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 울라프 첨탑
- 성 울라프 첨탑

지난 겨울, 새봄이 오면 꼭 가겠노라 했던 친구 안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지난 3월 첫 주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으로 향했다. 독일 뒤셀도르프의 웨이즈 공항에서 비행기로  2시간10분 걸리는 탈린 공항에 도착한 것은 꽤 늦은 시간이었다.

안개 자욱한 공항을 뒤로 하고 구(舊)탈린 시내의 한 호텔에 여정을 풀었다. 노르웨이의 왕 울라프 2세에게 헌정됐다는 성 울라프 교회의 첨탑은 안개에 싸여 신비로운 기운을 뿜고 있었다. 중세 이래 벼락을 10번이나 맞은 첨탑이다. 에스토니아가 구(舊)소련에 속해 있던 시기에는 KGB(구소련의 국가보안위원회)의 정보 수집을 위한 전파 송신탑 역할을 했다. 참으로 많은 시련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자 신비감이 더했다.

독특한 매력을 가진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은 13세기 덴마크인에 의해 세워진 도시다. 탈린은 ‘덴마크 사람의 거리’라는 뜻의 에스토니아어다. 도시 이름에서 이미 덴마크의 도시임을 알 수 있다. 13세기부터 중세 유럽의 중심지였던 탈린은 오랜 세월 장사를 위해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이 서로 교류했던 정겨움이 묻어 있다. 중세의 정취를 한껏 누릴 수 있는 구시가지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더불어 휴대폰 없이 살 수 없는 세대에게는 가장 관광하기 좋은 곳이기도 하다. 도시 곳곳에서는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와이파이가 잡혔다. 첨단 정보도시로서 전혀 손색이 없었다. 호텔과 레스토랑은 옛 건물의 특징을 유지하면서도 세련되고 편리하게 잘 보수돼 있었다. 옛 것과 새 것의 조화가 잘 돼 있는 도시로는 첫 번째로 꼽힐 만하다.

시청 광장에서 성 울라프 교회로 접어드는 길에 있는 바(Bar)의 공연에서 두 명의 젊은 음악인을 만났다. 보컬은 핀란드, 드럼은 에스토니아 출신이란다. 영어를 자유롭게 사용하는 덕분에 유럽의 많은 도시를 돌아다니며 공연 중이라고 했다.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와 탈린은 발틱해를 사이에 두고 2시간 정도의 페리를 타고 왕래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깝다. 그런 까닭에 많은 핀란드 사람들이 쇼핑을 위해 에스토니아를 찾는다.

- 탈린 구(舊)시가지 모습
- 탈린 구(舊)시가지 모습

구소련으로부터 독립 후 급속도로 경제성장
에스토니아는 1991년 구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그야말로 숨 쉴 겨를도 없이 빠르게 성장했다. 인구 130만명 정도의 작은 나라지만 자체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2004년 3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그해 5월에는 유럽연합(EU)에 가입했다. 이후 2007~09년 동안 유럽 경제위기에도 불구하고 경제성장이 급속도로 이뤄졌다. 에스토니아는 EU 국가 가운데 가장 낮은 채무를 자랑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는 교육 유토피아로 불리는 핀란드와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에스토니아는 선거에 전자투표를 실시한 최초의 나라이기도 하다. 인터넷 투표 시스템의 역사가 세계에서 가장 길고 기술적으로 선진화돼 있다. 세계인을 연결하는 인터넷 화상 통신으로 유명한 스카이프를 개발한 주역도 에스토니아인이다. IT(정보기술)산업의 발전 속도가 빠른 나라 중 하나다.

에스토니아는 주변국인 스웨덴, 덴마크, 독일, 러시아 등으로부터 무수한 침략을 받았다. 국민들이 원하지 않았지만 사회주의의 길을 걸어야 했던 비운의 역사도 가지고 있다. 이런 시련의 역사에서 에스토니아의 무한한 잠재력과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둘째 날, 안나 부부와 함께 탈린 거리를 거닐었다. 마침 북유럽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햇빛이 도시의 안개를 걷어갔다. 햇빛 가득한 탈린의 시청 광장에는 차가운 바람이 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나와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스웨덴, 독일, 핀란드, 덴마크, 네덜란드 등 다양한 나라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저녁을 먹기 위해 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옮겼다. 테이블마다 남녀 한 쌍이 마주하고 있었다. 한 다발의 꽃과 함께 자리한 나이 지긋한 남녀의 모습이 정겨웠다. 자리를 잡고 앉자 안나의 남편인 라이보가 상자 두 개를 꺼내 하나는 안나, 또 하나는 필자에게 건넸다.

“뭔가요?”라고 묻는 필자에게 “어릴 적 같은 선물을 주지 않으면 여동생들은 화를 냈어요. 그래서 똑같은 걸 샀어요. 한번 열어보세요. 오늘이 여성의 날이잖아요. 에스토니아에서는 이 날 모든 남자가 여자에게 선물을 해요. 이 날 만큼은 외식을 하며 여자를 위한 시간을 마련한답니다.” 그 말을 들으니 레스토랑의 분위기를 순식간에 이해할 수 있었다.

1991년까지 공산주의 국가였던 에스토니아에서 여성의 날은 가장 중요한 행사 중 하나다. 그리고 요즈음은 여성의 날이 있는 주간에는 꽃값이 기존 가격보다 4배나 뛴다고 한다. 라이보는 “에스토니아의 꽃은 모두 네덜란드에서 수입된다”며 “네덜란드가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건 에스토니아 덕분”이라며 웃었다.

안나의 집은 탈린에서 65㎞ 떨어져 있는 라플라에 있었다. 안나의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 아직도 구소련 시대에 지어진 건물을 볼 수 있었다. 회색빛의 차가운 건물은 옛 동독지역에서 만났던 건물과 꼭 닮았다.

안나의 서재에는 1991년 에스토니아가 독립한 이후 두 번째 대통령이었던 렌나르트 메리(Lennart Meri)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이야기의 주제가 에스토니아의 정세와 인근 국가의 상황으로 넘어갔다.

에스토니아 인근 국가인 리투아니아는 최근 징병제 추진을 발표했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러시아 인근국의 두려움이 점점 커지고 있는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1. 시청 광장 카페에서 햇빛을 즐기고 있는 관광객들. 2.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탈린의 구시가지.
1. 시청 광장 카페에서 햇빛을 즐기고 있는 관광객들.
2.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탈린의 구시가지.

러시아 행보에 불안한 주변국
렌나르트 메리는 지금은 고인(故人)이 되었지만 많은 에스토니아인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에스토니아의 성장 발판을 만든 사람 가운데 한 명으로 평가 받는다. 작가이기도 했던 메리는 에스토니아 국민들의 마음속에 민족주의를 깊이 뿌리내렸다.

외교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프랑스 파리와 독일 베를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는 등 에스토니아와 유럽 여러 나라를 두루 보며 자랐다. 이후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외교관으로의 삶을 살았지만 에스토니아는 소련의 점령으로 나라 없는 국민이 됐고 가장 혈기 왕성했던 시기를 연극과 드라마 제작, 글을 쓰는 일로 보냈다. 그는 당시 에스토니아와 같이 작은 나라가 주변국의 점령으로 인해 설움을 겪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썼고 직접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했다.

수많은 주변국에게 나라를 빼앗겼던 에스토니아는 언어와 문화를 유지하며 뿌리를 지켰기에 생존할 수 있었다. 에스토니아는 1991년 8월 독립했고 1994년 8월 마지막 소련 군대가 떠난 이후 폭발적으로 발전했다. 안나는 그 당시의 슈퍼마켓 모습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고 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줄을 서서 분유를 배급 받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수십 종의 다른 브랜드 제품이 마트에 진열됐다고 한다. 그녀는 “보지 않았으면 절대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고 덧붙였다.

독립 후 러시아인들이 많이 빠져나가면서 에스토니아의 인구는 줄어들었지만 아직도 러시아인은 에스토니아 인구의 3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얼마 전 에스토니아의 선거에서는 친유럽연합을 주장하는 개혁 정당이 승리를 거뒀다. 현 정부는 우크라이나 사태 발생 이후 러시아에 강력 대응하는 정책을 펴나갈 것을 강조하고 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군의 에스토니아 주둔과 국방비 증강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에스토니아 국민들은 친러시아 세력이 커질 경우에 대한 불안감을 완전히 떨쳐내지는 못한 상황이다.

그녀는 아직도 먹을 것을 배급 받기 위해 줄을 서 있었거나, 아버지가 배를 타고 노를 저으며 불렀던 노래가 금지곡이었기에 시베리아에 끌려가 중노역으로 몇 년을 보낸 후 돌아와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던 일들을 기억했다. 그리고 요즈음 아무런 생각 없이 식료품을 사재기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는 말을 하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2015년 봄, 에스토니아는 불안했다.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러시아의 행보는 주변국들을 불안하게 하고 있다. 아니 유럽 전역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