자연 앞에서 모두는 한가지의 언어로 얘기한다. “와우!” 이곳에서는 얼음의 왕국이 결코 상상의 나라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이곳 어딘가에 눈의 여왕과 흰색 거인이 사는 왕국이 숨어 있을 것 같고, 아직까지도 빙하기에 잃어버린 도토리를 찾아 헤매는 다람쥐를 만날 수 있을 것만 같다. 한국의 자연이 아기자기하고 포용감을 준다면, 이곳의 자연은 장엄하고 위협적이다 못해 두려움마저 갖게 하는 강한 카리스마가 있다.  

 

※ 손혜현 한국외국어대 중남미연구소 초빙연구원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중·고교 시절을 보냈다. 중앙대 정치외교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고 이화여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1년 재직 중이던 한국외국어대 중남미연구소 연구교수직을 그만두고 아르헨티나 유학길에 올라 현재 아르헨티나 토르꾸아토 디 텔라 대학 정치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고, 한국외국어대 중남미연구소 초빙연구원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