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의 이상향 ‘행화촌’서 빚는 국가명주

<일러두기>

❶ 현대 중국의 인명 및 지명, 중국의 고유명사는 중국어 발음대로 표기했다. 단,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고유명사는 한자 독음대로 표기하였다.

<예> 毛澤洞 마오쩌둥 西安 시안 / 長江 장강 杏花村 행화촌

❷ 술 이름의 경우에도 중국어 발음대로 표기해야 하나 우리에게 익숙한 술에 한해서만 그렇게 했다. 여타의 술은 발음이 어렵거나 의미 전달이 잘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에서

한자 독음으로 표기했다. <예> 茅台酒 마오타이주 五粮液 우량예 / 黃鶴樓酒 황학루주 劍南春 검남춘

❸ 신 중국 수립(1949년)을 기준으로 그 이전의 인명 및 지명은 한자 독음대로 표기했다. <예> 李白 이백 杜甫 두보 南京 남경

- (왼쪽)분주 박물관 (위)분주 제조사 전경 (아래)분주의 원료처리 공정.
- (왼쪽)분주 박물관 (위)분주 제조사 전경 (아래)분주의 원료처리 공정.

지난해 9월 중국 경매시장에서 배갈의 사상 최고가가 경신돼 큰 화제를 일으켰다. 산시성(山西省)의 명주인 ‘국장분주(國藏汾酒, 펀주)’가 그 주인공이다. 베이징에서 이루어진 한 경매에서 20병의 국장분주가 총 3076만 위안으로 낙찰되었는데 개별 최고가가 209만 위안(우리 돈 약 3억5500만원)을 기록해 2010년 6월 1959년산 ‘마오타이주’가 세운 103만 위안의 기록을 갈아치웠다. 이 술은 1915년 파나마 국제박람회에서 분주가 최고의 술로 선정된 것을 기념해 신(新)중국 초기에 만들어 보존해온 소량의 주정을 이용해 특별히 제조한 것이다.



중국 각지에 저마다 명주가 있지만 분주가 중국 배갈의 현대적 발전에 근간이 된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오늘날 중국 배갈을 대표하는 마오타이, 우량예 등도 일정 부문 분주의 양조기술에 힘입어 지금에 이르렀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초창기 마오타이주를 ‘화모주(華茅酒)’라고 불렀던 것도 따지고 보면 ‘마오타이에서 만들어진 분주’란 뜻에 다름 아니다.



‘화(華)’와 ‘화(花)’는 같다. 따라서 ‘화모(華茅)’는 ‘화모(花茅)’이며 이는 ‘행화모태(杏花茅台)’의 줄임말로 ‘마오타이에서 생산되는 행화촌 술’이란 뜻이다. 또 다른 국가 명주인 ‘황학루주(黃鶴樓酒)’를 그 예전에는 ‘우한(武漢)의 분주’란 뜻으로 ‘한분주(漢汾酒)’라고 했던 것과 큰 차이가 없다. 이에서 보듯이 산서 분주의 우수한 양조기술은 독보적인 것으로서 신중국 건립 전후로 해서 중국 전역에 광범위하게 퍼져나갔음을 알 수 있다.

분주 땅, 분양성 (汾州府, 汾陽城)

성 밖 30리의 행화촌 (離城三十杏花村)

행화촌에서 좋은 술 나네, (杏花村里出美酒)

행화촌에서 현인이 나시네. (杏花村里出賢人)

이는 옛날부터 민간에 퍼져 전해오는 분주를 찬양하는 노래의 한 구절이다. 이 술은 깨끗하고 투명한 빛깔을 띠며 맑고 우아한 향과 함께 순수하고도 깊은 맛이 유연히 느껴진다. 특히 순정하고 부드러운 향기로 인해 중국 청향형(香型) 배갈의 전형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예 이 향형(香型)을 ‘분향형(汾香型)’이라고 부른다. 본래 분주는 알코올 도수가 60도를 넘지만 독한 자극감이 없다는 평을 받았다.



물론 요즘은 중국의 애주가들도 높은 도수의 배갈을 부담스러워하는 경향이 있어서 예전같이 높은 도수의 분주를 시중에서 만나는 일은 쉽지 않다.



허름한 중국 음식점에서 싸구려 배갈밖에 마셔보지 못했던 내가 정통의 배갈을 중국 현지에서 처음 마셔본 것이 한·중 수교 전인 1991년 여름이었으며 그때 만난 술이 분주였다. 작가 방문단의 일원으로 중국을 찾았던 길이었는데 60도가 넘는 도수에 기겁하고서도 중국측 작가들과 무모한 술 시합까지 벌였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분주는 산시성 펀양현(汾陽縣) 씽화촌(杏花村)에서 생산된다. 펀양 지역의 옛 이름이 분주(汾州)였기에 술 이름도 여기서 유래됐다. 우리나라에서 이곳에 가려면 베이징을 기점으로 하는 것이 편하다. 베이징에서 먼저 타이위엔(太原)으로 가는데 이곳까지는 항공, 철도 등 교통이 편리하다. 베이징-타이위엔의 직선거리는 우리네 부산-평양 정도이며 타이위엔에서 펀양까지는 서울-대전 거리다. 펀양에서 행화촌까지는 차로 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당대의 명시 ‘청명’에 등장하는 행화촌

<- 분주
<- 분주

행화촌에서 술이 만들어진 역사는 5세기경의 남북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역사가 1500년도 더 되는 셈이다. 이백과 두보 또한 분양의 술을 즐겨 마셨다는 기록이 있지만 분주 술을 세상 널리 알리는 데 당대(唐代)의 시인 두목(杜牧)만큼 이바지한 이는 없다. 지금도 세상 널리 음송되는 그의 시 ‘청명(明)’ 때문이다.

청명을 맞았는데 빗방울 분분히 떨어지니

(淸明時節雨紛紛)

길 가는 나그네는 가슴만 더 쓰라리네.

(路上行人慾斷魂)

어디쯤 주막이 있는가 물었더니

(借問酒家何處有)

목동 녀석은 말없이 살구꽃 핀 마을을 가리키는구나. (牧童遙指杏花村)

청명은 양력 4월5일경. 우리는 한식(寒食)이라는 말을 더 많이 쓰는데 중국인들에게도 돌아가신 부모님의 제사를 지내고 묘를 돌보는 뜻 깊은 날이다. 먼 길 떠나온 탓에 제사도 모시지 못하는 처지의 시인은 떨어지는 봄비에 가슴만 더 아프다. 가까운 데 술집이라도 있으면 시린 가슴을 달랠 수 있을 듯싶다. 하여 지나가는 목동에게 물었더니 녀석은 퉁명스럽게 손으로 살구꽃 핀 먼 마을을 가리키기만 한다. 시에서도 가장 빼어난 데가 바로 ‘요지행화촌(遙指杏花村)’ 부분인데 이는 곧 ‘맑은 소리가 한순간 뚝 끊어지는(然而止)’ 느낌을 주면서 여타의 모든 말들을 필요없게 만든다. 독자 스스로 시의 여백으로 들어가 상상의 날개를 펴는 희열에 젖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 시는 천년 넘게 사람들에게 거듭 읊어지면서 사람들 마음속에 ‘행화촌의 술’을 각인시켰다. 물론 분주 회사에서는 서기 830년경 시인이 병주(幷州, 지금의 타이위엔)를 거쳐 남으로 돌아갈 때 지은 시라고 하지만 시에 나오는 행화촌이 지금의 술 회사가 있는 분양 행화촌이란 확실한 근거는 없다. 실제 학계에서는 시의 행화촌은 시인이 그린 상상의 마을이지 특정 마을이 아니란 주장도 만만치 않다. 그렇지만 신선을 좇는 이들이 청학동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애주가들 또한 이 각박한 세태에서도 ‘꿈의 술 마을’ 같은 행화촌이 지상에 존재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따라서 오래전부터 중국의 여러 지방에서는 자기네의 행화촌이 ‘청명’의 그 행화촌이라는 주장을 펴왔는데 대표적으로 열거되는 곳만도 열 군데가 넘는다.

- 시인 두목의 초상
- 시인 두목의 초상

‘행화촌’ 브랜드 가치 1조원 육박

분양현 행화촌의 원래 이름은 무림보(茂林堡)였다. 서쪽으로는 여양산맥(梁山脈)에 의지하고 동쪽으로는 분하(汾河)에 임해 있는데 자연 풍광이 거친 편이다. 당대에 보(堡) 옆에 자하산록(子夏山麓)이 있어서 살구나무 식목사업을 했다. 그 너비가 사방 10리가 될 정도로 넓었기에 ‘푸른 나무가 천 그루요, 살구나무가 만 그루’란 말이 생겨났다. 봄날이면 꽃이 만발하고 향기가 진동하였는데 마을 이름을 행화촌으로 바꾼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그러나 여러 차례 자하산이 홍수에 쓸리면서 행화촌의 그 많던 살구나무도 다 사라졌다.



남북조(서기 550년) 때부터 이곳에는 술을 만들던 소주방이 있었으며 당대에는 60~70집으로 늘어날 정도로 번성했다. ‘술항아리에는 색과 향이 깊어 가고 거리 곳곳에는 비취색 주렴이 걸렸다’는 시구며 ‘술의 영예가 높으니 제왕에서부터 서민까지 꽃피는 달밤이면 다투어 술 마시고 즐겨 놀았다’는 기록도 이런 분위기에서 유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49년 이후 중국 정부는 종전의 양조장들을 통합한 진유공사(晉裕公司)를 사들여 현재와 같은 규모의 분주 회사로 발전시켰다. 국가에서 전액 투자하여 세운 ‘산서 행화촌 분주 그룹’은 분주와 죽엽청주(竹葉酒)를 주력 제품으로 하면서 연간 5만 톤의 배갈을 생산하는 중국 최대의 술 회사 중 하나다. 그룹 산하에는 22개의 자회사가 있으며 전체 직원 수는 8000명에 이른다.



회사가 지니고 있는 ‘행화촌’ 및 ‘죽엽청’ 두 개의 이름난 브랜드는 2006년 ‘중국 500대 최고 가치 브랜드’로 선정되었으며 ‘행화촌’ 하나의 브랜드 가치만도 47억7600만 위안(한화 약 95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오늘날 우리가 시중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분주 회사의 배갈 상표로는 ‘분주’ ‘행화촌’ ‘분(汾)’ 등이 있다.



1952년 개최된 제1회 전국주류평가회에서 금장을 받아 가장 먼저 ‘국가 명주’의 반열에 들었으며 ‘중국 8대 명주’의 영예도 가졌다. 이후 2회, 3회, 4회, 5회 대회에서 연속 금장을 받아 마오타이, 루저우(瀘州)와 함께 전 대회 금장을 받는 기록을 세웠다. 특히 1963년 제2회 대회에서는 자매 상품인 죽엽청주와 함께 나란히 국가 명주의 영예를 안았다. 참고로, 죽엽청주는 다양한 약재를 넣어서 만든 보건주(保健酒)이기 때문에 배갈의 분류에 들지 않는다. 



행화촌의 술이 왜 좋은가? 우선 손꼽을 수 있는 것이 좋은 물이 있다는 점이다. 마을에는 옛 우물들이 여럿 있는데 이 우물물은 예부터 맑고 투명하며 이물질이 없고 삿된 맛이 없다고 소문이 났다. 심지어 이 물로 밥을 지으면 끓어 넘치는 일이 없으며 그릇을 닦으면 녹이 슬지 않는다고도 한다. 이곳 사람들은 이들 우물 중에서도 가장 유서 깊은 우물을 하늘이 준 것이라 하여 ‘신정(神井)’ 혹은 ‘선정(仙井)’이라고 부르며 자랑스레 그에 얽힌 전설을 들려주기도 한다. 행화촌의 지하에 있는 단물의 샘을 만나려면 일정한 깊이 이상 파 들어가야 한다. 신중국 건국 후, 행화촌 분주 회사는 여러 개의 새로운 우물을 팠으며 그 물들은 모두 화학적인 수질검사를 거쳤다. 그 결과 수질이 모두 우수했으며 물에 포함된 성분들은 술을 만들기에 지극히 좋은 것으로 밝혀졌다.

- 두목의 시 <청명>의 내용을 그린 시화(왼쪽)와 <수호지>에도 나오는 양산박의 행화촌.
- 두목의 시 <청명>의 내용을 그린 시화(왼쪽)와 <수호지>에도 나오는 양산박의 행화촌.

‘청증2차청’이라는 독특한 양조기술

물과 함께 분주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술의 원료가 되는 ‘일파조 고량(一把高粱)’이라는 수수다. 진중평원(晋中平原)에서 생산되는 이 수수는 ‘일파조(한 줌이라는 뜻)’란 말 그대로 낱알이 매우 크고 통통할 뿐만 아니라 껍질이 적게 나오는 것으로 유명하다. 다량의 녹말(66% 정도)을 함유하고 있으며 영양이 풍부한 데다 가마에 찐 뒤에도 차지지 않으며 날 맛이 없는 것으로 평이 나 있다.



분주를 빚을 때는 보리 누룩과 함께 청치국(靑麴)이라는 완두콩으로 만든 누룩을 쓴다. 완두 누룩은 그 풍미가 맑고 향기로운데 입에 넣으면 쓴맛이 느껴진다. 가운데를 잘라보면 청백색을 띤다.



분주가 명주가 된 데는 이러한 자연 혜택 외에도 더 중요한 요인이 있다. 즉 오랜 세월 이어온 전통에 사람들의 지혜가 보태져 이루어진 독특한 양조기술이 그것이다. 분주를 만들 때 사용하는 이 특별한 기법을 흔히 ‘청증2차청(淸蒸二次淸)’이라고 하는데 이 기법의 특별한 점은 매번 일정량의 새 원료를 투입한다는 것이다. 즉 원료를 찌는 것이 한 차례요 발효가 두 차례요 술 받기가 또 두 차례다. 시루에서 찐 원료를 꺼내 식힌 뒤에는 누룩을 보태서 땅속의 항아리에 넣어 묻어둔다. 발효 후에 꺼내 증류를 하며 이때 생긴 지게미는 또 묵은 술과 누룩을 섞어 다시 발효시킨다. 술을 발효시킬 때는 전통적인 해묵은 항아리(地缸)를 쓴다. 이렇게 두 차례 증류과정을 거쳐 얻은 술은 배합과정을 거쳐 완성품으로 나온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를 지은 나관중(羅貫中)은 산서 사람이다. 익살맞은 분주 마니아들은 그가 삼국지를 쓸 때부터 이미 행화촌 분주에 대한 광고를 계획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소설 앞머리에 나오는 그 유명한 구절 때문이다. ‘말하길 천하가 합하여 오래되면 나누어지게 마련이고 오래 나뉘어 있으면 반드시 합하게 된다(話說天下合久必分,分久必合).’ 이 구절을 빌려 분주가 만든 카피가 바로 ‘술 마실 땐 꼭 분주를, 분주는 꼭 마셔야 해(喝酒必汾,汾酒必喝)’이다. 必分과 必汾 그리고 必合과 必喝의 중국어 발음이 똑같다.



행화촌 분주 회사는 중국에서도 이름난 공원 스타일의 공장이다. 회사가 배갈 기지를 건설할 때부터 작심하고 그렇게 구성한 것이다. 공장 부지 안에 드넓은 호수와 잔디밭, 울창한 숲이 있는가 하면 술 박물관과 국가문화재로 지정된 옛 시대의 양조장 유지(遺址)도 있다. 회사에서는 이 전체를 엮어 ‘술 문화 관광단지’로 꾸몄는데 날마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와 분주의 역사를 익히고 술 제조 과정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자신들의 유구한 문물에 자긍심을 갖는다.

 

* 최학 소설가 · 우송대 교수는...

필자 최학 교수는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고, 1979년 한국일보 장편소설 공모에 역사소설 <서북풍>이 당선되면서 큰 주목을 받은 중견 소설가다. 대표작으로 <서북풍>, <미륵을 기다리며>, <화담명월> 등이 있으며, <배갈을 알아야 중국이 보인다>, <니하오 난징> 등 중국 관련 저서도 있다. 현재 우송대 한국어학과 교수로 많은 중국인 학생들을 가르치며 한·중 양국간 교류에 일조하고 있다. 네이버에 ‘배갈, 白酒의 향과 맛을 찾아 (
http://blog.naver.com/jegang5)’라는 블로그를 운영하며 배갈 대중화 작업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