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와 공자가 주거니 받거니 대작한 ‘전설의 술’

<일러두기>

❶ 현대 중국의 인명 및 지명, 중국의 고유명사는 중국어 발음대로 표기했다. 단,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고유명사는 한자 독음대로 표기하였다.

 <예> 毛澤洞 마오쩌둥 西安 시안 / 長江 장강 杏花村 행화촌

❷ 술 이름의 경우에도 중국어 발음대로 표기해야 하나 우리에게 익숙한 술에 한해서만 그렇게 했다. 여타의 술은 발음이 어렵거나 의미 전달이 잘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에서 한자 독음으로 표기했다. <예> 茅台酒 마오타이주 五粮液 우량예 / 黃鶴樓酒 황학루주 劍南春 검남춘

❸ 신 중국 수립(1949년)을 기준으로 그 이전의 인명 및 지명은 한자 독음대로 표기했다. <예> 李白 이백 杜甫 두보 南京 남경

- 물고기 형태의 송하량액 술병.
- 물고기 형태의 송하량액 술병.



위대한 인물들이 역사상 동시에 나타나는 때는 따로 정해져 있다는 얘기가 있다. 그 주기가 200년이라고 했던가? 그 인물들이 시대만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만나 교분을 나누는 예가 적지 않은데, 이를 중국에서는 역사를 바꾸는 ‘성대한 만남’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서구에서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만남이 대표적이며 중국에서는 노자와 공자의 만남과 함께 이백과 두보의 만남이 그 예가 된다.



과연 기원전의 그 꿈같은 시대에 공자가 노자의 향리를 찾아가서 며칠 동안 이야기를 나누며 술잔을 주고받았다는 것이 사실일까? 후세 사람들이 지어낸 얘기라 해도 괜찮을 성싶다. 옛 이야기 속 인물 같은, 그러면서도 오늘의 우리네 삶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그 노인네들이 중국 시골의 한 숲 그늘에서 함께 술을 마시고 취해 놀았다는 전설 자체가 몽롱하면서도 어여쁘기 때문이다. 



유가와 도가는 근본부터 다르지만 노자를 존경한 공자가 일생 중 두 차례 직접 그를 찾아가 만났다는 기록은 여러 사서(史書)에 남아 있다. 이들 문적에 따르면 공자는 기원전 503년과 518년 두 번에 걸쳐 하남(河南) 녹읍(鹿邑)에 가서 노자를 만난 것으로 돼 있다. 노자가 기원전 571년, 공자가 기원전 552년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 첫 방문으로 치면 당시 노자는 53세, 공자는 34세였다. 열아홉 살 연장자에게 예를 올리며 공자가 배움을 청했고 노자는 제 고향 조집(棗集)의 좋은 술을 내어 그를 환대했다.



물론 두 사람의 이 만남 자체를 믿을 수 없다는 연구가들도 많다. 노자가 최소한 공자보다 100년 앞선 시대의 사람이라든가 노자란 인물 자체가 없었다든가 하는 주장에서 보면 이는 정말 우스개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아무튼, 노자를 만난 공자가 탄식하듯 말했다고 한다. “나는 새가 하늘을 나는 이치를 알고 물고기가 헤엄치는 도리를 알고 짐승이 들판을 뛰는 법을 알지만 용이 어떻게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에 오르는지를 알지 못하였네. 그런데 오늘 내가 노자를 뵙고 보니 이 이가 바로 용이로구나!”

- 원료를 찌고 꺼내 식히는 작업(위)과 완성품 검사.
- 원료를 찌고 꺼내 식히는 작업(위)과 완성품 검사.

노자가 태어난 ‘도교 발상지’서 생산

짜오지진(棗集鎭)이 있는 중국 허난성(河南省) 루이현(鹿邑縣)은 노자가 태어난 곳으로 도교 문화의 발상지로 일컬어진다. 그리고 오늘날 이곳에서 생산되는 중국의 국가 명주가 ‘송하량액(宋河粮液)’이다.



녹읍에는 예부터 손님맞이를 좋아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 풍습은 노자 당시에 이미 세상 널리 알려져 수레와 말의 왕래가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집집마다 조집에서 만든 술을 갖추어 놓고 손님을 접대했다고 하니, 노자 또한 공자가 찾아왔을 때 이 술로 그를 맞았을 것임은 어렵잖게 추측할 수 있다. 열국을 주유하는 과정에서 공자가 천하의 명주를 품평하는 일이 적지 않았는데, 그럴 때마다 조집주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것도 노자와의 이런 연분이 무관치 않을 듯싶다. ‘술을 마실 때 정해진 양은 없지만 난잡한 데까지 이르지는 않는다(惟酒無量 不及)’라는 논어에 나오는 처세의 잠언(箴言)도 조집주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 녹읍 사람들의 한결같은 말인데, 근거의 분명 불분명을 떠나 공자에게도 흠이 되는 일은 아닐 성싶다.



‘송하량액’을 생산하는 송하주업(宋河酒業)은 루이현 짜오지진에 본사를 두고 있는데, 회사의 대지 면적은 80만㎡에 달한다. 저우커우시(周口市) 관할에 드는 이곳은 안후이성(安徽省)과의 경계에 닿아 있다.



저녁 늦은 시각에 간신히 루이에 당도한 나는 다음 날, 술 회사를 찾아가기 전에 먼저 노자의 유적지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내륙의 외진 땅이지만 루이의 번화가는 사람들의 내왕이 바쁜 가운데 생동감이 넘쳤다. 번듯한 도로는 시원하게 사통팔달로 뚫려 있고, 거리에는 ‘세계노자대회’를 경축하는 깃발들이 만국기처럼 촘촘히 걸려 있었다. 노자대회가 어떤 것이냐고 택시 기사에게 물어보았지만 그 또한 내용은 모른 채 서너 달 전부터 이렇게 거리가 장식됐다고 말했다.



이른 시각인지라 거대한 노자상(像)이 서 있는 노자문화광장도 청소하는 인부들 몇몇이 빗질을 하고 있을 뿐 텅 비어 있었다. 멀리서 봐도 석상은 보는 이를 압도할 만큼 거대하다. 석상 가까이 있는 인부들의 육신은 그 발치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다. 무슨 돌을 어떻게 다듬어 저렇게 세울 수 있는가? 무조건 크게 해놓고 보자는 중국인들의 거대주의를 이곳에서 다시 보는 듯해 놀랍고 씁쓸하다.



광장에서 도로를 건너면 노자의 탄생지를 포함한 태청궁(太淸宮)이 있다. 길을 따라 들어가면 망월정(望月井)과 탄생 표지석을 만나게 되며, 그 너머에는 노자의 신위를 모신 태극전(太極殿)이 있다. 금빛 찬란한 의상을 걸친 전각의 노자상 또한 광장의 그것처럼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는다.



전설에 따르면 그 옛날의 녹읍은 지금과 같은 평지가 아니었다. 봉우리들이 하늘을 찌를 듯한 은양산(隱陽山)이 남쪽에 있어서 사람들은 햇빛을 보기 힘들었으며 곡식과 채소가 제대로 자라지 않았다. 녹읍에서 태어나고 여기서 공부를 한 노자는 어려서부터 이 산의 의미가 궁금했다. 어느 날 그는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학문을 토론하다가 깊은 밤중에 홀로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도중에 문득 방향을 잃고 발을 헛디뎠는데 몽롱한 의식 가운데 홀연 큰소리가 들렸다. “노군아, 산을 옮겨라!” 노자가 정신을 수습하고 보니 사람들이 노인을 부축하고 아이를 안은 채 황망히 북쪽으로 가고 있었다. ‘나 보고 산을 옮기라고?’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노자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혼신의 힘을 모아 채찍을 휘둘렀다. 그러자 곧 산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고 불길이 치솟았다. 마침내 은양산이 셋으로 쪼개져 넘어졌다. 다시 채찍을 휘두르자 한 덩이 산이 서북쪽으로 날아가고 다른 한 덩이가 동남쪽으로 날아갔다. 이날, 노자가 날려 보낸 산 중에 서북에 떨어진 것이 왕옥산(王屋山)이며 동남으로 간 것이 남악 형산(衡山)이었다.



루이 시내에서 송하 술 회사가 있는 짜오지(棗集)까지는 차로 30여 분 거리다. 2차선 도로는 좁고 울퉁불퉁하지만 길가에 키 큰 미루나무가 빽빽이 도열해 있는 광경은 장관이다. 마침내 이른 짜오지 마을. 대추나무가 많아서 이런 지명을 얻은 것 같은데, 그러나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황량한 들판과 하천을 파고 있는 굴삭기들뿐이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마을을 지나 들판 쪽으로 나서면 비로소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술 회사를 만나게 된다. 

- 루이현 노자문화광장에 서있는 거대한 노자상.
- 루이현 노자문화광장에 서있는 거대한 노자상.

노자를 신선으로 만들어줬다는 설화 전래

이곳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노자는 조집주를 마시고 도를 얻어 신선이 되었으며 <도덕경(道德經)> 5000어(語)도 이로써 이루었다고 한다. 명산대천을 유람하던 노자가 어느 날 불안한 가운데 고향을 떠올렸다. 그는 청우(靑牛)를 타고 급히 녹읍으로 돌아왔는데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처참했다. 오랜 가뭄으로 곡식들이 다 죽어 있었기 때문이다. 노자의 귀향을 안 백성들이 길거리에 나와 땅바닥에 머리를 치며 도움을 청했다. 마음이 급해진 노자는 먼저 청우를 시켜 황하와 회하(淮河) 사이에 큰 도랑을 파게 했다. 그러나 벌써 황하도 말라 있었다. 오직 우(禹) 임금이 목욕을 하고 신선이 됐다는 구룡정(九龍井)에만 물이 남아 있었다. 노자가 항아리의 물을 우물에 붓자 바닥에서 맑은 물줄기가 솟구쳤으며 이어 강을 가득 채운 물이 마을 앞으로 흘렀다. 금세 논밭에 오곡이 풍성해졌으며 이 물로 술을 빚자 그 맛이 감로수와 다를 바 없었다.



이후 사람들은 노자가 이 강을 보내주었다고 해서 ‘송하(送河)’라고 불렀다. 세월이 더 흐른 뒤, 송 태조(太祖)가 ‘送’과 ‘宋’은 소리가 같다 하며 ‘송하(宋河)’로 고치게 했으며 이때부터 녹읍 사람들은 조집주를 송하주라고 불렀다.



송하주는 춘추시대부터 있었으며 수·당 시대에 번성을 누렸다. 특히 서기 743년 당 현종이 직접 녹읍에 찾아와서 자신의 조상인 노자에게 제사를 지낼 때 송하주를 쓴 일을 계기로 그 이름이 전국에 퍼져 나갔다.



신 중국 수립(1949년) 직전, 조집 일대도 전쟁의 혼란을 겪었지만 스물여덟집의 양조장만은 그대로 남아 있었고 이들이 지역에서 가장 부자들이었다. 1968년 루이 지방정부는 송하주의 복원과 그 상업적 이용의 중요성을 깨닫고 국영 ‘녹읍주창’의 건설을 착수했다.



1989년 송하주는 제5회 전국주류평가대회에서 금장을 받아 ‘중국 명주’가 되면서 최고의 번성기를 누렸다. 그렇지만 90년대 후반에 이르러 송하주는 쇠락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었다. 국영기업이 가지는 폐쇄성과 그에 따른 시장 적응력의 부족이 가장 큰 이유였다. 해마다 매출이 떨어진 송하주는 2001년 거의 생사의 기로에 서 있었다. 최후의 길은 새로운 주인을 만나는 것뿐이었다. 



2002년 9월 중국 유수의 제약회사인 보인(輔仁)그룹이 주식의 85%를 장악하면서 민영화로 들어간 것도 그 때문이었다. 보인그룹은 과감히 회사 구조를 바꾸고 선진적인 경영이념을 도입하는 한편 우수한 관리 인재들을 영입했다. 그 결과 2004년 당시 3억8000만 위안을 기록하여 같은 업종 전국 18위에 지나지 않았던 송하주의 매출액이 2007년에는 7억5000만 위안으로 훌쩍 뛰었다.



그렇지만 아직 송하주가 나아갈 길은 멀고 험난하다. 마오타이, 우량예 등에 비하면 송하량액은 아직도 2류급 배갈이란 인상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2006년부터는 서봉주(西鳳酒)와 낭주(郎酒)가 송하를 추월하며 술의 전국화에 가속도를 붙이고 있는 형편이라 더욱 어려운 처지에 있다. 송하는 아직도 하남이라는 지역성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지역성의 탈피와 브랜드의 정리, 경쟁력 있는 디자인의 확보가 당면한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송하량액은 자신들의 술 광고에 한대(漢代) 또는 삼국시대의 영웅 장수와 전쟁 모습을 과감히 사용하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에도 상영되어 인기를 얻은 영화 <적벽(赤壁)>의 장면이 그대로 광고에 등장하는 것도 한 예다. 이러한 광고에는 어김없이 ‘공영천하(共天下)’ ‘분향송하(分享宋河)’라는 카피가 따라붙는다. ‘기업과 소비자가 함께 승리자가 되자’ ‘송하와 함께 영예를 누리자’는 뜻인데, 이 꿈이 실현되려면 송하 스스로 넘어야 할 산이 많은 것이다. 



송하량액은 지역에서 생산되는 수수를 원료로 하며 맑고 단맛이 도는 광천수를 쓴다. 수수와 같은 원료는 꼭 그 해에 생산된 것을 쓰며 동시에 질 좋은 밀로 누룩을 만든다. 누룩을 만들 때는 사람이 직접 발로 밟는 방식을 쓴다. 증류를 할 때도 전통의 기법을 쓰며 단계별로 적당량의 술을 받아 급수를 구분하여 창고에 넣는다.

- 역사 속 영웅들을 등장시킨 송하량액 광고.
- 역사 속 영웅들을 등장시킨 송하량액 광고.

배합 후 저장·숙성 거치는 양조과정이 특징

양조 과정에서 송하가 여느 술과 구분되는 점은 배합(블렌딩)을 먼저 하고 그 후에 저장·숙성한다는 점이다. 여타 술처럼 저장·숙성을 먼저하고 배합을 나중에 하는 것과 큰 차이가 있다. 술을 배합할 때는 5년 이상 숙성시킨 원주(原酒)를 일정량 섞는다. 그리고 어느 계절에 받은 술인가, 어느 구덩이에서 발효를 거친 술인가 등을 따져 서로 같지 않은 유형의 술을 섞는다. 이렇게 하면 서로 다른 술의 성격을 보완할 뿐만 아니라 넘치고 모자라는 부분도 다스릴 수 있다.



한 번 술을 받아내고 남은 원료는 넓은 데 펴서 잘 식힌다. 휘발산과 표면의 수분이 날아간 원료에 새 원료를 보태고 누룩을 뿌리면 다시 발효지에 넣을 수 있는 새 원료가 되는 것이다. 원료를 발효 구덩이에 넣고 나면 입구는 진흙으로 봉한다. 송하주의 발효 기간은 60일이다. 증류로 얻은 술은 상수리나무통에 담아 창고에서 묵힌다. 어둡고 건조한 저장고에서 조용히 10년 또는 그 이상의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 바로 저장·숙성이다. 이 과정을 통해 술은 제 몸의 화기와 잡맛을 씻어간다. 불의 힘으로 얻은 술 자체가 양기(陽氣)이며 어둠에 싸인 저장고는 음기(陰氣)다. 좋은 술은 이렇듯 음양의 조화 속에서 제 생명을 키워간다.  



송하에서 생산되는 상품들은 국가 명주인 ‘송하량액’ 계열과 하남 명주인 ‘녹읍대곡(鹿邑大曲)’ 계열 그리고 기타 계열로 구성돼 있다. 송하량액 중에서 최고급품은 ‘노자(老子)’라는 상표를 쓰고 있으며 그 다음 고가품으로는 ‘공영천하(共天下)’가 있다. 대표 브랜드인 송하량액도 5성급(星級), 4성급, 3성급으로 구분된다. ‘녹읍(鹿邑)’ 또는 ‘녹읍대곡(鹿邑大曲)’이라는 상표는 대개 저가 제품에 사용된다. 이들 제품들은 병당 5위안에서 15위안 정도로 하남의 서민 대중들에게 인기가 높다. 고가 제품들은 160위안에서 최고 600위안 정도로 구성돼 있다.







최학 소설가 · 우송대 교수는...

필자 최학 교수는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고, 1979년 한국일보 장편소설 공모에 역사소설 <서북풍>이 당선되면서 큰 주목을 받은 중견 소설가다. 대표작으로 <서북풍>, <미륵을 기다리며>, <화담명월> 등이 있으며, <배갈을 알아야 중국이 보인다>, <니하오 난징> 등 중국 관련 저서도 있다. 현재 우송대 한국어학과 교수로 많은 중국인 학생들을 가르치며 한·중 양국간 교류에 일조하고 있다. 네이버에 ‘배갈, 白酒의 향과 맛을 찾아 (
http://blog.naver.com/jegang5)’라는 블로그를 운영하며 배갈 대중화 작업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