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명주 6종 생산되는 술의 본고장



청년 이백과 말년 두보의 생애도 교차

(청두의 두보초당(위). 이백이 달을 잡으려 했다는 채석산의 촉월대(원안). 장강이 내려다 보인다)

예로부터 쓰촨(四川省) 지역은 중국에서도 술 좋은 곳으로 소문이 났는데 현대라고 사정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비옥한 땅이 드넓게 펼쳐져 있어서 곡물이 풍부한 데다 여름에 무덥지 아니하고 겨울에 혹한이 없는 기후가 좋은 술을 빚어내는 근본 요인이 되고 있다. 오늘날 중국의 국가명주로 손꼽히는 17종의 배갈 가운데 6종의 배갈이 이곳에서 생산되고 있는 사정도 이러한 자연환경과 수천 년을 이어온 양조 역사를 바탕에 두고 있음은 물론이다.

쓰촨성의 성도(省都)인 청두(成都)를 대표하는 술은 ‘전흥대곡주(全興大曲酒, 현재는 ‘수정방’이 대표 브랜드임)’이며 이곳에서 북쪽으로 차로 한 시간쯤 걸리는 미옌주현(綿竹縣)에서는 국가명주 ‘검남춘(劍南春)’이 생산된다. 청두에서 남서쪽으로 4시간쯤 달리면 장강(長江, 양쯔강) 가의 술 도시 이빈(宜賓)에 닿게 되는데 이곳에는 중국 농향형(濃香型) 배갈을 대표하는 ‘우량예(五粮液)’의 생산기지가 있다. 또한 여기서 강을 따라 2시간여를 더 가면 중국 최고(最古) 발효지(醱酵池)의 술임을 자랑하는 ‘루저우라오자오(濾州老, 현재는 ‘國1573’이 대표 브랜드)’가 생산되는 루저우(濾州)를 만난다.

이곳의 강 건너편이 꾸린현(古藺縣)인데 여기서는 또 다른 국가명주 ‘낭주(郎酒)’가 빚어진다. 루저우에서 북쪽으로 훌쩍 거슬러 올라가면 사홍현(射洪縣)에 이르게 되는데 이곳의 국가명주는 ‘타패주(牌酒)’이다. 미옌주에서 사홍현까지의 여러 명주 생산지를 하나의 선으로 연결해 보면 거대한 U자가 그려짐을 볼 수 있는데 중국의 애주가들은 이를 옛 파촉(巴蜀)의 대지 위에 그려지는 ‘U자형 명주(名酒) 띠’라고 일컫는다.

U자형 명주 벨트 형성돼 있어

(우량예)



술이 시인을 부른 것일까, 시인이 술을 찾은 것일까? 이곳 쓰촨은 중국 문학사를 대표하는 시인 이백(李白)과 두보(杜甫)의 생애와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곳이다. 미옌주에서 차로 한 시간쯤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장요우시(江油市)에 다다르게 되는데 이곳이 바로 이백의 고향이다.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이백이 10년 넘게 이곳에 살았기 때문에 이론 없이 이백의 고향으로 부르고 있다.

이백이 태어난 곳은 현재의 키르기스스탄 공화국의 타커마커(托克馬克)시 부근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서 청두까지의 거리는 우리나라 서울에서 만주를 돌아 베이징, 시안을 거쳐 청두까지 가는 길보다 더 멀다. 무슨 곡절이 있어서 이백의 윗대 어른들은 그 먼 변방에 살았고 어떻게 다시 어린 이백을 데리고 이곳까지 왔는가?

전하길, 이백의 증조부 이정(李貞)이 측천무후(則天武后)에 반대하여 군사를 일으켰으나 실패, 자결했으며 그 아들을 비롯한 족인(族人) 600~700명은 현재의 내몽고 지역으로 추방되었다. 이후 이백의 조부는 지금의 키르기스스탄 지역으로 이주했으며 무후가 죽은 뒤 사면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중원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귀환 도중 ‘반역자’의 후손들에게는 이 사면령이 해당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사천성 면주(綿州)로 달아났으며 그래서 귀착한 데가 창융현(昌隆縣. 지금의 장요우시) 청련향(靑蓮鄕)이었다. 그 사이 드나듦이 있었지만 이백은 스물네 살 때 장강을 타고 만유(漫遊)를 떠나기 전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이백이 살던 때 이 지역의 이름난 술이 바로 ‘검남소춘(劍南燒春)’이란 것이었는데 ‘검남’은 이 지역의 별칭이며 ‘소춘’은 소주란 뜻이다. 일찍이 이백이 모피옷을 저당 잡히고 통음(痛飮)했다는 ‘해초속주(解貂贖酒)’의 일화도 이 술에서 비롯되었다.

두보가 성도(청두)로 온 것은 서기 759년 12월로 그의 나이 46세 때였다. 33세 때 처음 낙양에서 11세 연상인 이백을 만나 깊은 교감을 가졌던 그는 안녹산(安綠山)의 난을 거치면서 몹쓸 고초는 모두 겪었다. 궁핍을 의복처럼 걸치고 다녔던 그가 비로소 안일과 평안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성도에서 지낸 몇 년간이었다. 때마침 벗이자 든든한 후원자였던 엄무(嚴武)가 성도의 최고 벼슬아치로 부임하였기에 개울가에 초당을 짓고 마음 편히 시를 지을 수 있는 여유도 가졌다. 

51세 되던 해 여름, 엄무가 조정 중책을 맡아 장안으로 불려 갈 때는 면주(綿州. 지금의 면양)까지 따라가 그를 전송했는데 엄무와 작별하고서도 두보는 곧 성도로 돌아갈 수 없었다. 성안에서 반란이 일어나 살육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1년 뒤, 엄무가 검남절도사(劍南節度使)가 되어 다시 성도에 부임한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고 서둘러 성도로 돌아오던 두보는 ‘술로는 돈 안 내고도 마실 수 있던 비통주를 기억한다(酒憶筒不用)’며 다시 찾는 성도를 그리워했다. ‘비통주’는 당시 성도 교외의 비현(縣)에서 생산되던 대나무통 술이었다.

지난달 필자는 이태 만에 다시 청두를 찾았다. 일정이 비는 때 잠깐 쓰촨대학의 관계자들과 함께 도교(道敎)의 성지로 이름난 청성산(淸成山)를 둘러보려고 길을 나섰는데 도중에 비현의 노정을 일러주는 이정표를 발견하곤 굳이 차머리를 그쪽으로 꺾게 하였다. 아직도 대지진의 흔적이 온전히 가시지 않은 시골 마을에서 필자 또한 ‘비통주’를 찾아보긴 했지만 술은커녕 술의 내력을 아는 이조차 만날 수 없었다.

아쉬운 마음은 청두의 샐러리맨들이 가장 즐겨 마신다는 중저가 배갈 ‘풍곡주(豊谷酒)’로 달랬다. 한 병에 90위안(우리 돈 1만5000원 정도) 안팎인 이 술은 17세기 후반부터 미옌양(綿陽)의 풍곡(豊谷)에서 생산되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미옌양의 옛 이름이 면주다. 두보와 엄무가 작별의 정을 나눴던 이곳은 또 취한 이백이 단번에 시 백 편을 지었다는 전설을 남긴 곳이기도 하다. 풍곡주는 그 첫맛이 자극적이었지만 농향주답게 강렬하고 깊지는 않았다. 입안에 도는 향도 썩 괜찮았는데 깔끔하게 걷히는 뒷맛이 훨씬 좋았다.  

중국 배갈 시장의 최강자 우량예

(우량예 제조공장 정문)



재작년쯤부터던가. 마침내 서울 한복판에도 중국 배갈의 광고판이 나붙었다. 명동 거리에서도 쉽게 눈에 들어오는 ‘우량예(五粮液)’ 광고가 그것이다. 일찍이 우리한테 소문난 배갈은 ‘마오타이주(茅台酒)’였지만 마오타이는 그 독특한 향 탓에 우리네 입맛을 제대로 끌지 못했다. 때문에 90년대 중반부터 우리네 애주가들이 우량예를 만난 것은 중국 배갈의 새 지평을 보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강렬하면서도 부드럽고 진하면서도 은은한 농향형(濃香型) 배갈의 진면목을 우량예를 통해 대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중국 배갈 시장의 대세 또한 농향형이다. 우량예를 필두로 한 농향형 배갈들이 시장의 70% 이상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손쉽게 마오타이의 매출액을 꺾어버린 우량예는 중국 배갈의 새 전설이며 그 기세는 여전히 위력적이다.

우량예 술 회사는 장강의 최상류, 즉 금사강(金沙江)과 민강(岷江)이 만나는 쓰촨성 이빈시(宜賓市)에 있다. 지도상의 ‘장강’이라는 표기도 이곳 이빈에서 시작한다. 의빈(이빈) 지역의 양조 역사는 선진시대(先秦時代)까지 올라가지만 순수하게 곡식으로 술을 빚기 시작한 것은 당대(唐代)부터다. 서기 765년 봄, 쪽배를 타고 고향으로 가던 두보는 당시 융주자사(戎州刺史) 양모(楊某)의 초대를 받고 이곳에 들렀다. 연회에서 젊은 술꾼들과 기생들이 어울려 노는 양을 보곤 즉흥으로 ‘(기생들이 일어나 주인에게) 짙푸른 중벽 춘주를 올리고 가는 손으로 분홍빛 여지 열매를 까는구나(重碧拈春酒 輕紅擘枝)’라는 시구를 남겼다. 이때부터 이곳 술은 ‘중벽주(重碧酒)’로 불렸다.

우량예 양조기술의 발전 과정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은 ‘요자설곡(姚子雪曲)’이라는 술의 등장이다. 이는 송대(宋代)의 의빈 양반 요씨(姚氏) 집안에서 만든 술이었는데 옥수수, 쌀, 수수, 찹쌀, 메밀 다섯 가지 곡식을 원료로 하였다. 명대(明代)에 의빈 사람 진씨(陳氏)가 요씨의 주업을 계승하였지만 당시의 교양인들은 이 술을 여전히 요자설곡이라고 했다. 그러나 서민들은 이를 ‘잡양주(雜粮酒)’라고 불렀다. 1909년 선비 양혜천(楊惠泉)이 이 술을 마셔보곤 말하길 “이처럼 좋은 술을 잡양주라고 하는 것은 너무 속되다. 비록 요자설곡이 점잖기는 하지만 술의 본체를 드러내기에는 부족하다. 이 술은 다섯 곡식의 정화(精華)로 빚어진 것이니 오량액(五粮液)이라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우량예란 이름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우량예를 빚는 데 쓰는 물은 민강의 깊은 데서 길러지는데 이를 ‘민강강심수(岷江江心水)’라고 한다. 수수, 쌀, 찹쌀, 밀, 옥수수 등 다섯 가지 원료는 현지 특산의 정선된 것이며 누룩은 밀로 만든 대곡(大曲)을 쓴다. 누룩 균을 배양하는 시간도 40일 정도로 평균 30일 정도인 다른 술보다 길다. 구덩이 속 발효기간은 70~90일에 이른다. 

우량예 공장은 거대한 산업단지 방불

(이빈시 시외버스터미널(왼쪽). 우량예 숙성저장고)



청두에서 네 시간여 고속도로를 달려 도착한 이빈시. 시골답지 않게 버스터미널 건물이 국제공항인 양 크고 깔끔하다. 터미널에서 우량예 공장까지는 택시로 10여 분. 공장 정문 앞에는 술 회사가 운용하는 전용 택시들이 대기하고 있다. 공장을 구경하고자 하는 이들은 이 택시를 타야만 한다. 30~40분 구경에 요금은 50위안이다. 우량예 회사의 정식 직원이기도 한 택시 기사는 장쩌민, 후진타오 등 국가 지도자들이 모두 이곳을 다녀갔다고 자랑이 대단하다. 영빈관인 일월궁(日月宮) 뜰에서 내려다보는 술 공장은 거대한 산업단지와 흡사하다. 사방 10여㎞의 공장 전경은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3만여 종업원을 거느린 우량예 회사가 지역 사회는 물론 중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한 까닭도 알 만하다. ‘십리주성(十里酒城)’이라는 말이며 ‘사람 중에 으뜸은 황제, 장강의 시작은 의빈, 시문학의 우두머리는 이백과 두보, 술의 꼭대기는 우량예(人之頭皇帝 江之頭宜賓 詩之頭李杜 酒之頭五粮液)’란 자랑도 함부로 나온 것이 아님을 느끼게 된다.

2008년 영업수익 300억위안을 달성한 우량예는 현재 12개의 자회사를 거느리는 명실상부한 중국 배갈업계의 최강자이다. 2008년 기준 우량예의 브랜드 가치는 480억5600만위안으로 평가된다. 오량춘(五粮春), 오량신(五粮神), 오량순(五粮醇) 등의 술들은 이름만 봐도 우량예 계열임을 알 수 있지만 장삼각(長三角), 양호춘(兩湖春), 현대인(現代人), 금육복(金六福), 유양하(瀏陽河) 같은 배갈들이 우량예에서 직간접으로 만든 술임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우리 한국인들이 베이징에서 즐겨 마시는 ‘경주(京酒)’도 마찬가지다.

온몸에 술 냄새를 묻힌 채 민강의 강둑에 섰다. 황토빛 강물 위로 끊임없이 배들이 오간다. 한겨울인데도 이곳 남방의 술 도시는 들판도 가로수도 온통 푸른빛이다. 술 향기 좇아 천만리를 건너온 나그네는 장강의 시작점에서 다시금 1200여 년 전 쪽배 하나로 이곳을 지나간 한 시인을 떠올린다.

서기 765년 5월, 성도(청두)에 머물던 두보는 작은 배에 가족들을 태우고 이 강을 떠내려간다. 전란(안녹산의 난)은 끝났지만 아직 그의 고단한 생은 끝나지 않았다. 생계의 후원자이며 자기 시의 진정한 이해자였던 엄무가 이 해 4월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같은 해 정월에는 절친한 친구 고적(高適)마저 병으로 세상을 떴다. 세 해 전에 이미 이백이 죽었고 그 뒤를 이어 왕창령(王昌齡), 저광희(儲光羲) 같은 저명 시인들이 차례로 이승을 버렸다. ‘(문단의) 호걸준사로 어떤 이가 남았나? 문장이 쓸리고 땅이 온통 비었는데… (豪俊何人在 文章掃地無)’라고 애통해했던 두보는 이제 제 몸 하나 의탁할 곳이 없었다. 더 이상 성도에 머물 수 없게 된 그는 고향으로 돌아갈 작정을 했다. 민강에 배를 띄운 그는 가주(嘉州)를 거쳐 이곳 융주(戎州. 지금의 이빈)를 지나 장강을 따라 내려갔다. 54세 나이. 기침으로 고생하며 중풍 기운도 조금 있었다. 귀는 어둡고 눈은 흐렸다. 동(東)으로 흘러갔던 두보는 끝내 고향 언저리에도 이르지 못한 채 동정호(洞庭湖) 기슭에서 생애의 마지막 숨을 거뒀다.

시인이 지나간 지 천 년도 훨씬 지나 동방에서 온 이름 없는 소설장이 하나가 강 언덕에서 가지는 감회는 크다. ‘무릇 천지는 만물의 객사요, 세월은 끝없는 나그네(夫天地者 萬物之逆旅 光陰者 百代之過客)’라고 한 이백의 말이 떠오른 것도 이 순간이었다. 그 이백은 이곳을 두보보다 40년 앞서 떠내려갔다. 노년의 두보와 달리 이백은 그때 세상천지를 품에 담겠다는 웅지를 지닌 24세의 청년이었다.

※ 이 글에 등장하는 지명 중 성도(청두), 면양(미옌양), 의빈(이빈) 등 3곳은 <일러두기>의 원칙대로 해당 지명이 거론되는 시점이 1949년 신중국 건국 이전인 경우 한자어로 표기했고, 현재인 경우 중국어로 표기했음.

<일러두기>

* 현대 중국의 인명 및 지명, 중국의 고유명사는 중국어 발음대로 표기했다.

 단,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고유명사는 한자 독음대로 표기하였다.

 <예> 毛澤洞 마오쩌뚱 西安 시안 / 長江 장강 杏花村 행화촌

* 술 이름의 경우에도 중국어 발음대로 표기해야 하나 우리에게 익숙한 술에 한해서만 그렇게 했다.

 여타의 술은 발음이 어렵거나 의미 전달이 잘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에서 한자 독음으로 표기했다.

 <예> 茅台酒 마오타이주 五粮液 우량예 / 黃鶴樓酒 황학루주 劍南春 검남춘

* 신 중국 수립(1949년)을 기준으로 그 이전의 인명 및 지명은 한자 독음대로 표기했다.

 <예> 李白 이백 杜甫 두보 南京 남경

필자 최학 교수는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고, 1979년 한국일보 장편소설 공모에 역사소설 <서북풍>이 당선되면서 큰 주목을 받은 중견 소설가다. 대표작으로 <서북풍>, <미륵을 기다리며>, <화담명월> 등이 있으며, <배갈을 알아야 중국이 보인다>, <니하오 난징> 등 중국 관련 저서도 있다. 현재 우송대 한국어학과 교수로 많은 중국인 학생들을 가르치며 한·중 양국 간 교류에 일조하고 있다. 네이버에 ‘배갈, 白酒의 향과 맛을 찾아 (http://blog.naver.com/jegang5)’라는 블로그를 운영하며 배갈 대중화 작업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