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0년 5월 그리스가 유럽연합(EU)과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한 유럽 경제위기가 최악의 상황은 피했다고 대부분의 전문가는 말한다. 지난해 9월 유럽중앙은행(ECB)이 무제한 국채 매입 프로그램을 발표한 이후, 시장이 진정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해 초 7%를 웃돌던 이탈리아의 10년 만기 국채 금리는 지금 4%대 초중반으로 떨어졌다. EU와 IMF 등 국제 채권단은 2014년에 그리스가 플러스 성장을 기록할 수도 있다는 전망을 하고 있다. 하지만 유럽 경제의 정반대 모습을 보여주는 숫자들도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지난 3월 말 중간 경제전망 보고서에서 올해 1분기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미국은 3.5%, 일본은 3.2%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했다. 반면 유로화를 사용하는 주요국인 독일·프랑스·이탈리아의 성장률은 0.4%에 불과할 것으로 전망했다. 그마저도 독일(2.3%)을 뺀 프랑스(-0.6%)와 이탈리아(-1.6%)는 마이너스 성장률이다. 영국도 0.5%의 저성장을 예측했다. 때문에 누구도 유럽 경제위기가 끝났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최근 유럽 경제위기의 가장 큰 변수로 ‘정치의 불확실성’이 떠오르고 있다. 사진은 벨기에 브뤼셀의 유럽연합(EU) 의회.
최근 유럽 경제위기의 가장 큰 변수로 ‘정치의 불확실성’이 떠오르고 있다. 사진은 벨기에 브뤼셀의 유럽연합(EU) 의회.

‘숫자에 답이 있다’는 말도 있지만, 이런 상반된 지표만 보면서 유럽 경제를 전망하긴 쉽지 않다. 오히려 지금 유럽 경제의 가장 큰 변수는 경제정책을 추진한 정치의 불확실성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유럽 경제를 분석하고 예측하기 위해서 각국의 정치지형을 살펴야 하는 상황이다.

이탈리아는 지난 2월 말 총선을 치렀지만, 두 달이 되도록 정부를 구성하지 못하고 있다. 민주당이 이끄는 중도좌파 연합이 하원을 장악했지만,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가 이끄는 자유국민당 중심의 중도우파연합이 상원에선 제1당을 차지했다. 이런 상황에서 기성정치 타도를 외치며 제3당이 된 ‘오성운동’은 어떤 세력과도 연립정부를 구성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만약 연정 구성에 최종 실패하게 되면 오는 6월 이후 재선거가 시행될 가능성이 크다.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의 자유국민당이 32.4%의 지지율로 1위를 차지할 것으로 전망된다. 만약 그가 다시 권력을 잡는다면 마리오 몬티 총리가 2011년 11월 취임 후 경제관료로 구성된 내각을 이끌고 추진해 온 경제개혁 조치들이 폐기될 가능성이 크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는 지난 총선에서 재정적자 감소를 위해 거두어들인 재산세를 모두 환급하겠다는 등의 포퓰리즘 공약을 내세웠었다. 그가 이런 공약을 실천한다면 이탈리아 재정적자는 다시 늘게 되고, 이탈리아 국채 금리도 급등할 수 있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3대 경제 대국인 이탈리아가 만약 구제금융을 받는 상황에 직면한다면, 이전 그리스·스페인 때와는 다른 충격파가 유럽 경제를 강타하게 된다.

영국 내 비등한 EU 탈퇴 여론도 유럽 경제에 큰 부담이다. 영국 국민은 유로존 경제위기가 자국에 악영향을 주는 것에 대한 불만이 크다. 원래 영국에선 유럽 대륙에 대한 반감과 불신이 크기도 하지만, 경제·사회 정책을 시행할 때 EU 조약의 구속을 당하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EU 탈퇴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2015년 집권에 성공할 경우 2017년까지 EU 탈퇴를 묻는 국민투표를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2월 <파이낸셜타임스(FT)>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50%는 ‘탈퇴’를 지지했다. ‘잔류 지지’ 응답은 33%에 머물렀다.

캐머런 총리는 개인적으로 EU 탈퇴에는 부정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EU 집행위원회와 의회 등이 가진 권한을 좀더 가져오면 영국 내 반(反) EU 정서를 되돌릴 수 있다고 판단한다. 캐머런 총리는 이런 방향의 ‘EU 개혁’을 논의하기 위해 지난 4월12~13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정상회담을 가졌다. 메르켈 총리는 EU가 정치·경제적으로 보다 통합되기를 원한다. 두 정상의 이런 입장 차이는 향후 EU가 경제위기 탈출을 위한 해법을 추진할 때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왼쪽)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EU 개혁’을 논의하기 위해 지난 4월12~13일 정상회담을 가졌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왼쪽)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EU 개혁’을 논의하기 위해 지난 4월12~13일 정상회담을 가졌다.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 지지율 27% 불과
프랑스는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의 낮은 지지율이 문제다. 여론조사기관 TNS소프레스가 지난 3월 말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올랑드 대통령의 지지율은 27%에 그쳤다. 프랑스 국가경쟁력위원회는 지난해 11월 노동 유연성 강화와 소득세 삭감 등 22개 항목의 산업경쟁력 강화 보고서를 내놓았다. 하지만 이 가운데 프랑스 정부가 제대로 추진한 것은 사실상 없다. 최근엔 탈세 문제를 담당했던 제롬 카위작 전 예산장관이 해외계좌를 통해 거액을 관리해 온 사실이 드러나 도덕성에도 치명상을 입었다. 이 때문에 경제 정책을 추진할 동력이 갈수록 떨어진다. 외교 무대에서도 위세가 한풀 꺾였다. 올랑드 대통령은 지난해 5월 취임 초만 하더라도 메르켈 총리의 긴축 정책에 대항해 성장 정책의 필요성을 주장했었다. 하지만 최근엔 이런 목소리마저 제대로 내지 못하는 실정이다.

독일은 오는 9월 총선에서 메르켈 총리의 재집권이 유력하다. 현 정책을 유지할 수 있어, 정치적으로 가장 안정된 상황이다. 하지만 최근 ‘반(反) 유로’를 기치로 내건 정당이 나타나면서 정치 지형에 변화가 예상된다. 지난 4월14일 베를린에서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라는 정당이 탄생했다. 당 대표를 맡은 베른크 뤼케 함부르크대 교수는 “독일 납세자들이 남유럽을 구해주면서도 나치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며 “국민 스스로 어떤 화폐를 사용할지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AfD 지지자 중에는 메르켈 총리가 소속된 기독민주당을 지지했다가 유로존 정책에 회의를 느끼고 돌아선 사람이 많다. 이들이 세를 규합할 경우, 기민당은 총선에서 승리하더라도 안정적인 연정을 구성할 수 없게 된다. 현재로선 제1 야당인 사회민주당(SPD)과의 대연정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그런데 페어 슈타인브뤽 사민당 대표는 메르켈 총리의 긴축 정책에 반대하고 있다. 이 때문에 9월 총선 이후 메르켈 총리의 유로존 정책이 변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면서, 유럽 경제의 불확실성이 더욱 커지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