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침체로 자체 R&D 투자 축소…

 

연구 성과 공유해 이익 극대화




미국의 경기가 제대로 순환하지 못하는 가운데 기업들의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 패러다임도 바뀌고 있다. 평소 같으면 지속적으로 새로운 제품이나 기술을 개발해야 하는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이다. 지금처럼 미래를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신개발에 대한 R&D 비용을 줄이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일반적으로 미국 기업의 경우 연구개발 부문에 상당한 노하우가 있으며, 그에 대한 투자 또한 다른 어느 나라의 기업체들보다 앞서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오랜 경기침체 여파는 이 같은 미국 기업들의 문화를 바꿔놓고 있다.



미국 국립과학재단에 따르면 지난 2007년 미국 내 기업들이 R&D에 쏟아 부은 자금 규모는 모두 2692억 달러에 달한다. 그러나 2008년 연구개발비는 2339억 달러로 줄었다.



미국 기업들의 연구개발비 축소 움직임은 경기침체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경기침체 이전인 2001년의 경우 연구개발비 규모는 모두 1985억 달러로 전년 대비 0.5%가 줄어들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2008년처럼 연구개발비 축소 규모가 컸던 적은 없었다. 



어려운 만큼 돈을 쓰는 데 주저하는 것이 인지상정. 가용자산은 불투명한 미래를 대비해 확보해둬야 한다는 심리가 팽배하기 때문에 이 같은 R&D 비용 축소는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기업들이 R&D의 의미를 축소하거나 이를 중요시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3M은 연구개발을 하지 않을 경우 기업의 의미가 없다고 하면서도 지난 2009년의 연구개발 비용은 2007년보다 무려 5.8%가 줄어든 12억9000만 달러였다.

미국 기업 연구개발 투자 축소

기업의 연구개발 비용은 특정 개발목표를 설정할 경우에는 다시 늘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불경기인 지난 수년간 보여온 연구개발 비용의 축소는 다른 인건비나 보너스 등 임금축소 등과 같은 맥락으로 보고 있다. 이는 장래의 인력감소와 함께 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연구개발 비용의 축소가 내부의 우수 인력의 고용감소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기업들이 보여주는 연구개발에 대한 자세는 신기술을 개발하고 신제품을 새로 만들어내겠다는 의지가 아니라 기존에 이미 소비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은 기술이나 제품을 다듬는 정도다.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 축소는 최근 3년간 미국 내 신규제품에 대한 특허출원이 늘어나지 않고 있다는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 기업들은 현재 존재하는 기술의 수준을 넘어서 보호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지는 신기술이나 제품은 즉각 특허출원을 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런데 지난 3년 동안 특허출원은 연간 45만6100건에서 정체상태다. 오히려 줄어들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그러나 미국 내에서 이뤄지는 특허출원이라고 해서 모두 미국 기업들의 제품이 아니라는 데 늘고 줄어드는 추세의 허수가 있다. 사실 특허출원이 즉각적인 상품개발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일부 기업들은 특허 등록만 해두고 상품화를 위해 한참을 기다리는 경우도 많다.



특허가 이뤄졌다고 해서 모두 시장에서 상품화돼 곧바로 그 연구개발에 대한 보상이 이뤄지지 않으니 기업으로서는 미래를 위한 장기적인 투자가 되는 경우다. 그동안 기업들이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은 것도 장래에 필요한 기술을 축적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인식에서였다. 미국 기업의 경쟁력은 바로 이 같은 기업들의 신기술, 신제품 개발에 대한 열정을 전제로 했다.



인식은 바뀌지 않았는데 기업들의 연구개발 비용은 줄고, 특허출원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는 사실의 이면에는 기업들이 신기술 개발을 다른 업체에 맡기고 있다는 말로 풀이될 수 있다. 자체적으로 연구개발을 하는 것보다는 다른 전문기관이나 연구소에서 개발한 기술을 라이선스해서 사용하거나 혹은 다른 업체가 이뤄놓은 연구결과물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P&G의 ‘연결 및 개발’(Connect & Develop)이라는 프로그램이 좋은 예다. 이 프로그램은 외부에서 개발된 기술이나 신제품 아이디어를 P&G가 사용할 수 있도록 연결해주는 제도다.



이 제도로 인해 P&G는 최근 자신들이 개발하지 않은 기술이나 제품 아이디어를 일종의 라이선스 대금을 지불하면서 사용해오고 있으며, 그 규모는 현재 P&G가 사용하는 기술의 절반 이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문가들은 오히려 이 같은 연구개발 트렌드가 기술이나 신제품 아이디어의 교류역할을 하고 있으며, 더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한국 기업들이 기술개발이나 아이디어를 극비로 다루고, 마치 영원한 자신의 개발 작품으로 애지중지하는 자세와는 상당히 차별되는 모습이다. 특히 당장 상품화하지 않은 연구개발 성과를 다른 기업이 시장개척의 역할을 대신하도록 하는 효과는 장점으로 볼 수 있다. 대표적인 농업기업인 몬산토의 경우 미국 내에서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이 같은 기술개발 결과를 공유해 이익을 창출한다. 몬산토는 최근 독일 굴지의 화학 기업인 바스프(BASF)와 제휴, 유전조작 농작물 분야에서 유기적으로 협력해오고 있다.



지난 7월 양사는 밀을 비롯해 콩류, 면화, 카놀라, 옥수수 등에 제5세대 집중연구 과제를 함께 이어간다는 협력방침을 발표했다. 연구결과물을 서로 공유할 경우 양사는 각각 10억 달러에서 25억 달러 규모의 이익이 발생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 수술용 로봇을 만드는 인튜이티브 서지컬은 외부에서 개발된 기술을 적용해 효율성을 높였다.
- 수술용 로봇을 만드는 인튜이티브 서지컬은 외부에서 개발된 기술을 적용해 효율성을 높였다.

기술공유 통해 불확실성 줄여

양사는 오는 2020년 유전공학으로 처리된 밀을 상업화한다는 계획이며, 농산물의 유전조작기술을 농작물 보호 화학기술과 접목할 경우 새로운 분야의 농산물 관련 영역을 열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즉 몬산토가 개발하는 새로운 잡초제거제에 잘 견뎌내는 작물을 개발해 효과를 극대화하고 제품의 상용화를 확산시킬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개발과 그 과정의 모든 비용을 감당하는 구조에서 탈피, 연구개발물을 공유해 서로의 이익을 극대화한 전략이다.



공동연구개발 및 이용 전략이 다른 분야보다도 더 두드러지는 것으로 의료기술 분야가 꼽힌다. 의료용 로봇 을 만드는 인튜이티브 서지컬(Intuitive Surgical)은 의사가 수술시 움직이는 모습을 그대로 재연하는 기기를 제조해왔다. 최근 이 회사는 자체적으로 연구해낸 기술을 적용하기보다는 주변 업체에서 만든 것을 연결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효율을 높이고 있다. 이를 통해 이 회사는 지난 2009년 불경기 와중에 매출을 무려 75%나 끌어올릴 수 있었다.



반면 다나하르라는 업체는 이번과 같은 극심한 불경기가 오히려 다른 업체들을 따라잡을 수 있는 기술개발의 적기로 간주, 연구개발에 더 박차를 가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이 업체는 이익이 줄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 다른 분야에서의 비용을 철저하게 줄였다.



지난해의 경우 다나하르는 매출이 15%가 줄어드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회사 경영진은 불경기의 기술축적은 다른 업체들보다 한 발 더 나아간 기술확보를 통해 경기가 나아질 경우 더 많은 이익을 가져다줄 것으로 기대한다.



언제 어느 시기나 기업은 자체 경쟁력으로 기업활동을 하면서 소비자들로부터 보상을 받는다. 그 보상이 크면 기업은 성장하지만 보상이 적을 경우 망한다.



이 때문에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연구개발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어려운 상황에서 무턱대고 기술개발에 귀중한 자산을 쏟아 붓는 것도 지양해야 할 부분이다. 이런 가운데 미국 기업들의 기술개발 공유정신은 한국과 같이 부존자원이 적고 기술개발만으로 부가가치를 높이는 상황에서 한번쯤 고려해봄 직한 요소가 아닐까.



독자개발로 자금투자 압박을 받으면서 그 보상을 혼자만 누리려는 독단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기술개발이라는 불확실한 요소의 위험을 공유함으로써 부담을 줄여 그 결과물에 대한 이익을 극대화하는 전략이 바로 한국 기업에도 필요하다.

- 농업기업인 몬산토는 독일 화학기업 바스프와 기술개발 성과를 공유하고 있다. 사진은 몬산토의 옥수수 농장.
- 농업기업인 몬산토는 독일 화학기업 바스프와 기술개발 성과를 공유하고 있다. 사진은 몬산토의 옥수수 농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