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전 세계가 고유가로 신음하고 있는 가운데 산유국 러시아는 넘쳐나는 오일머니 덕에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오히려 막대한 오일머니가 유입되면서 외환보유고가 증가하자 돈 처리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비산유국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을 상황이 러시아에서 고스란히 펼쳐지고 있다.

러시아 정부가 내세우고 있는 외환 지출 우선순위는 외채 상환이다. 한편으로는 해외 주식 투자에 나설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최근 “국제 채권국 모임인 ‘파리클럽’에 러시아가 지고 있는 부채를 연내 모두 청산하겠다”고 밝혔다. 러시아는 부채를 서둘러 갚아 이자 부담을 덜기 위한 것이다. 러시아는 지난해에도 파리클럽에 졌던 채무 150억달러를 조기 상환했었다. 2008년으로 돼 있던 상환 기일을 앞당겨 갚는 대신 20억달러 정도를 경감 받았다. 러시아는 현재 파리클럽에 290억 달러의 부채를 지고 있다.

러시아는 지난해 2억3000만 배럴의 원유를 수출, 847억달러를 벌어들였다. 휘발유 등 석유제품을 포함할 경우, 수출액은 무려 1180억달러다. 러시아 전체 수출액 2453억달러에 무려 절반에 육박하는 액수다. 산유국 프리미엄을 누려도 너무 누리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다 천연가스 수출액(316억달러)까지 포함하면 전체 수출의 61%를 석유·가스가 차지한다.

러시아 재무부가 밝힌 국가 부채는 총 1100억달러 수준이다. 하지만 현 추세라면 2007년이나 2008년까지 이를 전액 상환할 수 있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상하고 있다.

러시아는 2004년부터 유가 하락에 대비, 석유 수출세를 늘리면서 ‘특별안정기금’을 조성해왔으며, 이를 통해 막대한 통화 유입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동시에 외환보유고를 늘려왔다. 특별안정기금은 이미 600억달러를 넘어섰다. 러시아는 지난해 말부터 외환보유고가 1684억달러를 넘어서며 세계 4위 외환보유국으로 등장하면서 순채권국으로 전환됐다. 러시아 중앙은행은 지난 4월 말 기준 회환보유고가 2257억달러를 기록했으며, 이는 옛 소련과 러시아를 통틀어 역대 최대라고 밝혔다. 또 러시아 중앙은행은 연 55%에 달하는 외환보유고 증가율로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외환보유율 증가를 기록하고 있다고 공개했다.

일간지 <이즈베스티야>는 지난 5월5일자에서 “동기간 외환보유고가 2180억달러인 한국을 밀어냈다”며 “러시아 앞에는 중국(8750억달러), 일본(8320억달러), 대만(2570억달러) 등 3국의 아시아 호랑이만 남아있다”고 보도했다. 1998년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선언했던 러시아는 고유가 덕에 완전 딴 나라가 됐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최근 “러시아가 디폴트를 선언했던 8년 전과는 본질이 다른 경제 위기에 처했다”며 “막대한 오일 머니로 불어난 특별안정기금 운용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기금 규모가 커지자 각종 이익단체들이 정책지원을 위한 로비활동을 벌이는 등 기금 운용 방안을 두고 고민에 빠졌다.

정부 내에서도 기금운용 방안으로 ‘감세 정책에 나서자’는 미하일 프라드코프 총리와 ‘감세는 인플레이션을 유발한다’며 이를 반대하는 알렉세이 쿠드린 재무장관과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당장은 쿠드린 재무장관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특별안정기금을 조성한 이후에도 매년 물가상승률이 목표치보다 높았기 때문이다.

2004년과 2005년 물가상승률은 목표치인 10%, 8.5%를 넘어섰고 올해 1분기 물가상승률도 이미 5%에 달했다. 러시아는 올해 목표치인 8.5%를 기필코 달성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쿠드린 재무장관은 “물가안정이 정부의 첫 번째 과제”라며 “두 자릿수로 늘어난 물가상승률이 이자율을 높여 투자를 저하시킬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한술 더 떠 그는 “국채 상환 외에도 해외 주식 투자에 이 기금을 사용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지난해 말 오일머니를 인프라 확충과 빈곤층을 위한 의료시설 등 복지 예산과 교사와 공무원 임금 인상을 위해 쓰겠다며 4조2700억루블(약 170조원)의 예산안을 의회(국가두마)에 제출, 승인 받았다. 이는 그 동안 긴축재정을 유지했던 것과 달리 세출을 40%나 늘린 것인데 이를 두고 벌써부터 ‘2007년 총선과 2008년 대선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는 푸틴과 여권의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이라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오히려 고유가로 인한 문제 우려

하여튼 러시아는 고유가 혜택을 엄청나게 누리고 있는 셈이다. 세계은행은 최근 발표한 보고서를 통해 러시아의 무서운 경제 성장세를 “러시아는 옛 동구권 경제를 이끄는 폭주기관차”로 표현했다. 보고서는 이와 함께 1999년 3000만 명 이상이었던 러시아의 절대 빈곤층이 2002년 1300만 명 이하로 줄었다고 덧붙였다. 오일머니로 지갑이 두둑해진 것은 비단 일부 석유 재벌뿐만 아니다. 국민 1인당 평균 수입이 두 자릿수 이상(2005년 11%, 20006년 12% 예상) 오르며 고가의 전자제품과 외제차 구입에 나서는 중산층이 급증하고 있다. 이 때문에 전 세계 자동차 회사들이 경쟁적으로 현지 투자에 나서는 등 러시아는 자동차사의 각축장으로 떠올랐다.

유럽 경제학자들 사이에는 “러시아가 제2의 네덜란드나 베네수엘라가 될지 모른다”고 경고하고 있다. 1960~70년대 천연가스 개발로 호황을 누리던 네덜란드는 밀려오는 외화로 통화 가치가 급등하면서 기업의 대외경쟁력이 약화된 반면 소비 급증과 임금 상승으로 경제 활력이 급격히 저하되면서 극심한 사회불안을 겪었다. 베네수엘라도 석유 개발붐으로 1970년대 소비 풍조가 만연하고 쾌락주의가 판을 쳤다. 커피나 사탕수수 같이 부가가치가 낮은 농업분야는 유전 발견으로 관심에서 멀어졌다. 정치인들은 석유재원을 국가발전보다는 개인의 치부나 세력 확대에 이용했다. 승승장구하던 베네수엘라는 1980년대 유가가 하락하면서 경제가 엉망이 되면서 파탄 났다. 존 리트웍 세계은행 선임연구원은 “세제, 지출, 예산 등 러시아의 경제 체계는 과거 공산주의 시절처럼 매우 취약하다”며 “이런 상황에서 씀씀이만 늘렸다가는 이들 국가와 같은 전철을 밟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고유가로 부닥칠 수 있는 문제로 다음과 같은 문제를 꼽고 있다. 부정부패와 정경유착을 심화시켜 라이벌 이익집단 간의 심각한 정치 투쟁 야기, 착시 현상으로 관료들이 꼭 필요한 정책 시행 지연, 느슨한 재정 정책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우려 등이다.

실제로 러시아의 최대 고민은 인플레이션이다. 올해 1분기에 소비자 가격이 전년 동기 대비 5%나 상승, 올해 인플레이션을 8.5%로 끌어내리려는 정부 목표에 빨간불이 켜진 상태다. 인플레이션은 제조업 경쟁력을 약화시켜 가뜩이나 취약한 러시아 제조업 기반을 위축시킬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갖은 우려에도 러시아 경제는 승승장구하고 있다. 국제신용평가사인 피치의 에드워드 파커 전무는 “러시아의 부채 상환은 러시아 국가 신용등급을 올리는 데 일조할 것”이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