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재생 보증수표 … ‘아메바경영을 배우자’ 전영수

올 한 해 일본 재계의 최대 뉴스메이커는 이미 굳어진 분위기다. 지난 1월 법정관리에 들어간 JAL의 구원투수 이나모리 카즈오(稻盛和夫) 교세라 명예회장이 그 주인공일 확률이 높다. 실제로 지난 2월1일 정식취임 이전부터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뉴스의 관심 대상이 됐다. JAL의 오늘이 일본 경제의 내일일 수 있다는 위기감 속에 그의 행보가 갖는 의미가 그만큼 큰 까닭에서다.

동시에 그가 고안한 경영전략인 ‘아메바경영’도 주목을 받는다. <닛케이비즈니스>는 최근호에서 “JAL 재건 열쇠를 쥔 건 아메바경영으로, 이는 경영 재건의 보증서나 다름없다”고 보도했다. 복사기 회사인 미타(三田)공업을 비롯해 아메바경영을 도입해 파탄 직전에서 기사회생한 기업만 400개 사에 이른다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과연 기업 재생의 보증수표로 불리는 아메바경영이란 무엇일까.

아메바경영의 실체, ‘전원 참가 경영’

기업의 성장(Fat)은 불가피하게 유연성(Flexibility)과 신속성(Fastness)을 저하시킨다. 이른바 ‘3F의 딜레마’다.

이나모리 명예회장은 이에 대한 해법을 아메바에서 찾았다. 아메바는 단세포동물이다. 암수가 섞이지 않은 채 혼자서 무성생식한다. 모세포와 세포분열 결과 생긴 자녀세포의 염색체도 유전적으로 똑같다. 또 연체동물처럼 필요에 따라 분리·합체된다. 제아무리 거대기업이라도 아메바처럼만 움직인다면 3F의 달성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실험은 성공했다. 큰 덩치에 걸맞지 않은 유연·신속한 조직 시스템인 ‘아메바경영’은 일본이 낳은 가장 유명한 경영이론으로 평가받는다. 많은 대학에서 창조형 기업의 대표사례로 연구 중이다.

아메바경영은 소집단·부문채산제로 요약된다. 말단조직의 신축성을 최대한 보장하자는 취지다. 구성원 개개인의 강력한 열정을 살리기 위해 조직 형태는 비정형적이다. 아메바 조직의 인원수는 3~4명에서 40~50명 정도다. 평균으론 10명 안팎이다. “시점과 상황에 따라 최적의 조직으로 분할·통합돼야 제 기능을 발휘한다”는 그의 분석처럼 교세라의 아메바 조직은 수시로 세포분열을 일으킨다. 구성원도 자주 교체된다. 조직을 둘러싼 고정과 파괴가 일상적인 셈이다. 때문에 교세라 계열사인 KCCS매니지먼트의 모리타 나오유키(森田直行) 사장은 아메바경영을 “경영자뿐 아니라 사원 전체를 끌어들인 경영”이라고 설명했다.

제조업이라면 각 공정별로, 영업은 지역·상품별로 아메바 조직이 꾸려진다. 이익관리는 독립채산에 따라 각 아메바의 리더가 챙긴다. 이때 리더는 흑자를 위해 자발적으로 수익 창출을 해야 한다는 유인에 직면한다. 결국 교세라는 수천 개의 아메바가 합쳐진 조직이다. 아메바 조직은 매월 매출·경비를 조사해 채산표를 만든다. 그 차이가 이익이다.

이익을 노동시간으로 나눈 ‘시간당 채산성’이 세포분열의 근거로 작용한다. 시간당 채산성의 기본골격은 3가지다. 매출 증대, 비용 절감, 근로시간의 단축이 그것이다. 때문에 아메바 조직을 ‘프로핏 센터(Profit Center)’라고도 한다. 그가 정부 요청에 따라 JAL을 떠맡은 이후 “수입은 늘리고 비용은 줄인다는 기본원칙만 지키면 곧 정상화할 수 있다”며 강한 자신감을 드러낸 것도 아메바경영의 핵심파워를 믿기 때문이다.

또 아메바 조직은 철저히 일·적성·효율·전체효과 중심으로 운영된다. 운영목적은 다양하다. 먼저 전원참가의 경영을 실현한다. 아메바 조직은 지혜의 원천을 멤버로 보고 모든 이에게 CEO가 될 동기를 부여한다. 공헌도는 채산으로만 측정된다. 아메바의 조직목표는 시간당 채산에 근거한 부가가치 창출뿐이다. 아메바끼리는 거래·협력관계인 동시에 라이벌이다. 경쟁유발을 위해 채산을 나타낸 그래프가 작업현장 곳곳에 붙어있다. 투명경영의 실현도 가능하다. 조직을 나누면 회사의 구석구석을 볼 수 있다. 좀 복잡해진다 싶으면 또 세포분열이다. 이때 각 아메바의 매출·경비·시간 집계는 더 정확히 파악돼 의사결정은 한층 신속해진다. 교세라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이 상하 조화로운 건 이 때문이다. 리더 육성 역시 효율적이다. 사장 의식을 갖고 대기업병(病)을 최소화할 수 있어서다.  

아메바경영은 몇 가지 조건하에 시너지를 낸다. 가장 중요한 게 기업 내부의 신뢰관계다. 아메바 조직은 단순한 이익관리법이 아니다. 전원 참가 경영을 위한 하나의 방법론이다. 채산만 갖고는 모든 직원의 참가경영이 불가능하다. 아메바는 신뢰가 생명이다. 노력이 이익으로 이어진다는 신념과 서로가 경영 공동체의 멤버라는 인식 공유가 필요하다.

경영수치에 대한 집착도 필수조건이다. 목표에 대한 경영자의 진지한 집착과 추구가 없으면 현장의 지혜는 솟아나지 않는다. 아메바경영은 경영자가 힘든 제도다. 피드백 시스템도 필수다. 신속한 경영수치 전달로 현장의욕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리더는 탄력적인 분열과 통합을 통해 조직을 최적화시킬 필요가 있다.

아메바경영은 지금도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제조업 외에 유통·서비스 업체 등에 벤치마킹돼 급속도로 확산 중이다. 업태와 규모를 넘는 인기절정의 기업 모델로도 자주 소개된다. 어떤 환경 변화에도 대처 가능토록 자율적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점 때문이다. 물론 업종·시대·규모에 따라 수정 적용되지만, 교세라의 보편적인 경영철학은 변함이 없다. 현재 아메바경영을 도입한 회사는 300개 사가 넘는다. 유니차임 등 굵직한 회사도 많다. 이나모리즘을 설파하는 교육기관인 ‘세이와쥬쿠(盛和塾)’의 회원만 5000명에 육박한다.

 

‘이나모리즘’은 철학이 있는 도덕경영

“나는 철학이 있어 성공했다”는 말처럼 이나모리즘은 일종의 경영철학이다. 확고한 기업이념과 철학, 그리고 미래를 읽는 능력과 결단력이 오늘의 교세라를 만들었다. 그의 철학에는 일과 사람, 조직, 리더십, 경영, 성공의 본질과 의미가 명확하다. 특히 리더의 뚜렷한 성격 규정이 중요하다. 그는 “기업의 흥망성쇠는 기업가의 사람됨에 달렸다”며 “바른 길을 걸으며 이윤을 추구하겠다는 신념과 철학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기업가란 경마장에 나온 말처럼 자신을 믿고 마권(주식)을 산 사람(주주)을 위해 죽어라 달려야 한다는 생각이다. 유통기한 속이기 등 한때 일본에서 고객 기만 문제가 불거졌을 때 “철학 없는 사람은 물러가라”고까지 했다.

그는 CEO가 가져야 할 경영원칙으로 ‘열정(PASSION)’을 제시했다. 열정이 결국 잠재력 발휘를 가능케 한다는 경험에서다. 열정은 또 7가지 머리글자로 나뉜다. 이익(P)·야망(A)·진실(S)·용기(S)·혁신(I)·낙관(O)·인내(N) 등이다. 판매 극대, 비용 극소로 이익을 실현하고, 잠재력이 발휘될 만큼 야망을 가져야 한다. 상대방을 배려해야 둘 다 승리하며 비겁한 태도는 절대금물이다. 밝은 내일을 위해선 창의력을 지니고 희망과 꿈을 가질 것을 권한다. 무엇보다 꾸준히 일하라는 게 핵심 경영철학이다.

성공이란 ‘능력×노력×태도’의 함수이며, 우선순위는 태도·노력·능력이라는 내용도 의미하는 바가 크다. 삶을 대하는 태도만큼 결정적인 성공변수도 없다는 얘기다. 이 내용은 <교세라 철학>이란 책자로까지 엮어졌다.

이나모리 회장 자신도 사후를 걱정해 평소 임직원에게 ‘이나모리즘의 철저한 전승’을 유언처럼 강조한다. 이를 위해 ‘이나모리식 12대 경영 항목’을 선정해 직원들에게 교육한다. 이때 기업의 안정과 혁신의 양립은 ‘팽이이론’으로 설명된다. 구심력과 원심력을 적절히 섞어 시대변화에 대응하자는 논리다. 팽이를 계속 돌게 하려면 원심력(다각화·혁신)이 필요하며, 쓰러뜨리려는 외부 환경 변화는 구심력(경영철학)으로 제어하자는 메시지다. 이는 목표와 비전의 명확한 좌표축을 선정한 후 다각화를 통해 ‘선택과 확대’를 추진해왔던 교세라의 성장사와 맥을 같이한다. 

교세라는 다각화경영으로 성장을 반복해왔다. 일각에선 인수·합병(M&A)이란 변칙적 방법으로 돈을 벌었다고 비난하지만, “도의에 따라 회사를 떠맡았을 뿐 결코 사냥꾼처럼 행동하진 않았다”는 이나모리 회장의 말처럼 무리수는 거의 목격되지 않는다. 실제로 적자기업을 M&A해 흑자로 바꾼 뒤 자사 사업부문과의 시너지효과를 유도했다는 평가가 많다. 미래가 불확실한 부실기업을 확고한 경영철학과 아메바경영의 접목을 통해 튼실한 기업으로 변신시켰다는 것이다.

가령 M&A 후 감원 없는 고용보장을 통해 조직원의 역량 발휘를 이끌어냈다. 반면 ‘적자는 죄악’, ‘가격결정이 경영’이란 교세라식 경영방침으로 흑자를 만드는 데 집중했다.

성공을 가져오는 ‘이나모리’의 6대 인생철학

① 누구에게도 지지 않도록 노력하라 → 지속적 연마. 불평할 시간에 노력

②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라 → 겸손하면 복이 들어와. 영혼의 정화 기능까지

③ 반성하는 날을 보내라 → 자신의 행동·마음가짐을 점검·자성해야

④ 살아있는 걸 감사하라 → 사소한 것에도 감사하는 마음 길러야

⑤이타심·선행을 쌓아라 → 선을 쌓을수록 보답도 따라와

⑥ 감정적인 고민은 털어버려라 → 불평·후회하지 말고 정신을 수양해야

‘이나모리’식 12대 경영 항목

① 사업 목표·의의를 명확히 하라

② 구체적인 목표를 세워라

③ 강렬한 소망을 가슴에 품어라

④ 누구에게도 지지 않도록 노력하라

⑤ 매상은 최대로, 경비는 최소로 하라

⑥ 가격을 정하는 게 경영이다

⑦ 경영은 강력한 의지로 정할 것

⑧ 투혼을 불사를 것

⑨ 용기를 갖고 일을 대할 것

⑩ 항상 창조적인 일을 할 것

⑪ 가능한 성실히 임할 것

⑫ 밝고 전향적인 희망을 품을 것

아메바경영의 메리트

△ 채산성에 대한 의식 고양

△ 사원경영으로의 참가의식 함양

△ 말단업적까지 파악 가능

△ 신속한 사내문제 주지·대책

△ 아메바리더의 경영마인드 고취

인물탐구

이나모리 카즈오 명예회장

27세에 창업한 벤처 1세대… ‘철학자’ 별명

마쓰시다 고노스케, 혼다 쇼이치로와 함께 ‘일본의 3대 기업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거물이다. ‘경영의 신’으로 불릴 만큼 일본 재계에서 차지하는 지분이 상당하다. 도덕·정도경영을 강조하며 교세라를 일찌감치 알짜배기 그룹으로 키웠다.

그의 청춘은 우여곡절로 점철돼있다. 되레 실패의 연속이었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하다. 시험에 실패하고, 결핵을 앓았으며, 전쟁으로 삶을 움켜쥘 희망조차 없었다. 집은 가난했다. 6명의 형제자매가 있었지만 한가하게 공부할 형편이 아니었다. 취직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일자리가 필요했지만, 어디에도 그의 자리는 없었다. 회고록에 따르면 “나는 어떤 것을 해도 잘 안 된다는 자학에 시달렸다. 그때 엉뚱한 선택을 했다면 내 인생은 잘못됐을지도 모른다”고 밝혔다. 실제로 불평불만을 가진 채 ‘인텔리 야쿠자’를 생각한 적도 있었다고 회고한다.

그래도 길은 있었다. 1955년 우연찮은 기회에 초자 회사인 쇼후공업에 입사했다. 한때는 일본에서 최초로 고압초자를 만든 우량회사였다. 하지만 젊은 이나모리에게 직장 운은 그게 다였다. 이미 법정관리나 다름없을 만큼 경영 상태는 악화됐다. 직장동료는 떠나갔고, 월급도 밀리기 시작했다. 의지할 데라곤 연구실뿐이었다. 외롭고 고독했지만, 업무에 재미를 붙였다. 고진감래라고 TV 수요가 늘면서 그의 연구는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입사 2년 후엔 개발팀 지휘까지 맡았다. 쇼후의 세라믹 수요는 납기를 대기 힘들만큼 급증했다. 그런데 문제가 터졌다. 회사가 대규모 춘투에 휘말렸다. 이때 그의 부서만큼은 공멸을 이유로 춘투 참가 대신 공장에 남아 납기를 지켰다. 그 결과 그의 명성과 기술력은 나날이 높아갔다. 결국 지인들의 권유와 출자로 1958년 ‘교토세라믹’을 창립했다.

교토세라믹은 창업 초기 마쓰시타전기로부터 수주를 받아 사업했다. 성장을 위해선 시장 확대가 불가피했지만 무명의 교토세라믹에겐 진입장벽도 실로 대단했다. 돌파구는 해외진출이었고, 갖은 노력 끝에 1964년 시장 공략에 성공했다. 마찌코바(시내에 위치한 작은 공장)로 시작한 회사는 쑥쑥 성장했다. 1966년엔 어렵기로 소문난 IBM표준에 합격해 글로벌 경쟁사를 제치고 IC(집적회로)용 기판 2500만 개를 수주했다. 당시 임금 인상을 둘러싼 갈등도 있었지만, 이타정신에 근거한 파트너십 강화로 이를 해결했다.

아메바 조직은 이때 생겨난다. 같은 꿈을 향한 동지적 유대감을 횡적관계로 뿌리내리게 했다. 그의 말버릇인 ‘동지·동료’의 잦은 사용은 이때부터다. 1971년엔 거래소 상장까지 끝냈다. 하지만 호사다마였다. 오일쇼크는 수주 격감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의 대가족주의는 지켜졌다. 임금동결은 있어도 감원은 없었다. 위기는 곧 극복됐다.

창립 20주년인 1979년은 회사의 전환기다. 정보통신기기 사업의 기술토대가 되는 회사를 인수했기 때문이다. 이후 1982년 교토세라믹에서 교세라로 사명을 바꾼다. 이듬해엔 세계 최초로 일렉트로닉스 카메라를 만든 야시카까지 합병했다. 1984년 새 기회가 다가왔다. 전기통신 사업의 민영화가 허용되면서 DDI(第2電電)를 설립했다. 1987년엔 시외전화 서비스 개시에 성공했고, 경쟁 3사 중 1위에 올라섰다. 이동통신에도 도전장을 냈다. 1989년 세계적인 종합전자부품 메이커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미국의 엘코그룹과 AVX를 인수했다. 이후 2000년 국내 2위의 종합전기통신회사인 KDDI를 탄생시켰다. 오늘의 교세라그룹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은혜를 갚자’는 책임감은 그를 다양한 활동가의 길로 이끌었다. 국경을 넘는 활발한 사회활동을 펼쳤다. 지원이 필요한 사회사업(학술·문화·지역사회 등)에도 열심히 참가했다. 이나모리재단이 발족돼 과학자를 대상으로 한 ‘교토상’을 만들고, J리그의 교토퍼플상가도 지원했다. 모교에 대한 보답으로 거액을 기부하기도 한다. 경영철학 전수를 이유로 1980년 시작된 조그만 연구회는 오늘의 ‘세이와쥬쿠(盛和塾)’로 발전했다. 1991년엔 전국조직으로까지 확대된다. 세이와쥬쿠는 지금도 경영자들로 문전성시다.

1997년 그는 출가를 감행해 세간의 화제로 떠오른다. 부와 명예보단 선행을 원했던 결과다. 건강상의 이유로 집에 돌아오긴 했지만, 여전히 수행에서 행복감을 느끼고 있다. 언론은 이런 그에게 ‘철학자’란 별명까지 붙여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