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싱그룹(復星集團)은 지난 1992년 중국 푸단(復旦)대 졸업생들이 세운 중국 최대의 민영기업이다. ‘중국판 버크셔 해서웨이’로 불리고 있는 푸싱그룹은 명성에 걸맞게 매년 기업 투자로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 지난 2007년 홍콩증시 기업공개(IPO)에 성공한 푸싱그룹은 글로벌 금융 플랫폼까지 구축했으며 이를 토대로 최근에는 세계 유명 기업들을 속속 인수·합병(M&A)하고 있다. 자본금 3만8000위안(한화 약 687만원)으로 시작해 20년 만에 시가총액 400억위안(7조456억원)으로 커진 푸싱그룹을 이끌고 있는 궈광창(郭廣昌) 대표는 누구이며 푸싱신화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1. 푸싱그룹 본사 / 2. 궈광창 푸싱그룹 대표 3. 푸싱그룹은 지난 2010년 프랑스에 본사를 둔 가족형 고급 리조트 ‘클럽메드’를 인수했다. 사진은 클럽메드 발리.
1. 푸싱그룹 본사 / 2. 궈광창 푸싱그룹 대표
3. 푸싱그룹은 지난 2010년 프랑스에 본사를 둔 가족형 고급 리조트 ‘클럽메드’를 인수했다. 사진은 클럽메드 발리.

600만원으로 시작한 회사 20년 만에 7조원으로 키워
덩샤오핑이 남순강화(南巡講話·중국 남부지방의 경제개방 촉구를 발표한 담화)를 발표했던 지난 1992년 푸단대 철학과를 졸업한 궈광창은 유학을 포기하고 향후 경제특구가 될 상하이(上海)에서 창업을 결심했다. 그해 그는 졸업 동기생 량신쥔(梁信軍), 왕췬빈(汪群斌), 판웨이(范偉), 탄젠(談劍)과 함께 광신테크놀로지를 세웠다.

시장조사와 컨설팅 업무를 주로 하던 광신테크놀로지는 궈광창을 비롯, 동료들의 뛰어난 수완으로 창업 10개월 만에 100만위안(1억7600만원·4월10일 환율 기준)의 수익을 올렸다. 어느 정도 사회 초년생의 티를 벗은 이들은 1993년 의약품 산업으로 눈을 돌려 새로운 간염진단 시약 PCR(종합효소연쇄반응) 개발에 성공, 생물의약 산업에 첫 걸음을 내딛었다. 이후 궈광창은 간염항체진단기를 팔아 1억위안(176억원)을 벌면서 첫 대박을 터뜨렸다. 궈광창과 량신쥔의 중간 글자를 따와서 만든 이름인 회사명 광신(廣信)은 이후 푸싱(復星·Fosun)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여기에 외부 투자 자본까지 더해지면서 회사로서의 면모를 갖췄다.

2000년대 초반 중국 정부의 국영기업 민영화 과정에서 기회를 포착한 궈광창은 이후 연쇄적으로 사업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2001년 상하이 명물인 위위안상청(豫園商城)의 지분 13.25%를 인수하는 것을 시작으로, 2002년에는 소매업, 2003년에는 철강업과 증권업, 2007년에는 광산업, 2011년에는 보험업, 그리고 2012년에는 의약, 부동산, 서비스업까지 진출하며 ‘중국판 버크셔 해서웨이’란 호칭을 얻었다. 

2010년 이후 본격적으로 해외투자를 시작한 궈광창은 프랑스에 본사를 둔 고급 가족형 리조트 ‘클럽메드’를 인수하면서 세계 투자업계에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같은 해 미국 뉴욕 맨해튼에 위치한 60층 ‘원체이스 맨해튼 플라자’ 건물을 매입하면서 미국 부동산 시장에도 뛰어들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 부동산 기업 이데라캐피털매니지먼트 인수를 통해 도쿄 시내 25층 빌딩까지 사들였다. 현재 궈광창은 그리스 면세점, 주얼리 제조업체 폴리폴리, 럭셔리 패션 브랜드인 라파엘카루소까지 소유하는 등 매년 사업을 급팽창시키고 있다.

궈광창의 관심은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그는 금융산업을 통해 한국시장 진출을 적극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푸싱그룹은 LIG손해보험을 비롯해 현대증권과 KDB생명 인수전에 참여하는 등 한국 금융시장 진출에 적극적인 모습이다. 

중국 사회에서는 궈광창을 비롯한 이들의 창업사가 신화(神話)와 같다고  말한다. 생물의약, 강철, 부동산, 정보산업, 금융 등 여러 영역에 방대한 산업규모를 구축하고 있는 푸싱그룹은 직간접적으로 관련돼 있는 회사만 100개가 넘는다.

그렇다면 푸싱그룹은 어떻게 신화가 되었을까? 궈광창은 푸싱그룹이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푸싱그룹이 지난 20년 동안 빠르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기회를 잘 포착해서였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에는 네번의 기회가 있었다. 수많은 자영업자가 출현한 개혁 초기가 첫 번째였고, 1992년 덩샤오핑의 남순강화 이후 지식인들의 창업열풍이 불던 때가 두 번째였다. 여기에 기본적인 조건만 갖추면 정부로부터 사업체 설립 허가를 얻을 수 있도록 자본시장 제도가 바뀌면서 민영기업들은 또다시 기회를 맞았다. 1998년 국영기업들이 비경쟁성 영역에서 분리돼 나온 것 또한 중요하다. 오늘의 푸싱은 신화가 아니라 1992년 이후 세 번의 기회를 잘 포착해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이다. 푸싱은 20년간 빠르고 건강하게 발전해 왔으며 중간에 발전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비록 좌절을 맛보기도 했지만 쓰러지지 않았고 역경 중에 도전과 담대함을 배웠다. 업계의 선구자에서 리더를 향해 전진하고 있다.”

‘워런 버핏과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 포부 밝혀
‘언젠가는 워런 버핏과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는 꿈을 숨긴 적 없는 궈광창은 보험업을 중심으로 한 종합금융그룹을 세우려는 원대한 목표를 갖고 있다. 최소 5년 이상을 생각하는 장기 투자로 그는 상장사, 비상장사를 막론하고 모두가 투자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푸싱그룹은 지난 2014년 중국 부자연구소인 후룬(胡潤)리포트가 선정한 중국 500대 기업 중 32위에 올랐다. 궈광창 자신도 포브스가 발표한 자료에서 순보유 자산이 48억달러(약 4조6000억원)로 중국 내 25위, 세계 345위에 랭크됐다.

현재 푸싱그룹 대표를 역임하고 있는 또 다른 신화 ‘량신쥔’은 최근 중국 언론과 인터뷰에서 “ 2014년 푸싱그룹은 15개 분야에서 약 53억달러(한화 약 5조원)를 해외에 투자했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그는 “앞으로 5~8년 이내에 현재 약 3300억위안(한화 약 59조원)인 푸싱그룹의 자산은 5~10배로 늘어갈 것”이라고 확신했다. 궈광창은 푸싱그룹의 모교라 할 수 있는 푸단대에 1억위안(한화 176억원)을 기부해 의료분야장학재단을 만드는 등 인재 투자에도 적극적이다. 현재 중국 언론들은 학생 시절 정부보조금을 받아 기숙사 학생을 대상으로 빵을 팔았던 궈광창이 동료들과 함께 무일푼으로 시작해 20년 만에 중국 최대급 기업으로 올라선 것에 대해 환호성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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