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시라이 사건’은 보시라이 전 충칭시 당서기의 부인인 구카이라이의 영국인 살해 혐의로 더욱 파장이 커지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구카이라이, 보 전 서기, 아들 보과과.

 

중국에서 황사가 불어오는 계절에 황사보다 더 짙고 성분을 알 수 없는 정치적 사건, ‘보시라이(薄熙來·65) 사건’을 둘러싼 각종 소문과 풍문들이 한반도로 날아오고 있다. 보시라이 사건이 지니고 있는 파괴력은, 그가 ‘북방의 홍콩’이라고 중국이 자부하는 다롄(大連)시의 시장과 당서기, 국영기업이 몰려 있는 랴오닝(遼寧)성 성장과 당서기, 그리고 대외 무역과 투자를 총괄하는 상무부장(장관)을 거쳐 인구 3000만이 넘는 충칭(重慶)시의 당서기를 하고 있던 거물이라는 점 때문만이 아니다. 그의 아버지 보이보(薄一波·1908~2007)는 국가경제위원회와 국가건설위원회 주임을 지낸 경제전문가이자 덩샤오핑(鄧小平·1904~1997)의 절친한 친구로, 덩샤오핑이 1978년 개혁개방 정책에 착수할 때 경제문제에 관한 한 가장 중요한 자문을 해준 인물이었다. 그런 아버지를 둔 보시라이가 처단당한다는 것은 곧 1978년 이래 중국의 빠른 경제발전을 가지고온 추진력인 개혁개방 정책의 운명이 어떤 상황에 빠질지 모른다는 심각한 불안감을 중국 안팎에 던져주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중국은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정치를 담당하는 중국공산당이 곧 중국 경제정책의 기조를 결정해온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과거의 정치 혼란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보시라이 사건을 둘러싼 중국 국내정치의 혼란이 곧바로 중국경제의 혼란으로 연결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국제사회에 던져주고 있다.

보시라이 사건을 놓고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 겸 당 총서기와 원자바오(溫家寶) 총리가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 겸 당 총서기 세력과 충돌하고 있다느니, 사회 치안과 국내 사찰을 총괄하는 저우융캉(周永康) 정치국 상무위원의 목이 날아갈 것이라느니, 뿐만 아니라 인민해방군 내에도 보시라이 사건을 둘러싼 내부조사가 진행 중이라는 소문도 있고, 오는 10월에 이루어질 시진핑(習近平) 국가부주석과 리커창(李克强) 상무 부총리 체제로의 권력교체에도 보시라이 사건이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등 중국 권력 깊숙한 곳에서 마치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듯 각종 루머가 난무하고 있다.

지난 2월 미국을 방문한 시진핑 국가 부주석이 백악관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영접을 받고 있다. ‘보시라이 사건’은 오는 10월 출범할 시진핑-리커창 체제에도 영향을 끼칠 전망이다.

덩샤오핑의 가장 친한 친구인 보이보를 아버지로 둔 보시라이는 자신의 출세를 위해 아버지의 노선과는 정반대의 문화혁명식 ‘창홍타흑’을 자신의 정치적 업적으로 삼으려 했다.

 

살해혐의로 보시라이의 부인 사법처리 위기

지난 4월17일 현재 분명한 것은, 지난 2월6일 충칭시 부시장 겸 공안국장으로 보시라이 시장의 오른팔이었던 왕리쥔(王立軍)이라는 인물이 쓰촨(四川)성 성도(省都) 청두(成都)에 있는 미 총영사관으로 뛰어 들어가 망명을 기도한 돌발사가 빚어졌다는 점, 3월14일 베이징에서 개막 중이던 전국인민대표대회를 계기로 국정을 설명하기 위한 내외신 기자 회견에 나온 원자바오 총리가 보시라이의 처벌을 내비쳤고, 다음날 보시라이는 중국공산당 중앙의 결정에 따라 충칭시 관련 지방 당직에서 해임됐다. 4월10일에는 당 중앙 정치국원직과 중앙위원 자리에서 축출됐으며, 영국 정보기관 MI6소속으로 보이는 영국인 살해 혐의를 받고 있는 부인과 함께 사법처리와 조사의 대상이 됐다는 점이다.

중국은 마오쩌둥(毛澤東)을 비롯한 혁명 1세대가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승리해서 1949년 10월1일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한 이래, 통치권을 둘러싼 권력투쟁 사건이 많았다. 1978년 덩샤오핑이 리드하는 개혁과 개방의 시대가 시작된 이후에도 천시퉁(陳希同) 베이징 시장과 천량위(陳亮宇) 상하이 시장이 각각 제3세대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 겸 당 총서기 정권과 제4세대 후진타오 현 정권이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 부당하고 파렴치한 축재와 여성 편력 문제로 하루아침에 사법처리의 대상이 되면서 패가망신하고 여론의 칼질을 당해 잊혀진 인물로 사라져 간 기록을 남겼다. 그런 큰 흐름에서 보면, 어쩌면 이번 보시라이 사건은 오는 가을에 출범할 시진핑-리커창 체제의 출범을 앞두고 이 두 사람보다 먼저 떠올랐던 보시라이라는 스타를 제거하고 정리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는 판단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지금 한국의 미디어들과 세계의 유수한 미디어들이 보시라이 사건을 파헤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네 매체들에게 일체의 권력 비판과 불리한 사실 보도를 허용하지 않고, 근본적으로 언론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내외의 미디어를 활용해서 보시라이 정리 작업을 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과거 1989년 천안문 사건 와중에서 상하이시 당서기 겸 시장에서 일약 중앙당 총서기로 발탁된 장쩌민의 권력을 안정화시키는 데 희생양이 된 천시퉁과, 티베트 당서기에서 일약 중앙당 총서기로 내정된 후진타오 현 당 총서기의 권력을 안정시키기 위해 희생양이 된 천량위 사건 때도 수많은 외국 미디어들이 중국 공산당 자체가 흔들린다는 보도를 엄청나게 했지만 결국은 천시퉁과 천량위가 깨끗하게 제거되는 전례를 남겼을 뿐, 중국공산당 자체는 건재했다.

중국공산당은 2010년 가을에 열린 제17기 중앙위원회 5차 전체회의에서 그동안 양적 팽창을 거듭해오던 중국경제의 성장방식을 질적 성장으로 전환해서 ‘포용적 성장(包容性 增長ㆍInclusive Growth)’을 하겠다는 당론을 결정한 바 있다. 이 결정에 따라 중국경제는 지난해 3월에 시작된 제12차 5개년 계획기간 동안 성장 목표를 2011년은 연간 8%로, 2012년부터는 7%대의 성장을 목표로 하기로 설정됐다. 올해의 경우 원자바오 총리가 지난 3월초의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밝힌 것처럼 7.5%의 성장이 목표인 것으로 제시됐다.


미국과 유럽, 그리고 우리와 일본을 포함한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제성장률은 대체로 연초에 정부가 제시한 목표선 이하에서 결정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중국경제의 특성 가운데 중요한 일면은 연초에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총리가 발표한 성장률 목표를 훨씬 능가하는 성장률 성적이 연말에 달성된다는 점이다. 이유는 웬만한 한 국가의 인구와 면적을 보유하고 있는 지방의 성(省)을 담당하고 있는 당서기와 성장들이 자신들의 출세를 위한 가장 중요한 수단을,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성의 GDP 성장률로 잡고 있기 때문이다. 당원수 8000만명으로, 세계 최대의 정당임을 자부하는 중국공산당에서 정치적 생존을 위해서는, 불과 9명으로 구성된 정치국 상무위원단을 향해 수직 상승을 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중국공산당 간부들이 너도나도 GDP 성장률에만 매달리는 패러다임이 바뀌지 않는 한 중국경제라는 기관차는 계속해서 과속 질주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구조를 갖고 있다.

중국경제가 안고 있는 더 큰 문제는, 바로 경제에 대한 이해가 깊지 못한 중국공산당 간부들이 중국경제의 방향타를 쥐고 있으며, 비민주적인 의사결정구조를 갖고 있는 중국공산당이 간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는, 마치 달려야 쓰러지지 않는 자전거처럼 중국경제를 발전시켜 하고, 그래야 중국공산당 자체의 존속도 가능하다고 믿고 있는 체제 자체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개혁과 개방의 시대를 이끈 덩샤오핑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경제 자문역이었던 보이보를 아버지로 둔 보시라이가 자신의 출세를 위해 아버지의 노선과는 정반대의 문화혁명식 ‘창홍타흑(唱紅打黑ㆍ마오시대의 붉은 이데올로기를 선양하고 홍위병식으로 부패를 뿌리뽑는다)’을 자신의 정치적 업적으로 삼으려 했다는 점이 바로 비극의 출발점이었을 것이다.

과거 1970~80년대에 한국이 ‘확대 지향의 나라’였던 것처럼, 중국도 지금 확대 일변도로 달려가고 있는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은 과연 언제까지 확대지향의 나라일 수 있을지, 보시라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 경제계는 보다 긴 안목으로 중국경제를 조망해보는 기회를 가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