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연명에 취하고, 이백에 또 취하고…

<일러두기>

❶ 현대 중국의 인명 및 지명, 중국의 고유명사는 중국어 발음대로 표기했다.

 단,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고유명사는 한자 독음대로 표기하였다.

 <예> 毛澤洞 마오쩌둥 西安 시안 / 長江 장강 杏花村 행화촌

❷ 술 이름의 경우에도 중국어 발음대로 표기해야 하나 우리에게 익숙한 술에 한해서만 그렇게 했다.

 여타의 술은 발음이 어렵거나 의미 전달이 잘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에서 한자 독음으로 표기했다.

 <예> 茅台酒 마오타이주 五粮液 우량예 / 黃鶴樓酒 황학루주 劍南春 검남춘

❸ 신 중국 수립(1949년)을 기준으로 그 이전의 인명 및 지명은 한자 독음대로 표기했다.

 <예> 李白 이백 杜甫 두보 南京 남경

- 채석산 기슭의 산책로. 옆으로 장강이 도도히 흐른다.
- 채석산 기슭의 산책로. 옆으로 장강이 도도히 흐른다.

2005년 봄, 주말 시간을 내어 저우장(九江)의 루산(廬山)을 다녀오기로 했다. 난징을 출발한 나는 도중에 안후이성의 티옌주산(天柱山)에 들렀다가 다음날 저우장으로 이동했다. 저우장 버스터미널에서부터 극성맞은 택시 호객꾼에게 붙잡혔다. 하는 수 없이 택시 편으로 산중으로 들어가는데 가랑비와 안개가 풍경을 가렸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던가. 요기부터 해야겠다 싶어 택시 기사가 추천한 산기슭의 작은 식당에 들어갔다. 선뜩한 날씨를 이기려고 닭곰탕과 배갈을 시켰는데 이 고장 전통 배갈이라면서 나온 것이 ‘도령주(陶令酒, 타오링주)’였다.

상표를 보곤 이내 도연명을 떠올렸다. 이곳 저우장 땅이 곧 그가 살았고 묻힌 곳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식으로 술 이름을 새기면 ‘도 사또님 술’쯤 될 듯싶었다. 사실 도연명은 이 근처 작은 고을에서 사또를 지낸 적이 있다. 술 이름이 반가운데 한지 같은 종이로 주둥이를 감싼 앙증맞은 술병이 또 마음에 들었다. 술맛도 썩 괜찮았다. 짜릿한 술기운이 혓바닥을 자극한다 싶었는데 금세 부드러움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마신 뒤에 남는 여운의 향도 여느 저가의 배갈 향에서 느끼는 것과 달랐다. 더러 역겨운 향이 나는 것도 없지 않은데 이 술은 고급 배갈과 같은 깔끔한 향을 남겼던 것. 닭곰탕 또한 우리네 삼계탕마냥 온갖 약재를 넣고 푹 곤 것인데 내 까다로운 입에도 딱 맞았다. 뜻밖에 만난 좋은 술에 기름진 안주까지 있으니 만사가 넉넉했다. 도도한 취기를 느끼며 바깥으로 나오니 그 사이 비가 그쳤다. ‘여산 진면목’까지는 아니지만 이름 높은 산의 기이한 봉우리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도령주를 만들어 파는 강서도령주업회사는 원래 ‘우량예(五粮液)’ 그룹에 속했던 양조장 ‘만점향(滿店香)’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지금도 우량예의 베테랑 기술자들이 직접 술을 빚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쌀과 밀, 수수, 옥수수, 찹쌀 등 다섯 가지 곡식을 원료로 하며 보리로 만든 누룩을 쓴다. 오래된 구덩이에서 30일 동안 발효시키며 깨끗한 지하수를 뽑아 올려 술을 빚는다. 우량예와 마찬가지로 농향형 배갈이다. 

도연명의 고장에서 만난 ‘도령주’

- 도연명의 시와 초상이 담긴 옛 그림.



그러나 무엇보다 이 술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 것은 이 지역의 두터운 문화 바탕이다. 기록에 따르면 1600년 전 시인 도연명이 이곳 팽택 현령으로 온 이래 팽택의 술 문화가 한층 고조되었으며 그에 따라 양조 기술도 더욱 발전된 것으로 돼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가난했던 도연명은 관직을 떠난 뒤에도 여느 농부와 다름없이 생활했다. 소동파는 도연명을 이처럼 말했다.

“나가서 벼슬하고 싶으면 벼슬했고, 또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뒀다. 그렇다고 스스로 고결하다고 하지도 않았다. 배가 고프면 남의 대문을 두드리고 살림이 넉넉해지면 닭이나 잡고 술을 빚어 손님을 청했을 뿐이었다.”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나오는 항아리 술과 오늘의 도령주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도연명은 1500년 세월을 훌쩍 뛰어넘으면서까지 이렇듯 제 고향의 술 산업 증진을 거들고 있는 것이다. 도연명과 똑같이 62세에 생을 거둔 이백이라고 해서 다를 바가 없다.  

이태 전, 중국 배갈의 주요 산지를 내 눈으로 직접 둘러보고 싶다는 마음에 스무 날 넘게 중국 대륙을 돌아다닌 일이 있다. 그리하여 난징(南京)에서 시작된 술 여행이 난징에서 마감하게 되었는데 쓰촨에서 난징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새삼 이백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시와 술로 생애를 거느린 이백이 마지막 숨을 거두는 자리가 바로 난징 근처임을 뒤늦게 생각해냈기 때문이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갑자기 난징에서 끝나는 나의 술 여행마저 꽤나 의미심장한 것이 되는 듯싶었다.

사실 그동안 나는 난징의 임의로움만 생각했다. 한 해 동안 이곳에서 체류한 인연 탓에 지리와 인사가 낯설지 않은데다 중국과 한국에서 내 수업을 받은 중국인 학생들이 벌써 졸업하고 돌아와 대부분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기에 언제든 그들을 만나 정회를 풀고 또 편리도 얻을 수 있다는 점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백이 바로 이곳에 누워 있다! 따져보면 술의 인생론적 의미를 그만큼 일찍 그리고 분명하게 고양시킨 이가 이 세상에 있을 것 같지 않다. 천년 세월을 넘어 인구에 회자되는 그의 대표적인 술 노래 ‘장진주(將進酒)’ 몇 구절만 봐도 이는 분명하다.

- 태백교자
- 태백교자

그대 보지 못하였는가? (君不見?)

황하의 물 하늘에서 내려와 (河之水天上來)

도도히 흘러 바다에 들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함을. (奔流到海不回)

그대 보지 못하였는가? (君不見?)

좋은 집에 살면서도 어김없이 봐야 하는 그 슬픈 백발을. (高堂明悲白髮)

아침에 푸른 실 같던 머리카락 저녁에 흰 눈이 되었네. (朝如絲暮成雪)

인생에서 뭘 얻으려거든 마냥 즐겨야 하리. (人生得意須盡歡)

그 좋은 술잔을 달빛 아래 놀려두지 말게. (莫使金樽空對月)

                                       

그러나 아직 이백의 최후에 대해서는 이설(異說)이 많으며 따라서 세간에 전해지는 무덤도 둘이나 있다. 하나는 안후이성(安徽省) 마안산시(馬鞍山市) 당투현(縣)의 청산(靑山) 기슭에 있는 본 무덤이며 또 다른 하나는 같은 마안산시의 채석산(彩石山) 중턱에 있는 의관총(衣冠塚)이다. 물론 이 의관총은 전설적인 요소를 상당히 품고 있음도 부인할 수 없다.

천하를 품겠다는 웅지 하나로 이백이 고향인 장강 상류에서 배를 띄운 것이 그의 나이 스물네 살 때였다. 도도히 흐르는 강물을 타고 대륙을 가로질러 떠내려오는 동안에도 세월은 빛살처럼 흘렀으며 시와 술이 그의 길동무가 돼주었다. 승경 고적을 탐승하고 호걸준재들과 치국 경세를 논하는 자리에도 언제나 술과 노래가 있었다. 그 사이 아이를 낳으며 살림을 꾸린 바도 있고 황궁에 들어가 금옷을 입는 영예도 누렸다. 그러나 세상은 언제나 고루하고 남루하여 오래 발 디디고 머물 데가 없었다. 어느덧 마음이 지치고 몸이 쇠잔해졌을 무렵 돌아와 쉴 곳은 장강뿐이었다. 금릉(남경)과 양주(揚州)를 오가고 구강(九江)을 거슬러 오르는 만년에도 작은 배에는 언제나 술 항아리가 실려 있었으며 밝은 달이 동무 되어 따랐다. 그리고 최후로 병든 몸을 누인 곳이 강가 마을 당도()였다.   

내가 난징에 도착했을 때 방학이라서 집에 다니러 와 있던 중국인 학생들이 나를 맞아주었다. 내가 그들에게 마안산으로 갈 계획을 말했는데 행운은 그치지 않았다. 그중 한 학생의 집이 바로 마안산시에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날 마안산으로 직행했다. 난징에서 마안산까지는 차편으로 한 시간이면 충분했으며 채석산은 시내에서 10여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한겨울인데도 날씨는 온화했고 짙푸른 가로수들이 한적한 포도를 덮고 있어서 이방인으로 하여금 계절을 잊게 하였다.

- 이백의 묘소 입구. 멀리 청산이 보인다.

이백의 전설을 간직한 ‘채석산’

취나산(翠螺山)이 본 이름인 채석산은 해발 131미터밖에 되지 않지만 평야에 돌올한 탓에 큰 산 높은 봉우리와 같은 기품을 지닌다. 산꼭대기에는 날아갈 듯한 전각이 창공을 올려다보고 있다. 인적 드문 이백 기념관을 둘러본 뒤 강가 깎아지른 바위벽 틈새 길로 들어섰다. 은피리 떼 같은 햇살을 튕기는 장강의 수면을 이렇게 가까이서 만난 적이 없는 나로서는 그 드넓고 유유함에 그리고 이 강에 실린 시간과 인걸의 숨결 때문에 절로 가슴이 벅찼다.

이곳은 곧 진시황이 회계(會稽) 땅을 순시할 때 배를 탄 곳이며 강 건너의 화주(和州) 오강(烏江)은 역발산기개세의 항우가 패전 후 목숨을 끊은 바로 그곳이었다. 목숨을 끊기 전 항우는 전장에서 타고 다니던 오추마(烏馬)만큼은 강 너머로 가게 했다던가. 그러나 강을 건너온 말은 뒤늦게 주인의 죽음을 알고 땅을 구르다가 숨졌으며 그때 떨어진 말안장이 산이 됐는데 마안산이란 지명은 여기서 유래되었다고 전한다.

서기 725년 늦은 봄 악양루에 올랐던 이백은 이어 구강의 여산에서 ‘비류직하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을 읊은 뒤 3일을 쉬지 않고 배를 타고 내려 이곳에 이르렀다. 그로부터 서른일곱 해를 지나 예순을 넘긴 이백이 다시 이곳 당도를 찾았다. 마안산에서 당도까지는 뱃길 50리. 심신이 쇠약해지고 오갈 데 없는 그를 당시 당도 현령으로 있던 이양빙(李陽氷)이 불러주었기 때문이다. 그 전에도 몇 년간 가까운 선성(宣城)에 머문 적이 있었지만 그때와는 처지가 달랐다. 깊어가는 병세 때문이었다. 며칠간 운신을 못 하다가도 어느 때 말짱하기도 했지만 털고 일어날 병이 아님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어느 날, 이백이 이양빙을 불러 자기의 시문들을 수습해달라는 부탁을 했으며 며칠 뒤 그의 종적이 사라졌다. 뒤늦게 한 뱃사공이 이양빙을 찾아와 간밤 자신이 이백을 모셨다고 말했다. 헝클어진 머리칼에 초췌한 얼굴이었지만 배를 타고선 예전처럼 술을 마셨다고 전했다. 교교한 달빛을 받으며 채석의 바위 절벽을 지날 무렵 사공이 잠깐 눈을 붙였는데 깨고 나니 이백은 온데간데없고 시를 적은 종이 한 장이 남아 있었다고 했다. 그 시가 곧 ‘임종가(臨終歌)’였다.

이백이 평소 달을 잡으려 했다는 촉월대(促月臺) 큰 바위를 지나 계속 산을 오르면 곧 아담한 봉분 하나를 만난다. 당시 강가에서 발견한 이백의 옷과 모자를 묻었다는 의관총이었다. 헐벗은 나뭇가지 사이로 장강의 물결이 내려다보이고 햇살이 환하게 내려앉는 좋은 자리였다. 무덤 옆의 댓닢들이 바람 따라 찰랑찰랑 소리를 내던 기억도 아직 선명하다.

- 채석산의 이백 의관총.

이백의 무덤 그리고 ‘태백주’

지난 달(2월20일) 나는 이태 만에 다시 마안산을 찾았다. 전에 못 가본 당투의 이백 무덤을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마안산시의 번화가를 벗어나면 곧바로 시골길로 접어드는데 거리는 멀지 않지만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무덤까지 가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우리네 면소재지와 흡사한 당투의 거리 간판에서 쉽게 눈에 뜨이는 것은 이백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른 이백의 무덤. 입구를 들어서면 잘 정비된 정원이 나타나고 그 너머에 사당 건물이 있다. 작지도 크지도 않은 봉분은 사당 뒤편에 있는데 긴 담이 묘원을 둘러싸고 있다. 이백의 시에도 자주 나오는 청산이 저 멀리서 한 위대한 시인의 영원한 안택(安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봉분 앞에 서는 순간, 나는 두 개의 이백 무덤이 시와 산문으로 나뉨을 확연히 깨닫게 된다. 병석에서 마지막 숨을 놓은 시인의 육신이 묻힌 이곳이 산문이라면 육신은 사라지고 그 껍데기가 묻힌 의관총은 시가 되는 것이다. 둘레의 산수도 그렇게 분명한 차이를 가진다.

무덤에서 돌아오는 길, 학부형이 미리 잡아놓은 농가 식당에서 때늦은 점심식사를 했다. 술은 뭘로? 학부형이 진열장을 가리켰는데 나는 망설이지 않고 ‘태백교자(太白嬌子)’를 택했다. 가격과 맛을 따질 일이 아니었다. 이백이 죽기 전 벌써 이곳에서는 ‘태백주(太白酒)’라는 술이 팔리고 있었다는 기록을 본 적이 있기에 혹여 이 술이 그 맥을 잇고 있지나 않을까 여긴 것뿐이다. 병당 우리 돈 3000~4000원에 지나지 않는 저가의 배갈인데 첫맛이 상당히 거칠지만 뒷맛이 개운한 술이었다.     

중국에는 ‘이백’의 이름을 붙인 배갈을 생산하는 회사만도 10여개가 있다. 그중에서도 이곳 마안산시 태백주창(太白酒廠)은 아주 작은 술 회사에 지나지 않는다. ‘정성태백(鼎盛太白, 바야흐로 태백의 시대란 뜻)’과 ‘태백교자(太白嬌子)’ 두 계열의 배갈을 시장에 내놓고 있는데 특히 마안산 시민들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해마다 이곳에서는 ‘태백하화절(太白荷花節, 하화는 꽃송이란 뜻)’ ‘이백시가절(李白詩歌節)’ 같은 축제가 열리는데 이 술이 축제의 공식 술이 되고 있다.

 

* 필자 최학 교수는...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고, 1979년 한국일보 장편소설 공모에 역사소설 <서북풍>이 당선되면서 큰 주목을 받은 중견 소설가다. 대표작으로 <서북풍>, <미륵을 기다리며>, <화담명월> 등이 있으며, <배갈을 알아야 중국이 보인다>, <니하오 난징> 등 중국 관련 저서도 있다. 현재 우송대 한국어학과 교수로 많은 중국인 학생들을 가르치며 한·중 양국간 교류에 일조하고 있다. 네이버에 ‘배갈, 白酒의 향과 맛을 찾아 (http://blog.naver.com/jegang5)’라는 블로그를 운영하며 배갈 대중화 작업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