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노동자는 슬프다. 본인 감정 대신 고객만족을 위해 언제나 웃어야 해서다. 아쉽게도 그 웃음의 대가는 대부분 열악하다. 경쟁 격화로 유통업체 판매현장은 사실상 최악의 근무현장 중 하나로 전락했다. 예외도 있다. 바로 일본 유통거물 다이에다. 빼어난 접객 서비스를 제도적으로 실천해 ‘CS(고객만족)보다 ES(직원만족)가 먼저인 회사’로 평가받는 다이에의 속을 들여다본다.
- 다이에에서 근무하는 한 직원
- 다이에에서 근무하는 한 직원

다이에는 도·소매 일괄체인을 보유한 까닭에 아르바이트·파트타임 등이 많다. 많을 때는 정규직의 6~7배나 됐다. 줄어들었어도 여전히 3~4배에 달한다. 그만큼 이직은 흔하게 여겨진다. 그런데 요즘은 달라졌다. 다이에 비정규직의 근무만족도는 정규직 못잖게 높다. 노력하면 정당한 보상과 대접을 해주는 시스템이 구축된 결과다. 

직원만족의 핵심은 ‘인간적인 대접’이다. 직원을 소모품이 아닌 사람·가족으로 인식하겠다는 자세 변화가 주효했다. 이는 2000년대 이후의 체질개선을 위한 제도개혁 차원에서 비롯됐다. 포인트는 두 가지다. 일종의 제도철학인 ‘CVC(Category Value Center)’ 구상과 실천수단인 ‘CAP (Contract of All Partner)’ 제도다. CVC구상은 ‘할 수 있는 사람과 하고 싶은 사람’에게 적정업무를 맡기는 개념이다. CAP제도는 CVC구상의 실현방법이다. 입사 당시 계약신분으로 근로자를 구분하는 게 아니라 본인들이 선택한 근로형태·방법에 따라 계약하는 방법이다. 인사제도의 변화는 임금제도까지 바꿔버렸다. 즉 동일노동·동일임금이다.

 

소비자 중심 유통개념 최초 시도

다이에는 한때 엄청난 성장행보 속에 ‘주식회사 일본’을 상징하는 선두기업에 올랐을 정도로 막강파워·지명도를 갖췄다. 잘나갈 때는 연매출 3조엔에 소속종업원 10만명, 거래처만 3000개사에 달했다. 하지만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했던가. 1990년대 이후는 바람 앞의 등불 신세가 됐다. 장기침체 탓이다. 2000년대는 창업자가 반강제적으로 옷을 벗었고 2004년엔 사실상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그러나 기업재건을 위한 외부 구원투수가 투입되면서 개혁과제가 빛을 보기 시작했다. 아직 갈 길은 멀지만 다이에가 바닥을 벗어났다는 건 중론이다. 상처뿐인 영광이라며 여전히 부정적인 전망도 적잖지만 확실한 건 경영부활 기대감의 조성이다.

다이에의 상징키워드는 ‘가격파괴’다. 소비자주체 유통시스템을 세운 최초 회사다. 동시에 상업시설과 도시설계까지 포함된 유통개념을 실천한 선구기업이다. 출발은 가업이던 작은 약국이었지만 한때 일본 최고 매출기업에 오르는 성공스토리를 써왔다. 상당한 부침·굴곡이 있었지만 가격파괴란 타이틀로 시장의 가격선택권을 공급자에서 소비자로 되돌려준 다이에의 공로는 혁혁하다. 1960년대 시장가격은 메이커가 완전히 장악한 반면 소비자는 철저히 약자에 머물렀다. 좋은 제품을 싸게 사는 구매방식·점포가 흔해진 지금엔 상상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이때 다이에는 남달랐다. 더 좋은 제품을 더 싸게 사려는 소비상식의 편에 섰다. 지난 1961년 PB(Private Brand) 개념을 업계 최초로 고안해 값비싼 물건조차 좋은 품질로 저가에 파는 혁명적인 아이디어를 실천했다. 인기몰이는 당연했고 회사명성은 비례해 높아졌다.

이를 고안·실천한 이는 창업자 나카우치 이사오(中內功)다. 일본의 유통혁명을 이끌며 여러 혁신시스템을 확산시킨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오사카(大阪)와 고베(神戶)를 중심으로 유통인프라를 착실히 정비하며 고도성장의 주역으로 급성장했다.

1980년대에는 전국의 토착 슈퍼마켓과 제휴해 산하에 두면서 유통그룹으로 대변신했다. 이종영역까지 진출하는 적극적인 확장정책은 버블 당시 전성기를 맞았다. 이후 1990년대 ‘잃어버린 20년’이 시작되면서 보유부동산이 뒷덜미를 잡았다. 경영독선·갈등까지 불거지면서 거액의 채무를 안은 채 기업재생 프로그램에 들어갔다. 덩치확대가 버블시기와 맞물리면서 치명적인 충격을 받은 결과다.

- 다이에 점포 외관
- 다이에 점포 외관

하야시 후미코, 구원투수로 투입돼

창업자는 2000년 대표권 없는 최고고문으로 물러났다. 그러면서 2004년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정부로선 청산·도산도 방법이었지만 다이에의 영업규모와 파급효과가 워낙 커 사회문제로 불거질 수 있다고 봐 재생카드를 선택했다. 이후 새 경영진이 구성되고 외부환경이 개선되면서 회사는 조금씩 체력을 회복했다. 이젠 부채도 거의 상각했다. 다이에의 화려한 성공과 처참한 몰락은 큰 이슈가 됐다. 당연히 재건카드도 주목받았다. 이때 등장한 구원투수가 하야시 후미코(林文子)다. 당시 일본을 대표하는 최고의 여성 최고경영자(CEO)로 입소문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판매·영업출신인 그녀는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로 알려졌다. 2005년 재건요청을 받고 회사에 합류한 그녀는 개혁을 진두지휘했다. ‘물건보다 사람·인간관계를 판다’는 철학은 ‘하야시 신드롬’으로 불리며 주요뉴스로 부각됐다. 결국 다이에는 부도 위기를 딛고 일본 최대 유통그룹으로 우뚝 올라섰다. 다이에 이후엔 요코하마 시장(현직)에 당선되는 기염까지 토했다.

종업원을 위해 화장실 개조공사를 벌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원이 불만스럽고 피곤해하면 고객만족은 없다”며 “이들이 웃도록 생활기반을 지원해주는 게 회사 역할”이라고 했다. 특히 강조하는 건 인간관계다. 물건보다 관계가 우선이며 파는 것보단 웃으며 헤어지는 걸 강조했다. 고객이란 물건과 함께 판매자까지 사기 때문이다. CEO도 내부고객인 종업원의 마음을 사는 데 앞장섰다. 먼저 인사하고 감사메시지를 던졌다. “고맙다”는 그녀의 입버릇 중 하나였다. 감동바이러스의 전파는 일할 맛을 한껏 고무시켰다. 팀워크로 연결된 건 물론이다. 판매현장은 즐거워야 하며 그 즐거움이 확대될 때 최고의 결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취임 이후 실시된 사원대상 설문조사에서도 “직원을 격려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는 대답이 압도적이었다.

 

Tip. 다이에식 인사제도

 

파격적 CVC·CAP제도…

정규직·비정규직 장벽철폐

CVC(Category Value Center) 제도는 입사 당시 신분보다 입사 이후의 근로의지·능력을 중시하겠다는 발상에서 비롯됐다. 인사제도의 대폭적인 개혁의지로 포인트는 유연한 인재배치다. 과거 인사제도는 처우 중심이었다. 고용·근무지별로 인재를 배치해 능력·의지와는 큰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CVC에선 연공요소를 없애 일·성과·시세에 따라 임금을 나눠 정규직 여부와 무관하게 일에 맞춰 인재를 배치했다. 그 실천수단이 ‘CAP(Contract of All Partner)’ 제도다. 근로요건과 희망근로의 조화추구다. 이로써 회사와 직원 사이의 계약은 새롭게 구분된다. 간부사원부터 파트타이머까지 일괄대상이며 2004년 전체 종업원의 신제도로의 이행이 완료됐다.

종업원은 근무형태와 이동범위에 따라 4개 계약제로 분류된다. 영업시간이 길고 교대근무가 통상적인 업종이라 풀타임 의미도 바뀐다. 1일 8시간 근무가 중요하지 않고 교대·주말근무 가능 여부 등이 기준이다. 계약종류는 △제너럴 캡(풀타임. 전근가능. 과거 정규직 상당. 관리직은 직무가치에 근거한 연봉제. 일반직은 연공요소 배제. 역할에 따른 임금체계. 실질연봉제) △캐리어 캡(풀타임. 전근 불가능. 1년 등 유기계약. 역할에 따른 임금체계. 퇴직금은 상여형태. 일급월급제. 주3일 근무 등 단시간 정규직 가능성 염두) △액티브 캡(파트타임. 전근 불가능. 종래 파트타이머 해당. 유기계약. 시간급. 동등능력의 제너럴 캡과 동일임금. 과장까지 승진) △프로페셔널 캡(파트타임. 전문직종. 특별한 고도기술·기능인재 대상. 유기계약. 시장가치에 따른 완전연봉제) 등으로 구분된다.

다소 복잡하지만 핵심은 본인 입맛에 따른 근로형태의 자율선택이 가능하단 점이다. 육아·간병 등 개인사정에 맞춰 계약형태를 정하는 식이다. 액티브 캡과 캐리어 캡 혹은 캐리어 캡과 제너럴 캡은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다. 파트타이머로 입사해도 풀타임이 가능하면 캐리어 캡이 되고, 전근까지 가능하면 제너럴 캡으로 이동된다. 이는 곧 현장에서 일하는 파트타이머의 의지향상으로 연결된다. 명칭만 바뀌지 않았다. 임금체계도 계약구분에 따라 재설정됐다. 과거 고용구분마다 설정되던 관리직, 일반직, 파트타이머 임금을 시장시세, 일, 성과라는 임금 구성요소로 분해·비교분석을 실시했다. 관리·일반직은 퇴직금까지 포함한 임금총액을 시간급화해 파트타이머와 비교(고용구분 간 임금격차는 ±5% 이내 범위로 설정)했다. CAP제도는 종래의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적인 고용구분을 중단한 상징사례다. 동일노동·동일임금의 균등처우 확보를 위해 시간당 임금체계로 전환하면서 단시간 정규직을 포함한 근로형태 다양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다. 실제 2004년 이후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신분전환에 성공한 근로자가 많다.

 

Tip. CEO 탐구

회사의 성공·좌절·부활스토리는 두 명의 인물분석에서 시작된다. 창업자 나카우치 이사오(中內功)와 전직회장 하야시 후미코(林文子)가 그렇다. 창업자가 존립기반을 다졌다면 구원투수는 질적인 혁신진화에 매진했다.

◇ ‘창업자’ 나카우치 이사오(中內功) = 1922년 출생해 평생을 유통전문가로 살았다. 소비자주체형 유통시스템을 구축해 일본의 유통혁명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일찌감치 공부엔 열정도, 관심도 없어 대학에 실패했다. 1943년 태평양전쟁 때는 필리핀에 배치돼 중상을 입고도 기적적으로 생환했다. 이 경험은 훗날 “행복은 우선 물질적 풍요로부터 비롯된다”는 그의 인생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57년 가업영향(약사부친)을 받아 ‘주부의 가게 다이에 약국(다이에 1호점)’을 열었고 이후 식료품 등으로 영역을 확대했다. 점차 점포를 늘려나가던 중 기존개념을 깬 가격파괴 정책을 도입해 화제를 모았다. 기존메이커의 압력에도 불구, 큰 갈채를 받았다. 1964년엔 이중가격 고수차원에서 공급중단에 맞선 마쓰시타 전기와 대립했다. 이는 30년 후(1994년)에야 마쓰시타의 굴복형태로 마무리돼 업계에선 ‘30년 전쟁’으로 부른다.

회사는 승승장구했다. 1972년 대형백화점 미츠코시(三越)를 누르고 소매업 넘버원에 올랐다. 1980년엔 업계 최초로 매출액 1조엔을 달성했다. 명실상부한 업계 리더로서 내적성장과 외형확대를 반복했다. 창업자를 둘러싼 비난도 많다. 2세 승계를 위해 주위에 예스맨만 배치했고 원 맨(One man) 체제를 장시간 유지해 각종 폐해를 보였기 때문이다. 이 결과 2001년 그는 “이젠 시대가 변했다”며 회사를 떠났다. 2005년 사망했는데 끝은 ‘유통제왕’답지 않게 초라했다.

그는 대단한 일벌레였다. 신혼여행지에서조차 전화로 일에 매달렸다. 가정보다 일이 먼저였다. 반면 가족애는 상당했다. 부하에게 딸 얘기를 하며 “너무 바빠 아빠 역할을 못해준다”며 눈물을 흘린 일화가 있다. 화가 나면 누구도 제어하지 못할 정도지만 인정 또한 깊은 인물로 기억된다.



◇ ‘구원투수’ 하야시 후미코(林文子) = 1946년생으로 경영인·정치인이다. 다이에와 더불어 BMW도쿄 등의 최고경영자(CEO)를 비롯해 요코하마 시장직함까지 움켜쥐었다. 젊었을 땐 혼다자동차 판매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다이에와의 인연은 2005년 회사재건을 위한 지원기업이던 마루베니의 요청으로 시작됐다. 애초 고문에 취임했다 1개월 만에 회장·CEO에 올랐다. 이후 3년을 다이에와 함께 했다. 2009년 민주당 추천의 무소속으로 요코하마 시장에 도전·선출됐다. 여성시장은 19개 정령(政令=인구 50만 이상의 독립행정도시)시 중 2번째 당선 기록이다. 드물게 자유로운 영혼으로도 평가된다. 2010년엔 남편이 본인을 모델로 그린 누드화를 관보에 게재해 화제를 모았다.

하야시 전 회장은 사람 마음을 잘 읽는 인물로 유명하다. BMW에선 특히 동료·고객애정을 한몸에 받았다. 덕분에 최초의 여성지점장에 발탁됐다. 지점장 시절엔 실적 나쁜 점포에 부임해 부하의 장점을 철저히 칭찬함으로써 잠재능력을 발휘하게 해 1위 점포로 거듭나기도 했다. 그녀는 평소 직원만족과 행복근무를 지론처럼 강조한다. 늘 “사원의 여유가 고객마음을 잡는다”거나 “사원이 잘 쉬고 친절할 때 고객을 위한 새로운 제안이 가능하다”는 철학을 강조한다. <이상할 정도로 일이 잘 되는 말 한마디의 비법> 등의 저서가 있다. 맹렬한 여성 CEO에서 정치가로 변신한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기족과의 저녁식사’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