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경제력을 앞세워 주변국과 영토분쟁을 일으키는 등 제국·패권주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노출하고 있다. 사진은 중국과 일본이 영토분쟁 중인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에서 중국 국기를 휘날리는 중국의 선박과 일본의 어선 모습.
중국은 경제력을 앞세워 주변국과 영토분쟁을 일으키는 등 제국·패권주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노출하고 있다. 사진은 중국과 일본이 영토분쟁 중인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에서 중국 국기를 휘날리는 중국의 선박과 일본의 어선 모습.

중국 경제에 관해 가장 활발하게 저술 활동을 하는 미국의 경제학자 배리 노튼(Barry Nau-ghton)이 쓴 ‘중국 경제 : 변화와 성장(The Chinese Economy : Transitions and Growth)’에 보면, 1820년대 청(淸)나라의 국내총생산(GDP)이 당시 전 세계 GDP의 3분의 1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추정치가 나온다. 당시 청의 인구는 전 세계 인구의 36%였다고 한다.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는 960만㎢로 한반도 면적의 44배, 남한 면적의 96배에 가깝다. 육지 면적만 그렇고, 중국의 해양 영토 면적은 299만7000㎢로 남한의 해양 영토 면적 44만㎢의 6.8배에 이른다.

보시라이 사건을 놓고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 겸 당 총서기와 원자바오(溫家寶) 총리가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 겸 당 총서기 세력과 충돌하고 있다느니, 사회 치안과 국내 사찰을 총괄하는 저우융캉(周永康) 정치국 상무위원의 목이 날아갈 것이라느니, 뿐만 아니라 인민해방군 내에도 보시라이 사건을 둘러싼 내부조사가 진행 중이라는 소문도 있고, 오는 10월에 이루어질 시진핑(習近平) 국가부주석과 리커창(李克强) 상무 부총리 체제로의 권력교체에도 보시라이 사건이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등 중국 권력 깊숙한 곳에서 마치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듯 각종 루머가 난무하고 있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바다에 대해 중요성을 두지 않았다. 이 세계는 9개의 주(州)로 이뤄진 ‘천하(天下)’와 동서남북 네 방향 외곽의 ‘사해(四海)’로 이뤄져 있다고 생각해왔다. 사해에는 이(夷), 융(戎), 만(蠻), 적(狄) 네 종류의 비문명적 종족들이 산다고 생각한 것이 세계관이었다. 자신들은 천하의 중심에 살고, 외곽의 사해에는 자신들이 돌봐줘야 할 야만인들이 산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중국인들의 그런 생각은 진(秦)에서 청(淸)에 이르는 2300년 정도 계속된 왕조를 통해 이어져 왔다.

청(淸), 아편전쟁 후 초라하게 몰락

그런 생각이 무너진 것은 1840년부터 시작된 두 차례의 아편전쟁 때문이었다. 산업혁명을 통해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갖게 된 영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이 역사상 처음으로 증기기관을 장착한 군함을 타고 인도양을 건너 중국 남부 광둥(廣東)성에 상륙하는가 했더니, 아편을 중국에 수출하고 당시 은본위제였던 청의 국고를 이루는 은을 영국으로 반출해가기 시작했다. 아편전쟁은 그렇게 해서 발발했으나, 결과는 두 차례의 전투 끝에 청은 홍콩을 영국에 할양해주어야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제대로 된 현대적인 군사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던 청이라는 GDP 대국, 인구 대국은 그렇게 해서 국제사회 앞에 ‘동아시아의 병부(病夫)’라는 초라한 실상을 보여주기에 이르렀다.

지난해 6월 베트남 하노이 시내에서 ‘시사군도·남사군도는 베트남의 것’이라고 적은 현수막과 베트남 국기를 치켜든 시위대가 반중(反中) 구호를 외치고 있다.
지난해 6월 베트남 하노이 시내에서 ‘시사군도·남사군도는 베트남의 것’이라고 적은 현수막과 베트남 국기를 치켜든 시위대가 반중(反中) 구호를 외치고 있다.

1876년 청의 동치제(同治帝)는 또 한 차례의 굴욕을 겪어야 했다. 그때까지 청대 이전에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주변국에서 온 사신들이나, 청대 이후 유럽에서 온 외교관들이 청 황제를 알현하려면 ‘삼궤구고(三     九叩)’라는 예의를 갖추어야 했다. 황제 앞에서 한 번 무릎을 꿇을 때마다 세 차례 이마를 땅에 조아리는 행동을 세 번 해서 모두 아홉 차례 이마를 바닥에 두드린 다음에야 황제에게 편지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편전쟁을 통해 청의 실력이 드러나자 유럽 외교관들은 이 삼궤구고를 갖추기를 거부했고, 마침내 동치제는 허리만 살짝 황제를 향해 구부리는 ‘국궁(鞠躬)’만 하도록 굴욕의 양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한 마오쩌둥(毛澤東)이 이끄는 중국공산당은 그런 청 이전의 중국을 ‘구(舊) 중국’이라는 이름으로 정리했다. 그리고 1949년 10월1일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수립을 선포하면서 이 중국이 ‘신(新) 중국’이라고 명명했으며, “이제 우리 인민들이 일어섰다”고 선언했다.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들의 중국 침공을 “제국(帝國)주의, 패권(覇權)주의”로 정의했고, 그런 유럽 제국의 패권주의를 미국과 일본도 배워서 중국을 침공했다고 비난했다.

1949년부터 76년까지 27년간 중국을 통치한 마오쩌둥의 세계전략은 ‘초영간미(超英     美)’라는 전략이었다. 언제든 영국을 넘어서고, 미국과 한판 붙는다는 개념이었다. 마오는 자신의 그런 생각을 너무 성급하게 달성하기 위해 1960년대 초에 ‘대약진(大躍進) 운동’이라는 쾌속 경제발전 캠페인을 펼쳤다. 조기에 강철 생산량이 영국의 생산량을 넘어서게 하겠다면서 시골 마을마다 용광로를 설치하게 해서 강철 생산을 독려했으나, 코크스가 아닌 산의 나무를 베어 만든 목탄으로 강철을 생산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무리수였다. 결국 중국의 산들에서는 수많은 삼림이 사라졌고, 인민들은 솥뚜껑이나 수저를 뭉쳐 녹여서 당국에 바치는 웃지 못할 비극이 중국 전역에서 벌어졌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다’는 정신에 따라 조직된 중국 전역의 인민공사(人民公社)에서는 생산량의 급감으로 2000만명이 넘는 아사자가 발생했다.

1978년 개혁개방을 시작한 덩샤오핑(鄧小平)은 우선 ‘초영간미’라는 마오의 세계전략부터 폐기했다. 영국, 미국과 언제든 한판 붙는다는 전략을 ‘화평발전(Peaceful Development)’이라는 현실적인 전략으로 전환했다. 인민해방군의 숫자를 대폭 줄이고 군사비를 경제건설에 투입하기 시작했으며, 자신은 미국과 유럽의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해 신간센(新幹線)을 타는 모습을 전 세계에 보여주는가 하면, 미국을 방문해 미 서부의 카우보이들이 쓰는 챙 넓은 모자를 쓰고 웃는 모습을 미국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1980년대부터 시작된 중국의 경제발전은 그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었고, 덩샤오핑은 중국 인민들에게 ‘하나의 중심, 두 개의 기본점’이라는 말로 인민들에게 명확한 목표를 제시했다. ‘하나의 중심’이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경제발전’이라는 것이었고, 마오쩌둥 사상이라든지, 마르크스레닌주의라든지 사회주의 원칙 같은 것은 경제발전 다음으로 고려해야 할 사항이라고 정리해주었다. 지난 34년간 이뤄진 중국의 빠른 경제발전은 덩샤오핑이 제시한 그런 전략구상에 따라 이뤄진 것이었다.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가운데)은 덩샤오핑이 제시한 세계전략인 ‘화평발전’을 ‘화평굴기’로 바꾸었다. 왼쪽은 자칭린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 오른쪽은 원자바오 총리.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가운데)은 덩샤오핑이 제시한 세계전략인 ‘화평발전’을 ‘화평굴기’로 바꾸었다. 왼쪽은 자칭린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 오른쪽은 원자바오 총리.

덩샤오핑은 2020년까지는 중국이 오로지 경제발전에 매진해 중산층이 많아지는 소강(小康)사회를 이룰 것을 주문하고 1997년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5년, 2002년에 당총서기에 오른 후진타오(胡錦濤) 현 국가주석은 자신을 후계자로 일찌감치 지목한 덩샤오핑이 제시한 세계전략인 ‘화평발전’을 ‘화평굴기(和平起 : Peaceful Rise)’로 슬쩍 바꾸었다. 미국과 유럽이 중국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기 시작한 것은 바로 ‘화평발전’이란 중국의 국가전략이 어느새 ‘화평굴기’라는 말로 바뀌면서부터 본격화됐다. 그러더니 어느새 남사군도(남중국해 남단의 작은 섬들과 암초 및 산호초로 이루어진 군도)에서 해저 천연가스 등 자원을 놓고 필리핀, 베트남, 말레이시아, 타이완 등과 티격태격 영토분쟁을 벌이는가 하면, 동중국해에서는 댜오위다오(釣魚島)를 놓고 일본과, 해저 암초인 이어도를 놓고 한국 경제수역에 감시선을 파견하는 등 제국주의적이며 패권을 추구하는 행동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7월 관영 신화통신을 통해 ‘미래 10년 중국의 신 주변국 전략’이라는 것을 발표하면서 “인근 해역에서의 주변국과의 영해분쟁은 대화를 통해 해결한다”는 원칙을 제시하는가 싶더니, 최근 필리핀과의 황옌다오(黃岩島·스카보로우 아일랜드) 분쟁 과정에서 인민일보, 환구시보, 해방군보를 비롯한 중국 관영매체들은 “전쟁을 불사하라”는 촉구를 군부에 보내는 거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978년 개혁과 개방을 시작한지 불과 34년, 중국의 GDP가 전 세계 GDP의 8% 남짓한 상황에서 중국은 얼마 되지 않은 과거를 까맣게 잊은 듯 제국주의적이고 패권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주변국들의 비난을 받고 있다. 과거 1820년대 청이 보유한 국부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경제력을 쌓고는 벌써 자만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