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러시아다. 위험한 곳에 수익이 있다.’ 세계 투자가들의 대(對)러시아 공략법의 명제는 이번에도 통했다. 지난 7월14일 러시아와 영국에서 동시에 진행된 러시아 국영 석유 기업 로스네프티 기업공개(IPO)에 세계 투자가들이 몰렸다.

BP가 10억달러의 주식을 매입했다. 말레이시아의 페트로나스가 5억달러, 중국 석유천연가스공사(CNPC)가 11억달러 상당을 매입했다. 신원을 밝히기를 거부한 한 투자자는 은행을 통해 30억달러의 주식을 매입해 최대 개인 투자자가 됐다. 영국 프리미어 축구단 ‘첼시’구단주이자 러시아 최대 부자인 로만 아브라모비치는 3억달러 상당의 주식을 매입했다.

특히, 영국 투자자들이 가장 많은 해외주식예탁증서(GDR)를 사들여 미국 투자자들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러시아에서는 최대, 세계 증시사상 5번째 규모인 로스네프티 IPO에는 11만5000여 명의 러시아 국민이 평균 16만루블씩 참여했다. 로스네프티는 IPO에서 대박을 터뜨린 셈이다.

세르게이 보그단치코프 로스네프티 사장은 7월16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G8(선진 공업 8개국) 정상회담에 러시아 기업인 대표로 참석한 자리에서 “46개국 투자자들이 로스네프티의 GDR를 앞 다퉈 사들였다”고 밝혔다. 그의 표정은 상당히 고무돼 있었다. 보그단치코프 사장은 “영국과 미국 측의 관심은 투자자들이 총 104억달러에 달하는 로스네프티의 IPO를 둘러싼 부정적 홍보에 흔들리지 않았음을 입증한 것”이라면서 “자신도 재산의 3분의1을 로스네프티 주식에 투자했다”고 말했다.

로스네프티의 IPO는 예상외로 투자 열기를 일으켰다. 당초 로스네프티는 대형 행사를 앞두고 시기를 늦추고 금액을 줄이는 방안까지 검토했었다.

일부 전문가들 사이에는 로스네프티가 러시아 국영기업이고, 이사 가운데 과반수를 러시아 정부가 임명할 뿐만 아니라, 재무구조도 불안해 해외 투자자들이 주식을 매입하기는 아주 부적절한 회사로 평가했다. 증시 관계자들은 “런던 증시에서 최소한 지난 5년 사이 최대 규모인 로스네프티의 IPO가 시기적으로 좋지 않다”면서 “시황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지난달에만 3건 이상의 유력한 IPO가 취소됐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더구나 로스네프티가 크렘린 당국의 박해로 투옥된 올리가르히(독점 재벌)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와 그가 소유했던 석유 기업 유코스로부터 최대 자산인 ‘유간스크네프테가스’를 훔쳤다는 ‘장물 논란’까지 나왔지만 이번 IPO를 볼 때 투자자들이 큰 신경을 쓰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유코스는 이번 IPO를 앞두고도 “7월19일로 예정된 로스네프티 주식의 런던 증시상장이 돈세탁을 위한 것”이라며 “증시상장을 막아 달라”는 소송을 런던 법원에 제기했다. 유코스 주주들은 영국 증권감독위원회(FSA)에 유간스크네프테가스 ‘소유권’ 문제를 이유로 로스네프티 IPO를 허용하지 말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별 변수가 되지 않았다. 로스네프티 측은 IPO를 예정대로 진행한다는 입장을 거듭 확인했다. 결과적으로 로스네프티의 판단은 옳았다.

한마디로 로스네프티의 이번 IPO는 국영기업이지만 유코스의 핵심 자회사였던 유간스크네프테가스 인수라는 ‘장물 논란’을 잠재운 셈이다. 결국 에너지를 갈구하는 수요국과 국제정치적 상황이 로스네프티의 모든 부정적 전망을 잠재웠다.

로스네프티는 러시아(Rossia)와 네프티(Nefti 러시아어로 석유라는 뜻)를 합쳐 만든 회사명이다. 러시아 에너지업계로는 ‘가스프롬’에 이어 2위다. 이런 기업이 IPO를 통해 100억달러 이상의 투자자금을 조달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각국의 대형 에너지업체가 수십억달러 규모의 지분 참여안을 제시해왔다. 이번 IPO는 런던과 모스크바에서 동시에 상장됐으며, 로스네프티의 공모가는 주당 7.55달러 선이었다. 당초 총 107억~110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예상돼 일본의 NTT도코모(1998년, 184억달러)와 이탈리아의 에넬(1999년, 170억달러)에 이어 IPO 사상 3번째 규모로 예상됐었다. 하지만 규모가 다소 축소됐다.

지분 참여하기 위해 세계 각국서 경합

IPO 이전 로스네프티와 지분 인수 협상을 두고 5~6개 사가 최대 지분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는 곳은 역시 ‘에너지 블랙홀’이자 ‘에너지 먹는 하마’로 떠오르고 있는 중국이었다. 중국석유천연가스공사(CNPC)는 약 30억달러 규모의 지분을 사들이려고 노력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CNPC는 이미 로스네프티와 석유 및 가스 공급에 관한 장기적인 협력관계를 체결했기 때문에 자본제휴가 성사될 가능성이 가장 큰 것으로 예상돼 왔다. 여기에 경쟁사인 중국 국영 시노펙도 로스네프티 지분 인수를 검토하고 나서는 등 가장 적극적인 모습이었다.

유럽 최대 석유업체인 영국의 BP, 싱가포르 정부 산하 투자회사인 테마섹도 10억달러 규모의 지분 투자방안을 연구 중이었다. 세계 18위의 에너지업체인 말레이시아의 페트로나스가 20억달러 규모의 지분 인수를 유력하게 검토하고 있었다. 이처럼 각국 에너지업체들이 로스네프티와 적극적으로 협상을 벌였던 이유는 푸틴 정부가 자원민족주의를 강화하면서 자원대국 러시아로의 개별적인 진출이 쉽지 않다는 판단에서였다. 로스네프티의 IPO를 계기로 러시아에 교두보를 확보하자는 것이다.

로스네프티는 1년 전만 해도 러시아에서 5위 정도의 석유회사에 불과했지만 지난해 푸틴 대통령이 유코스를 해체하면서 유코스의 핵심 자회사를 로스네프티가 인수하면서 급부상했다. 조만간 러시아 업계 1위를 차지할 가능성이 크다.

이번 로스네프티 IPO는 단순히 ‘이니셜 퍼블릭 오퍼링(Initial Public Offering)’이 아니라 ‘인터내셔널 폴리티컬 오퍼레이션(International Political Operation)’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돼왔다.

특히, 최근 에너지 확보 경쟁이 가열되는 가운데 이른바 ‘전략적 파트너’라는 명목으로 영국과 중국, 인도, 싱가포르가 적극적으로 로스네프티 주식 매입에 나서면서 IPO가 국경 없는 에너지 확보 전쟁으로 번지는 양상이었다.

러시아 정부의 태도도 로스네프티 IPO의 정치적 성격을 더욱 강화시켰다. IPO 날짜를 자국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리는 G8 정상회담 일정과 맞췄을 뿐만을 아니라, 자국 석유나 천연가스를 많이 사들일 나라에 투자 보장 각서까지 써주며 투자를 유치했다. 로스네프티 IPO를 둘러싼 러시아와 영국, 인도, 중국 등의 움직임은 현재 진행 중인 세계 각국의 에너지 확보 경쟁의 미니어처인 셈이다.

세르게이 보그단치코프 로스네프티 사장은 “회사가 세계 유수의 상장 에너지 기업으로 발돋움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강조했다. 로스네프티는 지난해 가즈프롬 지분 10%를 확보하면서 최소한 85억달러의 기채 부담이 생긴 상태다. 로스네프티 IPO에는 ABN 암로, JP 모건, 모건 스탠리 및 드레스드너 클라인워스 바셰르슈타인이 공동 주간사로 참여하고 있다. 이번 IPO가 러시아 권력의 상징인 크렘린궁의 지원을 받는 러시아 내 또 하나의 에너지 공룡기업 탄생의 모태가 형성된 것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