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유럽 경제에 뉴 페이스(new face)가 등장했다. 7월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BOE) 총재에 취임하는 마크 카니(Mark J. Carney·48)가 그 주인공이다. 그의 국적은 캐나다다. 2008년 2월부터 올해 5월까지 캐나다 중앙은행 총재를 지냈다. 캐나다가 영국 연방국가 중 하나인 만큼, 카니가 영란은행의 수장이 되는 데 법적인 문제가 없다.

프로 스포츠에선 다른 팀의 핵심 선수를 거액을 들여 스카우트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한 국가의 핵심 자리에 외국인을 영입하는 것은 극히 드물다. 더구나 중앙은행 총재는 한 국가의 경제를 좌우하는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외국 국적을 가진 사람이 중앙은행 총재 자리에 앉는 것은 1694년 창립된 영란은행 역사상 처음이며, 전 세계적으로도 두 나라의 중앙은행 총재에 오른 것은 전례를 찾기 어려운 일이다. 카니는 처음 영란은행 총재 자리를 고사했다고 한다. 경제위기에 허우적대는 영국을 선뜻 맡을 강심장은 없을 것이다. 조지 오스본 영국 재무장관은 약 9개월에 걸친 설득 끝에 그를 영란은행 총재에 영입하는 데 성공했다. 전임 머빈 킹(Mervyn King·65)이 받은 30만5000파운드(5억3700만원)보다 많은 48만파운드(8억4500만원)의 연봉을 주기로 했다. 영란은행 총재 임기는 8년이지만, 카니는 5년 동안만 총재직을 맡겠다는 조건을 내걸고 수락했다.

카니는 이미 국제 금융계에서 스타로 꼽힌다. 미국 하버드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그는 투자회사 골드만삭스에 입사했다. 현장 경험을 쌓는 중간 그는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도 취득했다.

2010년 4월 개최된 G20 재무장관 및 중앙은행 총재 회의에 참석한 각국 장관 및 총재들.앞줄 맨 오른쪽이 마크 카니 영란은행 신임 총재.
2010년 4월 개최된 G20 재무장관 및 중앙은행 총재 회의에 참석한 각국 장관 및 총재들.
앞줄 맨 오른쪽이 마크 카니 영란은행 신임 총재.


캐나다 중앙은행 총재 때 리더십 돋보여
카니가 처음 공직과 인연을 맺은 것은 2003년 8월이었다. 캐나다 중앙은행에 지원해 4명의 부총재 자리 중 하나를 꿰찼다. 그리고 약 1년 후 캐나다 재무부 부장관에 임명되고, G7(주요 7개국) 정상회의에서 캐나다의 경제 정책을 소개하는 업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2007년 11월 캐나다 중앙은행으로 돌아온 그는 이듬해 초 중앙은행 총재에 오른다.

당시 위기의 조짐이 보이던 세계 경제는 그해 가을 ‘리먼 사태’를 맞아 나락으로 떨어졌다. 미국과 유럽, 아시아가 잇따라 경기침체와 재정적자에 허덕일 때, 캐나다는 선진 경제국 중 가장 성공적으로 글로벌 경제 위기를 겪었다. 중앙은행장으로서 과감한 금리 인하로 강력한 통화정책을 추진한 카니의 리더십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카니는 2009년 <파이낸셜타임스(FT)>의 ‘경제위기 극복을 이끌 50인’, 2010년에는 <타임스>의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잇따라 선정됐다. 또 2011년 G20(주요 20개국) 금융안정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돼 국제 금융을 이끌기도 했다.

영국 정부는 카니가 이런 능력과 경험을 영국 경제 회생에서도 보여줄 것으로 기대한다. 자존심을 구겨가면서 외국인인 카니를 오랜 구애 끝에 영입한 이유다.

카니는 캐나다 중앙은행 총재 시절 통화주의자의 면모를 보였다. 그는 취임 초 4%에 이르던 기준금리를 한때 0.25%까지 내렸다. 정부 재정을 푸는 대신 금리를 통해 유동성을 공급함으로써 수요를 살리는 정책을 선택했다. 이것이 현재 영국 정부, 특히 오스본 재무장관이 구상하는 경제 정책이다.

영국은 경제위기 후 재정 긴축이라는 정책 기조를 줄곧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 성과가 신통치 않다. 지난 1분기 0.3% 성장률을 기록하며 트리플 딥(삼중침체)의 위기에서 간신히 벗어난 정도다. 이 때문에 긴축정책 무용론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달 영국 경제에 대한 정기실사 결과 발표에서 긴축을 완화하고 경제 성장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내용의 정책 권고를 영국 정부에 제시했다. 하지만 오스본 장관은 “긴축 포기는 득보다 실이 많다”며 반대 입장을 밝혔다. 그렇다고 대안 없이 IMF의 권고를 무작정 무시할 수도 없다.

보수당인 영국 정부는 카니 신임 총재가 케인스주의식 재정 지출 대신 양적완화(중앙은행이 채권을 사들여 시중에 돈을 푸는 통화정책)를 통해 경제회생에 나서기를 바라고 있다. 영란은행의 통화정책 권한을 확대해 카니가 마음껏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또 영란은행은 지난 6월 초 기준금리와 양적완화 규모를 동결함으로써 카니가 향후 금리 방향을 결정할 수 있도록 했다. 카니가 금리 인하 등 통화정책뿐 아니라 재정정책도 요구할 것이라는 예상도 있다. 그는 지난 5월 캐나다 몬트리올 상공회의소 연설에서 영국 등 유럽이 대담한 조처를 하지 않으면 일본 같은 ‘잃어버린 10년’을 겪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재정지출 확대와 금리 인하 등 경제 회생을 위해 모든 정책 수단을 동원하는 일본의 ‘아베노믹스(아베 정부의 경제 정책)’에 대한 찬성을 표명했다는 해석이다. 

영국의 중앙은행인 영란은행(BOE)의 총재에 마크 카니 전 캐나다 중앙은행 총재가 취임한다.
영국의 중앙은행인 영란은행(BOE)의 총재에 마크 카니 전 캐나다 중앙은행 총재가 취임한다.


카니, 파운드화 평가 절하 추진할 듯
파운드화의 평가 절하도 카니가 뽑아들 정책 가운데 하나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세계 최대 채권운용사 핌코의 파운드 포트폴리오부문 대표 마이크 에이미는 미국 경제전문방송 CNBC와의 인터뷰에서 “카니가 파운드화 절하를 선택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국과 일본 등이 자국 화폐 절하에 나선 상황에서 영국만 손 놓고 있을 수 없다. 또 영국 기업의 수출을 위해서도 어느 정도의 파운드 가치 하락은 불가피하다는 지적이다.

만약 이렇게 되면 일본 엔화에서 시작한 ‘환율 전쟁’이 파운드화와 유로화로 확산될 가능성이 있다. 또 영국이 지금까지의 긴축정책 기조를 완화한다면, 유럽 경제정책의 축이 독일의 의지와 상관없이 성장 쪽으로 선회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일부에선 영국의 기준 금리가 이미 0.5%로 낮은 상황이어서 카니 신임 총재가 사용할 수 있는 정책 수단이 많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또 카니가 적극적인 재정 정책을 요구할 경우, 오스본 재무장관이 이를 어느 정도 받아줄지도 관전 포인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