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히카세이(旭化成)는 종합화학회사다. 섬유로 출발했지만 지금은 특화된 중견기업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2차전지용 멤브레인은 세계시장 점유율 1위다. 주택부터 전자부품·의류·기저귀 등 사업영역이 광범위하다. 주택과 사람에 관련된 사업모델이면 주저하지 않는다. 회사 유명세는 직원을 떠받치는 마음 씀씀이가 알려지면서부터다. 직원이 고객보다 늘 먼저다. 경영철학을 두고 <프레지던트 로이터>는 “회사는 종업원의 것”으로 규정했다(2010년 3월9일). 직원들의 천국 ‘아사히카세이’에 대해 알아봤다.

    

 “회장 이름 부르고 선배 의견에 반대”…

   

 ‘종업원 주권주의’로 위기 기회로 만들어

- 2007년 중국에서 바닷물 수처리 기술을 설명하는 히로타 시로 아사히카세이 전 사장(왼쪽).
- 2007년 중국에서 바닷물 수처리 기술을 설명하는 히로타 시로 아사히카세이 전 사장(왼쪽).



아사히카세이의 원만한 노사관계와 협조시스템은 일본 최고 수준이다. 회사는 임직원을 최대한 배려하고 근로자는 회사에 최선을 다하는 상생구조를 완성했다. 노사의 신뢰관계는 상상을 초월한다. “누가 상사이고 부하인지 알 수 없는 분위기”다. 근로자를 가족처럼 여기니 회사·가정의 가치충돌은 별로 없다. 2008년 남성의 육아휴가 취득촉진 프로젝트로 ‘제2회 워크라이프밸런스대상’에서 우수상까지 받았다. 남직원 육아휴가도 당연하다. 자녀양육시스템이 잘 갖춰졌을 때 받는 후생성 마크(크루민)를 받은 자회사만 8개사다.

아이디어와 자기PR로 직원 선발

실제 회사는 자유로운 사풍에 힘입어 개개인의 개성을 중시한다. 대신 형식주의는 타파한다. 입사시험조차 형식파괴다. 선정관문은 면접뿐이다. 서류전형·필기시험은 없다. 백지서류에 자유롭게 아이디어와 자기PR을 적도록 해 뽑는다. 기준이 있다면 벤처정신, 성실한 자세, 다양성 존중이 전부다. 또 생활환경과 밀접한 사업을 펼치기에 여직원 채용에 적극적이다. 취업시장에서의 이미지는 대체로 ‘도전적’이다. ‘발명자=제안자=개척자’ 이미지가 많다. “못할 게 없다”는 비전과 호기심이 강조된다. 회사의 PR포인트도 여기에 맞춰진다. 변화무쌍하고 폭넓은 사업구조를 지녔으면서 최고기술인 이유로 자유롭고 활발한 조직문화가 첫손에 꼽힌다. 즉 도전정신이야말로 오늘의 회사를 키운 핵심엔진이다. 그래서 핵심엔진을 회사가 아끼는 건 당연하다.

아사히카세이는 신자유주의적인 고용철학 대신 전통적인 고비용 노동모델을 끝까지 지켰다. 최대한 고용을 유지하면서 다른 방법으로 생존·발전전략을 모색했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다. 직원주권의 토대에서 대개혁을 단행해 강골체질로의 변신에 연거푸 성공했다. 더욱이 그 개혁카드란 게 경영위기 때 직원의 반발을 사기 쉬운 지주회사란 점에서 더더욱 주목된다. 다만 원래는 노사협력과 거리가 멀었다. 국가총동원령이 지배하던 1930년대 전쟁시절 창업회사답게 상명하복·회사충성의 기업문화가 지배적이었다. 1948년에는 엄청난 노동쟁의를 경험했다. 노사협력체제는 이때의 갈등경험이 안겨준 생생한 교훈이다. 동시에 이후 불황을 슬기롭게 극복하는 원동력이 됐다. 공멸갈등 대신 상생협력의 선택경험이다. 회사란 주주가 아닌 경영진을 포함한 종업원의 것이라는 발상이 자연스레 정착된 배경이다. 지금은 ‘종업원 주권주의’가 기업문화로 안착했다.

회사는 2003년 조직개혁을 단행했다. 분사·지주회사체제로의 이행이다. 지주회사는 기업합병의 연착륙 수단으로 자주 사용되지만 이 회사는 지주회사 산하에 중핵사업부문을 분사시켜 자주자립 및 스피드경영을 모색했다. 경쟁격화 속 고용안정을 필두로 하는 그룹자원의 최적배분전략(구심력과 원심력의 균형경형)은 독자적으로 만들어냈다. 아울러 회사는 원활한 제도운영을 위해 임직원의 의식개혁에 착수했다. 회사가 제안한 제도에 근로자의 동의와 혼을 불어넣기 위해서다. 먼저 ‘그룹인재이념’을 침투시켰다. △도전과 변화 △책임감과 성실한 행동 △다양성 존중 등이 그렇다. 물론 새롭지는 않다. 도전만 해도 회사의 오래된 성공 DNA 중 하나다. 불황일 때 석유화학·주택사업 등 신규분야에 도전해 성공시킨 경험이 있다. 

- 아사히카세이 주력 업종인 주택개발 사업(위)과 화학공장.
- 아사히카세이 주력 업종인 주택개발 사업(위)과 화학공장.

명절 때 선물 주고받는 관행 없애

이 밖에도 경직된 상하관계를 부추기는 관행은 대부분 폐지됐다. 명절 때 선물을 주고받는 일본의 전통관행조차 없애버렸다. 아랫사람이 부담을 느낄 수 있어서다. 이사 등 고위직 자제를 채용하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독특한 건 ‘선배의 말에 반대하라’는 사풍이다. 대놓고 반대한 뒤 이유는 다음에 생각하라는 식이다. 정말 옳은지 천천히 생각하고 의견을 내놓는 게 낫다고 봐서다. 덕분에 까칠한 후배를 좋아하는 선배도 많다. 단순한 평등의식이 아니라 인재를 기르는 기본자세와 맞물린 상징사례다. 

개별사원 존중이라는 CSR보고서 타이틀처럼 존중의식은 광범위하게 적용된다. 즉 모든 사원의 성별·국적·연령 등 이유 없는 차별에 반대다. 덕분에 여성근로자 채용비율은 급증했다. 1993년부터 사내에 여성채용 전담부서(EO추진실)를 설치·운영했다. 1993년 5명에 불과하던 여성관리직(직책자)은 2010년 281명으로 불었다. 특히 장애인 고용촉진과 정년퇴직자 재고용에 열심이다. 장애근로자 고용비율은 2010년 현재 1.97%(430명)로 법정비율(1.8%)을 16년째 넘기고 있다. 1985년 장애인 고용을 위한 특례자회사(아사히카세이어빌리티)까지 설립했다.

WLB(Work Life Balance)의 일과 가정의 양립조화는 직원존중을 위한 주요 지향점 중 하나다. 출발은 기존 관행의 개선이다. 즉 잔업을 줄이는 대신 유급휴가는 최대한 쓸 것을 강조한다. 돌아가는 듯해도 생산성을 높이는 묘책이란 걸 경험으로 깨달았다. 2010년 시간단위 연휴(年休)제도를 도입해 휴가취득의 유연성까지 더했다. 양립조화의 지원방향은 개별직원의 맞춤형 근로선택이 핵심이다. 육아·간병제도가 대표적이다. 제도안착을 위해 키를 쥔 상사의 인식개혁도 중시한다. 덕분에 육아휴가는 증가세다. 2009년 407명이 육아휴가를 갔는데 여성(157명)보다 남성(250명)이 더 많았다. 자녀가 탄생한 남성근로자의 40%에 해당한다. 육아휴가는 자녀가 3세 때까지 허용된다. 이를 계기로 회사는 남성의 육아참가를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회사로 유명세를 떨쳤다. 그룹의 육아휴가제도는 1974년 도입됐는데 이는 유례없는 선구적 조치로 평가된다.

한계도 넘었다. 아무래도 남직원의 육아휴가는 불문율에 가까울 정도로 어려운 문제다. 이 회사도 초기엔 그랬다. 회사는 2005년 젊은 남자직원 8명을 모아 ‘뉴 파파(New Papa) 프로젝트’를 통해 해답을 모색했다. 이유는 △대부분 배우자가 전업주부로 불필요 △무급에 따른 장기적 생계지장 △주변의 특별인식 등으로 요약됐다. 게다가 신청 때의 상사를 비롯한 심리적 부담과 승진에의 악영향 등도 거론됐다. 원인을 알았으니 보다 적극적인 육아휴가 지원방침은 당연지사였다. 그 결과 2006년 노사 양자는 육아휴가 개정을 실시했다. 개정요점은 4가지다. △육아휴가의 유급화(5일) △배우자 조건의 철폐(전업주부라도 신청가능) △휴가의 복수취득 가능 △상사에게 구두신청으로 취득 가능(단기) 등이다. 대부분이 취득과정의 간소화다. “누구든 쓰도록 요건을 완화해 심리적 허들을 낮췄다”고 회사는 설명한다. 이후 남직원의 육아휴가도 당연하다는 사풍이 형성됐다. 육아를 위한 단시간 근무제도도 채택됐다. 초등학교 취학까지 단축근무가 가능한데 1일 최고 2시간을 줄일 수 있다. 이에 더해 2007년에는 ‘키즈서포트’ 단시간 근무제를 도입했다. 초등 3학년까지의 단축근무 연장이다. 그룹사 중 이미 탄력근무제가 도입 중인 경우엔 병행해 이용하기 쉽도록 했다. 가족환자를 돌보는 간병지원은 통산 1년의 휴가가 가능하다. 2010년부터는 직장과 간병을 위한 유연한 근로환경 제공에도 착수했다.

- 아사히카세이 회의 모습(왼쪽)과 후지와라 다케스쿠 사장.
- 아사히카세이 회의 모습(왼쪽)과 후지와라 다케스쿠 사장.

사업 다각화로 위기 정면 돌파

아사히카세이는 ‘변신의 귀재’다. 시대 흐름에 맞춰 주력사업을 그때그때 바꿔 새로운 성장루트를 찾는다. 신사업이 등장하는 시간간격은 거의 15년 주기로 짧다. 예를 들어 1970년 70%의 비중을 차지하던 섬유(주력제품)는 현재 7%까지 축소됐다. 대신 석유화학, 주택, 정보전자, 의약 등 신규분야에 착실히 진출했다. 다각화 채택은 1960년대부터로 현재는 4개의 주력분야를 완성했다. 화학·섬유, 주택·건재, 일렉트로닉스, 의약·의료 등이다. 

실제 다각화 성공에는 임직원의 역할이 컸다. 회사 설명처럼 “잘 모르는 분야일수록 전력을 투입하는데, 특히 최우수인재를 해당분야에 배치하는 게 관건”이다. 최우수인재의 도전의욕과 진정성에 신규모델의 사활을 건 셈이다. 덕분에 현재 주력이 된 화학과 주택분야는 매출의 70%를 차지한다. 과거엔 생각지도 못한 영역이었다. 다각화의 일등공신은 미야자키 카가야키(宮崎輝) 전 회장이다. 오늘의 회사를 설계하고 일구는 데 지대한 기여를 했다. 사업다각화로 합섬메이커를 종합화학회사로 변신시킨 주인공도 바로 그다. 그의 ‘다보하제(검정망둥이)경영’이 과감한 다각화를 일궈냈다. 재임시절 “그가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는 회사”란 말이 있을 만큼 영향력과 존재감이 파워풀했다. 1934년 입사한 후 1961년 사장에 취임했는데 1985년부터 사망한 1992년까지 회장직을 유지했다. 그는 “장수기업의 양축은 성장모델과 인재경영에 있다”고 늘 강조했다.

 

  Tip. 아사히카세이 조직관리법 

자회사 권한 대폭 강화…인력은 계열사 간 수시 교류

회사의 핵심중핵은 섬유였다. 하지만 섬유부진 등 산업·환경변화에 대응하고자 다각화 카드를 선택했다. 섬유에서 화학·전자부품·의약의료·주택건설 등 영역을 대폭 확대했다. 변화에 앞서 신사업을 개척하려던 조치였지만, 한편에선 소속부문이 적자라도 기타사업에 의존해 보너스를 받는 등 부작용도 문제였다. 그룹 전체의 갈등 초래다. 각종 사업부문 대표를 포함한 30명의 이사진도 전문분야를 벗어나면 의논부족·결정난항 등의 문제가 발생했다. 그래서 사업회사로 독자적인 현금흐름을 중시하고 책임과 권한을 대폭 부여하도록 했다.

감독은 지주회사가 하되 집행은 사업회사에 위양해 신속한 의사결정을 기대했다. 또 사업회사 사원은 의존적 근무형태를 없애고자 지주회사에서의 일시 파견이 아닌 전원 전직형태로 소속을 변경했다. 분사가 만능은 아니다. 분사 후 인사전환에 곤란이 생기면 그룹 전체의 일체감은 훼손된다. 비판도 잇따랐다.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사업성장을 통해 경영독립성을 높일 필요가 있었다. 줄어든 구심력의 한계를 원심력으로 벌충하는 전략이다. 그룹으로서의 일체감을 유지하는 작업에도 착수했다. 원심력과 구심력의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서다. 지주회사는 그룹 전체 전략입안을 통해 경영자원을 사업회사에 최적분배하고 경영집행을 감독했다.

이는 지주회사의 자문기구인 경영전략회의가 맡았다. 개별 사업단위 능력을 초과하는 대형 안건을 협의·결정하기 위한 조직이다. 또 분기마다 1회씩 사업회사의 경영상황을 지주회사 사장이 확인하는 ‘사업인터뷰’를 실시했다.

이 정도로 구심력이 확보되긴 힘들다. 제일 중요한 인사문제가 빠졌다. 이에 지주회사는 사업부장 이상의 고위인사권을 확보했다. 인사고가는 사업회사가 하되 인사부장 평가는 사업회사 사장 이외에 지주회사 담당부장 등이 체크했다. 원심력을 가동시키면서 구심력을 확보하는 묘책이다. 구심력을 높이기 위해 그룹 인사부장들은 월 1~2회 만난다. 인사이동을 포함하는 ‘인사책임자회의’다. 별도로 그룹의 과장그룹 이상으로 구성되는 ‘그룹인사회의’도 있다. 인사부원 육성과 로테이션, 연수내용 등을 포함한 인재육성 체계검토 등을 실시할 때 과장직부터 포함시킴으로써 구심력을 높이기 위해서다.

이제 사업회사를 넘나드는 인사이동이 비일비재하다. 이는 인사 기본방침과도 맥이 닿는다. 회사의 인사목표는 인재육성과 적재적소다. 또 고용확보를 위한 회사이동도 명시했다. 사업 통폐합 등으로 잉여인력이 발생할 때를 대비한 안전장치다. 해고 대신 다른 사업회사로 이동시켜 고용을 확보한다. 사업폐지로 이동한 직원은 이미 발생했다. 이때의 이동은 법률상 퇴직이다. 즉 본인 동의가 필요한 전적(轉籍)이다. 하지만 단 한명도 이를 거부한 사례가 없다. 자발적인 이동까지 있다. 자발적인 경력형성 관점에서 본인 희망에 따라 이동하는 ‘공모인사제도’다. 현직에서 3년 이상 근무한 사원이 공모후보다. 각 사업회사는 연 4회 인재모집에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