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지 수입상’에서 ‘제지 대왕’ 등극



 노동자 착취기업 몰렸다 극적 부활



장인 주룽제지 회장은 “선진국의 폐지는 중국에서 ‘황금’이 될 수 있다”고 판단, 홍콩에서 폐지를 모아 본토로 넘겨 떼돈을 벌었다.

 ‘자수성가(自手成家)한 여성 부자 가운데 세계 1위’, ‘중국 최고의 여성 평민 부자’, ‘중국 최고 부호(2006년)’….

1996년 중국 남부 광둥성 둥관(東莞)에서 출범한 주룽(玖龍)제지의 최대 주주이자 창업주인 장인(張茵) 회장(54)에게 따라붙는 호칭들이다. 그가 중국 산업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독특하다.

 공산당이나 관료들과의 ‘시(關係)’를 이용하거나 여러 편법을 동원해 벼락부자가 됐다가 하루아침에 쪽박을 차거나 감옥살이를 하는 일부 갑부들과 달리, 장인 회장은 일관되게 부호 순위 상위권에 있을 뿐 아니라 임직원들로부터 존경받는 기업 경영자다. 그는 부모로부터 재산을 물려받거나 명문대학이나 대학원에 다니지도 않았다. 오히려 초등학교 과정을 제외하면 정규 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

하지만 성공가도를 고속질주 하던 장인 회장도 최근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나 할까.

 재앙은 2008년에 쏟아졌다. 그해 3월17일 하루 만에 주룽제지 주가가 40.28%나 폭락했다. 주룽제지의 성장성에 대한 시장의 회의론이 확산된 데다 실적 악화설이 퍼진 탓이다. 장인 회장의 주식 평가액은 당일에만 134억4200만홍콩달러(약1조7000억원) 어치가 사라졌다. 31억1867만 주에 달하는 주룽제지 주식 가운데 장인 회장은 71.99%를 보유하고 있다.

 이어 전국정치협상회의 위원인 장인은 같은 달 열린 전국인민대표자 대회와 정협 회의석상에서 “개정된 노동법이 지나치게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고 기업인의 경영을 제한하고 있다”며 소득세 인하와 종신고용 조항 삭제 등 3개 항을 요구하며 노동법 개정을 ‘제안’했다.

 그는 이 제안으로 여론과 노동계의 질타를 받았고, 홍콩의 SACOM(대학생과 교수로 구성된 불량기업 감찰 민간기구)으로부터 노동자의 ‘피와 땀’을 착취하는 기업으로 낙인찍혔다. SACOM은 주룽제지의 주주들에게 주룽제지의 주식 처분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냈고, 사태는 일파만파로 커졌다. 중국 언론매체들은 그를 ‘악랄한 자본주의자의 대표’로 몰아갔다.

 장인 회장은 5월7일 기자회견을 자청하고 공장 내부를 공개했다. 최첨단 제지 시설과 깨끗한 환경, 그리고 합리적인 근무환경을 똑똑히 확인한 다음에야 언론매체에서 부정적인 보도가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12월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치면서 주룽제지는 파산 스캔들에 휘말렸다. 이는 수익 후 재투자와 시설 확충을 위해 대출을 받아 사업을 확장해 나가는 주룽제지에 대한 시장의 지나친 우려가 낳은 결과였다. 장인 회장은 즉각 지출 삭감, 중소기업에 적합한 신제품 개발과 성공으로 불안 심리를 잠재워갔다.

 결국 그는 오뚝이처럼 재기했다. 중국에서 매년 부유층 순위를 발표하는 후룬리포트에서 2006년 중국 최대 부호로 선정된 그는 2010년에 3위로 부활한 것이다. 중국 정부의 대대적인 녹색산업 진흥 드라이브에 힘입어 폐지(廢紙)를 재활용하는 주룽제지는 도약을 예고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성공에 대해 “운이 좋았다. 하늘이 준 기회를 잘 잡았고 사람을 중요시할 줄 알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천운은 그것을 알아보는 혜안과 행동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자에게만 찾아오는 법이다. 장인 회장의 성공 역정 스토리를 추적해 보면 중국 산업계의 생명력을 엿볼 수 있다.

1985년 당시 28세이던 장인은 홍콩과 인접해 있는 선전의 한 합자기업에서 재무업무를 하고 있었다. 부친은 중국 최북단 헤이룽장성의 군인이었으나 문화혁명 당시 우파 분자로 몰려 3년 동안 감옥살이 하면서 실직한 상태에서 광둥성으로 옮겨왔었다. 장인 회장은 8남매의 맏이로서 10살이 조금 넘은 나이 때부터 7명의 동생을 돌보며 집안의 가장 노릇을 했다. 가족들은 전적으로 장인이 벌어오는 월급으로 연명하고 있었다.

 “한 제지업체의 위탁을 받아 폐지를 구입하기 위해 홍콩을 방문했어요. 그때 중국의 종이 부족 현상을 알게 됐고 바로 이거다 싶었죠”.

 장인 회장은 억만장자의 문을 들어서게 된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다. 당시 중국은 산림자원이 부족했고, 특히 제지사업은 매우 낙후돼 있어 대부분의 폐지와 펄프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는 “그때 선진국의 폐지가 중국에선 ‘황금’이 될 수 있다는 걸 알아챘다”고 말했다.

 1985년 당시까지 모은 전 재산인 3만위안(약 400만원)을 들고 홍콩으로 건너간 장인은 400평방피트의 좁은 사무실에서 넝마주이들이 주워온 폐지를 수집해 중국으로 넘겨주고 그 차액을 남기는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홍콩의 폐지업자들은 물에 젖거나 곰팡이가 잔뜩 끼어 있는 폐지를 넣어 파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물에 젖은 종이를 넣으면 무게가 무거워 값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업계에서는 폐지 전체 총 무게의 20~30%까지 물을 타는 게 일종의 공공연한 관행이었다. 하지만 장인은 눈속임으로 가득 찬 ‘편법’을 따르기를 거부했다. 그는 폐지 속 수분율을 최고 15%로 낮추고 ‘품질제일’ 원칙을 고수했다. 경쟁업계에선 “규정을 어겼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일부는 홍콩의 폭력조직인 삼합회를 동원해 살해 위협을 했고 뒷돈을 내라고 협박했다. “폐지를 모두 태워버리겠다”는 협박에 맞서서, 그는 “너희들은 나의 거래선인 중국 본토 기업에게 보복을 당할 것”이라고 맞대응하는 강단을 보였다.

 

‘물 안 먹은 폐지’ 정공법으로 경쟁업체 제압



그렇다고 판매가 순항한 것도 아니었다. 경쟁업자들이 물을 잔뜩 넣은 폐지를 싼값에 공급하면서 장인의 판매 물량은 오히려 급격하게 줄었다. 그는 “언젠가는 지지를 얻을 것”이라고 믿고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대신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폐지 수집 상인들을 직접 만나러 다녔다. 아침 7시면 홍콩섬 부두에 나가 운반돼 오는 폐지물량을 일일이 검사하며 홍콩과 중국 일대를 부지런히 발로 뛰며 돌아다녔다. 입소문이 퍼지면서 점차 중국 기업체 공장(제조상)들로부터 하나둘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홍콩 입성 6년 만에 홍콩 일대 최대 폐지상인으로서 큰 재산을 모으며 성공을 거둔 첫 번째 비밀은 바로 이런 품질 최고라는 비즈니스의 기본 원칙을 고집스럽게 지켰다는 사실이다.

 둥관에 있는 주룽제지 본사 회장실은 사방을 100%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 놓았다. 홍콩에서 만나 결혼한 남편 류밍쭝이 내놓은 아이디어로 회장실과 다른 모든 사무실을 투명유리로 만든 것이다. 장인 회장은 “경영관리란 측면에서 투명한 게 매우 좋다. 모든 사람이 서로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밀실 회의라는 것은 주룽제지에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또 매년 말 수백 명의 근로자와 일대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직원들도 그를 회장님이라고 부르기보다는 ‘큰 누나(張大姐·장따제)’라고 자주 부른다. 연말과 음력설 때마다 본사 근무 임직원들을 한데 모아 체육대회나 결산 행사를 연다. 그는 이 자리에서 업무 기여도에 따라 수천 위안에서 수만 위안 상당의 특별상여금을 붉은 봉투에 담아 직접 나눠주며 직원들을 격려한다. 인근 중산(中山)대학과 제휴해 직원들을 위한 MBA 과정을 운영하는가 하면 복리 수준을 최고로 하고 국내외 연수를 통한 직원 교육에 앞장서고 있다. 장인 회장은 “직원 교육을 회사 경영 수지의 관점에서 따지면 안 된다. 그것은 회사의 인력자원에 대한 투자이다. 우수한 인재가 회사에 없다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고 말한다.

 물론 직원들의 업무 수행에 대해서는 고도의 엄격함을 요구한다. 요컨대 ‘이인위본(以人爲本: 사람으로서 근본을 삼는다)’을 골간으로 한 인재 경영관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개인의 성장과 기업발전을 동전의 앞뒷면처럼 밀접하게 보면서 직원 개개인의 가치와 경쟁력을 높이는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회장 사택을 직공들이 근무하는 기숙사 맨 꼭대기 층에 두고, 승용차는 평범한 도요타 차량을 이용하고, 명품 가방이나 귀금속을 사용하지 않는 검소함도 몸에 배어 있다. 그가 갖고 있는 고가 귀금속은 남편이 결혼 기념으로 준 3캐럿짜리 다이아몬드가 유일하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직원들이 매일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는데 나 혼자 좋은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것은 옳지 않다. 기업 경영자는 자기만 부유한 걸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이 같이 잘 사는 것을 항상 생각하고 고민해야 한다.”

 1990년 2월 남편과 함께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건너가 폐지수집 회사인 중난홀딩스(中南控股公司)를 세워 7개의 폐지 포장공장과 운수업체를 운영하며 큰 성공을 거둔 장인 회장은 95년 중국으로 귀환을 결심했다. 96년 12월 둥관에 1억1000만달러를 들여 제지 공장을 지어 연간 20만 톤의 포장지를 생산하는 시설을 갖추었다. ‘폐지 대왕’에서 ‘제지(製紙) 대왕’으로 변신한 것이다.

 이후 총 2억1000만달러를 더 투자해 2기(1999년)와 3기(2006년) 확장 공사를 마쳤다. 2009년 9월에는 톈진에서 중국 내 네 번째 생산공장을 준공해 연간 총생산규모가 882만 톤에 이르렀다. 둥관에서 처음 제지 생산을 시작한 지 13년 만에 생산량이 4400%나 급증한 것이다. 이에 따라 주룽제지는 아시아 최대 골판지 생산업체이자, 골판지 브랜드로 세계 5위권에 드는 초우량 기업이 됐다.

 주목되는 것은 장인 회장은 이런 사업 확장 과정에서 생산품의 수량과 질을 높이는 데 집중했을 뿐 다른 분야로 불필요한 사업 다각화를 시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주룽제지가 생산하는 핵심 품목은 포장상자의 원료용지인 골판 원지(原紙)와 골심지다.

단적으로 이 두 품목이 전체 생산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87%에 이른다. 단일한 원료용지 품종에 집중함으로써 대량 생산으로 공급 및 생산 원가를 낮추면서 고부가가치 사업체로 키워가고 있는 것이다.

송의달 조선일보 산업부 차장(전 홍콩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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