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을 휘날리며 지성인 풍모를 풀풀 풍기는 명문가 출신의 엘리트관료, 아니면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며 프랑스사회를 파도처럼 몰아치는 박력의 사나이. 프랑스는 이 대조적인 인물 가운데 어떤 리더십을 선택할까.

 최근 프랑스에서는 시라크 대통령 이후 즉, ‘포스트 시라크’ 시대를 누가 이끌어 갈 것인가를 놓고 여권의 두 인물이 접전을 벌이고 있다.

 한 사람은 자크 시라크 대통령의 강력한 라이벌 정치인인 니콜라 사르코지 집권여당 UMP(대중운동연합)의 총재 겸 내무장관이고, 또 한 사람은 시라크의 양아들로 불릴 만큼 충성파인 도미니크 드 빌팽 총리다.

 유럽에서 독일과 프랑스는 대표적인 ‘유럽병’ 환자로 분류한다. 프랑스의 경우 만성적인 고(高)실업과 저(低)성장으로 ‘추락하는 프랑스’라는 위기론도 팽배하다. 지난 5월29일 유럽연합(EU) 창설국이자 주도국인 프랑스가 유럽헌법을 거부한 것도 이런 불안감과 정부에 대한 불만이 한꺼번에 표출된 것이다.

 프랑스 경제가 별로 나아질 조짐을 보이지 않자 ‘포스트 시라크’ 시대의 두 경쟁자인 사르코지 총재와 빌팽 총리가 프랑스 경제의 처방전을 놓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정책구상을 발표하면서 맞서고 있다. 최근 두 사람은 일주일 간격으로 각각 다른 경제·사회 처방을 내놓았다.

 빌팽 총리는 기존에 프랑스가 가져온 경제·사회모델을 계속 유지시키는 틀 안에서 성장에 불을 지피겠다는 경제비전을 갖고 있다. 빌팽의 프랑스 발전모델은 ‘모든 이들을 위한 사회복지적 경제성장’. 빌팽 총리는 “사회복지적 경제성장이라고 이름붙인 정책을 통해 사회구성원 모두가 혜택을 공유하도록 하겠다”는 포부다.

 구체적인 경제정책도 그동안 추진해 온 개혁의 궤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우선 중산층을 주대상으로 2006년에 소득세를 낮추겠다는 정책을 발표했다. 7단계로 나눠진 세무제도를 4단계로 단순화하겠다는 생각도 갖고 있다. 실업자들을 일하게 만들려는 복안으로 일해서 번 돈이 실업수당보다 훨씬 많게 한 방안을 내놓았는데, 고용수당을 매달 월급에 보충 지급하는 방안이 그것이다. 복지제도를 남용해 놀고먹는 실업자들은 강력히 단속할 방침이다.

 빌팽 총리는 또 과도한 공공부문을 개혁하기 위해 2006년으로 예정된 퇴직공무원 5000명의 자리를 대체하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 이상의 공무원 감축계획은 내놓지 않았다.

 프랑스의 짧은 근로시간에 대해서도 빌팽 총리는 “올해 국회에서 통과된 ‘주 35시간 근무제 완화 조치’만으로도 이미 일하고 싶은 사람은 더 일할 수 있게 됐다”면서 제도에 더 이상 손댈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매년 물가는 오르고, 임금은 그만큼 오르지 않아 사람들의 구매력이 줄어드는 것에 대해서는 2005년 말부터 최고 1000유로까지의 보너스에 세금을 매기지 않겠다는 대책을 내놓았다.

 빌팽 총리에 비하면 사르코지 총재의 경제비전은 훨씬 더 과감하고 시장 지향적이다. 사르코지 총재는 “프랑스에 결핍된 것은 프로젝트”라면서 전 방위로 자유주의 개혁을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선언했다.

 빌팽 총리보다 훨씬 더 큰 폭으로 세금을 내리겠다는 구상이다. 월급에서 의무적으로 떼어가는 공제금을 5년에 걸쳐 대폭 줄임으로써 “프랑스 국민들 중 그 누구도 자신의 노동으로 번 수입의 50% 이상을 세금으로 내놓지 않게 하겠다”고 제안했다.

 현재 10%에 달하는 프랑스 실업률을 10년 내로 완전고용 상태인 5% 미만으로 끌어내리려면 현행 계약직과 영구직으로 이분화된 고용계약 제도를 단일화된 신규 고용계약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아이디어도 갖고 있다.

 공공부문을 축소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퇴직공무원 2명 중 1명의 자리를 다시 충원하지 말자는 과감한 주장도 펴고 있다. 사르코지 총재의 생각을 따르면, 2005년에만도 최소한 3만5000명의 공무원이 퇴직하고 그 자리 수만큼 사람이 줄어든다. 대신 공무원 대우는 높여 주겠다는 구상이다.

 주 35시간 근무제와 관련해서도 사르코지 총재는 올 들어 취한 완화조치 이외에 더 강력한 인센티브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가령 추가 근무시간에 대해 사회보장 부담금을 더 줄여 주어 근로자들이 일할 맛나게 만들어 줘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처럼 상이한 경제정책 구상을 놓고 프랑스 언론들은, 두 사람이 2007년 대선을 염두에 두고 프랑스에 각기 다른 비전을 제시한 것으로 해석한다.

 빌팽 총리와 사르코지 총재는 나이는 비슷하지만 경력은 매우 대조적이다. 

 헝가리 이민자의 아들로 1955년에 태어난 사르코지 총재는, 변호사 출신의 민선 정치인이다. 28세에 파리 인근의 부자동네인 뇌이쉬르센 시장을 지냈고, 38세에 예산장관으로 발탁됐다. 2002년 시라크 대통령이 재선된 이후 내무부·재경부 장관 등을 역임했다.

 1953년생인 빌팽 총리는 명문가 출신으로, 국립행정학교(ENA)를 졸업하고 정통 엘리트관료의 길을 걸어왔다. 외교관 생활을 거쳐 1995년 시라크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대통령궁인 엘리제궁의 비서실장을 지냈고, 시라크가 재선된 이후 외무부·내무부 장관을 거쳤다.

 두 사람은 정치 지평에서도 점점 라이벌이 돼 가고 있다. 시라크 대통령이 입원한 직후 사르코지 총재와 빌팽 총리가 보여준 행보는 정반대였다.

 사르코지 총재는 대통령이 병원에 입원한 다음날인 9월3일, 프랑스 서부 라볼에서 열린  UMP당대회에 참석했다. 3000명의 젊은 당원이 모인 자리에서 사르코지 총재는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시라크 시대를 포함해 지난 30년간의 정책과 단절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겠다”며 대권 야심을 드러냈다.

 반면 빌팽 총리는 거꾸로 라볼의 당대회 참석 일정을 취소하고 시라크 대통령의 병실로 달려갔다. 시라크 대통령과 국정현안을 논의하고, 대통령의 건강상태를 기자들에게 설명했다. 시라크 대통령의 양아들로 불릴 만큼 신임을 받는 빌팽 총리는 자신의 독자적 대권 야심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는 프랑스의 유럽헌법 거부 이후, 국민들의 가장 큰 불만사항인 높은 실업률을 해결하기 위해 전격 발탁된 구원투수. 취임 당시 “100일 안에 프랑스에 자신감을 회복시키겠다”고 약속하면서 실업해소 등 갖가지 경제대책을 주도해 왔다.

 그 과정에서 이제까지 보여온 ‘귀족정치인’의 이미지를 일부 없애고 대중적 인지도를 넓혀 가고 있다. 일간지 <웨스트프랑스>는 “빌팽 총리가 외교관이나 왕자 같은 풍모인 데도 참모 티를 내는 걸 과감히 벗어나서 이제는 스스로 한 사람의 정치가란 사실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일간지 <알자스>는 “빌팽 총리는 100일 만에 프랑스의 자신감을 회복하겠다는 내기에는 졌어도 자신을 정계에 자리매김하는 데는 성공했다”고 진단했다.

 주간 <파리마치>에 보도된 이폽(Ifop)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빌팽 총리는 이전보다 지지율이 6%포인트 높아져 55%를 기록했다. 스스로는 대권에 도전하겠다고 의사표명을 하지 않지만, 여권 내에서는 시라크가 3선에 도전하지 않고 후계자를 낙점할 경우 빌팽을 선택할 것이라는 관측이 유력하다.

 반면 프랑스에서 시라크 대통령보다 더 인기 있는 정치인인 사르코지 총재는 그동안 사사건건 시라크 대통령에 맞서면서 화끈한 언행으로 대중적 인기를 몰아왔다.

 이 와중에 빌팽 총리는 상대적으로 차분하고 안정적인 스타일로 반사이득을 챙기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빌팽 총리가 사르코지 총재의 인기를 누르고 2007년 대선에 여권주자로 나설 수 있을 것인가에 아직 어느 누구도 확신하지 못한다. AFP통신에 따르면, 프랑스 역사상  현직총리가 곧바로 대권에 도전해 당선된 적은 없었다고 한다. 총리는 뚜렷한 정책적 성과를 내지 못했을 때 곧바로 원망이 쏟아지고 대중들로부터 외면 받는 어려운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엘리트관료 말고 ‘정치인’ 빌팽의 진로는 아직도 장대 끝에 앉은 것처럼 불안정하다.

강경희 조선일보 파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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