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침체가 세계의 미술 시장에마저 찬물을 끼얹었다. 그렇다고 미술계의 불씨를 아주 꺼뜨린 것은 아니다. 활발하지는 않지만 본격 활동을 위한 기지개를 켜려는 형국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한국 현대미술에 대한 관심이 싹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지난 10월25일~11월1일까지 1주일 동안 세계 미술계의 본고장 뉴욕의 화랑가를 다녀왔다.

중국·인도 미술 버블 ‘DOWN’

한국 현대미술 관심 ‘UP’

뉴욕의 화랑가라고 하면, 1980~1990년대에는 지금의 첼시 지역보다 훨씬 활발했던 소호 지역과, 19번가에서부터 27번가까지에 이르는 첼시, 미드타운 57번가와 애브뉴 5번가 선상에 위치한 일대, 업타운 고급 갤러리들 및 최근에 형성되기 시작하는 로우어 이스트사이드와 브루클린 덤보와 윌리엄스버그 지역 등을 꼽을 수 있다. 첼시와 소호의 갤러리들이 한창 주가가 오르고 있거나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는 예술가들의 작품을 선보인다면, 미드타운의 갤러리들은 확고한 기반을 다진 작가들을, 로우어 이스트사이드의 갤러리들은 신진들을 위주로 한 젊은 현대미술을 중점적으로 선보인다고 할 수 있다. 

소호의 땅값이 오르면서 밀려난 화랑들이 모여 세력을 이룬 첼시에는 300여 개의 갤러리가 있고, 첼시의 중심지역 중 하나인 25번가에는 국내의 아라리오, 가나아트센터, 국제갤러리 계열인 티나킴, 두산이 터를 마련했다. 여기서 이들의 역할은 기본적으로 상업화랑으로서의 전시 및 판매지만, 여기에 더해 국내 작가들의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운영 중인데 현재 두산에는 이형구, 정서진, 최우람 작가가 입주해 있다. 서울옥션을 계열사로 둔 국내 유수의 갤러리 가나는 뉴욕 경기 악화와 맞물려 판매 부진이 장기화되면서 철수설에 시달리고 있다.

아라리오에서는 국내에도 잘 알려진 중국 작가 유민준(Yue Minjun)의 ‘스마일전’이 내년 1월16일까지 열린다. 10월29일 오프닝 행사 때는 다른 갤러리와 달리 한적하기 그지없었다.

뉴욕 현지의 한국계 화랑들은 대부분 호경기가 끝나고 불경기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오픈을 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한국계 화랑의 오프닝 때는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젊은층이 대거 참석, 미술에 관심이 많고, 용돈이 궁한 학생들의 잔치가 되곤 한다.

오프닝 때의 파티는 작가가 누구냐, 초청 대상자들이 누구냐에 따라 파티의 콘셉트가 달라진다고 한다. 오프닝 때의 테이블 전략이 작가의 이미지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품들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테이블보의 디자인이나 색깔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뉴욕은 세계적인 대가들이 자신의 집으로 미술 관계자들을 초대해 종종 파티를 벌이곤 한다. 이 파티의 평가에 따라, 작가에 대한 각 미술관 및 화랑들의 대우 역시 달라진다. 대가들은 작품 활동뿐만 아니라 미술 비즈니스에도 능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내의 선화랑 관계사인 선 컨템포러리는 젊은 작가들의 현지 진출을 위해 시장조사를 활발하게 하고 있다. 선 컨템포러리는 선화랑 김창실 대표의 딸이 경영하는 곳으로 국내 전시 1년에 14번, 해외 아트페어 10번 참가를 목표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한국의 임영선 작가(경원대 교수) 전시회를 열었던 STUX에서는 11월14일까지 판 지오양(FAN XIAOYAN)을 비롯한 중국 작가 그룹전을 열었다. 첼시의 유일한(?) 사설 미술관인 첼시 아트 뮤지움도 ‘자연의 힘’ 이라는 테마로 대만계 뉴욕 거주 여성 작가인 마를린느 탱 유(Marlene Tseng Yu)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버블이 꺼졌음에도 중국 미술의 역량은 항구적으로 시스템화하고 있다. 1926년 뉴욕에 창립된 65번가에 위치한 중국문화원(China Institute) 역시 중국 미술 소개에 꾸준한 역할을 하고 있다. 9월24일~12월13일까지 ‘중국의 인간주의’라는 테마로 사진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움트고 있는 뉴욕의 미술 경기

뉴욕의 미술 경기는 아직 정상궤도에 진입하지 못하고 있다. 작년에 전문가들이 미리 경기 하락을 예측했음에도 그 속성상 리스크 헤징 차원이 아닌 투기성의 아트 펀드는 몰락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뉴욕 미술 시장은 침체돼 있음에도 여전히 활력을 잃지 않고 있다. 뉴욕에서는 컬렉션이 취미이고, 생활인 계층이 두텁기 때문이다.

뉴욕을 중심무대로 활동 중인 독립큐레이터 문인희씨는 “뉴욕의 미술 경기 하락은 거의 광풍을 일으켰던 중국과 인도 현대미술의 버블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고, 상대적으로 한국 현대미술에 대한 관심이 다소 증가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뉴욕 시장에서 한국 미술의 가능성에 대해선 여전히 부정적인 시각도 있다. 뉴욕에 거주하는 중국 제남 대학 미학박사인 하정화씨는 “한국 미술은 전시나 작가에 대한 크리티컬(critical)한 피드백이 매우 약하고, 제대로 된 비평이 없으니 시대를 이끌 사조가 사실상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중국 미술이 잠시나마 세계 미술의 주류로 등장할 수 있게 된 것은 두터운 작가층 및 메인랜드 차이나의 소장가들을 비롯한 전 세계에 흩어진 화교 경제권의 지원이 가장 주효했다”며 “중국과의 외교나 국제 비즈니스의 현실적인 관계를 중심으로 한 서양 소장가층의 후원 및 <아트 아시아 퍼시픽> 등과 같은 영문 미술잡지를 통해 중국 미술에 대한 진정성 있는 비평문화를 실현하려는 노력을 해왔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작년 세계 미술 시장의 침체기에도 불구하고 일부 중국 작가들은 여전히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하씨는 “중국 미술계 정보를 인용, 펀 정지에(Feng Zhengjie)의 경우 태국 왕실에서 대거 작품을 구입한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다.

이와 함께 뉴욕은 중국 및 인도 미술에 대한 허전함을 이슬람 예술에 대한 관심으로 달래고 있다. 이미 퀸즈 미술관과 첼시 미술관은 아랍 현대미술 그룹전을 성황리에 마친 상태고, 아시아 소사이어티에서는 10~11월 두 달간 <이란의 여성> 시리즈 영화가 상영됐다. 또한 파키스탄 현대 작가들의 회화, 입체 작품들도 전시되고 있다. 첼시 지역인 27번가에 있는 선다람타고르 갤러리에서는 ‘동시대 아랍 미술(Contemporary Arab Art)’이라는 테마로 전시회가 열렸다.

첼시 지역에 있는 토마스 어반(Thomas Erben) 갤러리의 토마스 어반은 “뉴욕 미술계는 물갈이가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며 “2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인도 작가들의 작품이 인기였으나, 작년 뉴욕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가라앉았고, 인도 자체 미술 시장이 이들을 떠받치고 있다”고 분석했다. 국내 미술 시장 기반이 약하면, 세계 경기 흐름에 의해 자국 작가들의 작품이 부정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뉴욕 미술 시장은 작년 경기 침체 이후 철저하게 상업 작품만을 다루는 시장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게 뉴욕 미술계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부분적으로는 불경기 돌파를 위해 고급 상업화랑이 실험적인 작품을 선보이는 경우도 있다. 로버트 밀러 갤러리에서의 아프리카 계열 작가의 설치 작업 등이 대표적 사례다.

뉴욕에서의 실험적인 정신의 상실은 퍼블릭 펀드에 의존하는 프로젝트들 및 예산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공공 미술관들에게 주로 해당된다. 유럽이나 미국 공히 특히 기업들의 협찬에 의존해 이루어지는 ‘설치’는 기업들의 비용 구조조정으로 인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고 한다. 

소호의 모 갤러리는 크리스토의 설치판화 작품의 판매 가격을 1만달러로 붙여놨으나 구매 상담한 지 10분도 되지 않아 8000달러로 내려 뉴욕 미술계의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을 보여줬다. 소호의 중국계 고급 가구점에서는 중국 작가(연예인 겸업)의 개인전이 열렸다. 복층 구조의 전시 가구들 사이에 작품들을 걸어 놓았는데 이는 기존 전시 형식을 벗어나면서 비용을 줄여보고자 하는 중국인들 특유의 사고가 발휘된 이벤트였다.   

그러나 여전히 고급 상권인 휘트니 뮤지움 인근 메디슨가의 헬리 나하매드(HELLY NAHAMAD) 갤러리는 프랑스 앵포르멜(비정형)미술의 대표주자 장 드브페(Jean Dubuffet)의 200만달러짜리 작품을 당당히 가격표를 붙인 채 팔고 있다. 앵포르멜은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에 대응하는 프랑스의 서정적 추상미술이라 할 수 있다.

뉴욕의 대표적인 갤러리인 페이스윌덴스텐(PACEWILDENSTEIN)에서 열린 현대 작가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 1937년 영국 브래드포드 출생)의 전시회 오프닝에 뉴욕의 미술계 주요 인사들이 참석, 대형 공간에 발 디딜 틈도 없이 성황을 이뤘다. 뉴욕을 대표하는 작가인 데이비드 호크니의 이번 2006~2009년까지의 신작 전시회는 뉴욕 동부 57번가의 페이스 갤러리에서도 동시에 열렸다.

뉴욕은 최근 있었던 소더비의 모던 및 인상주의 작가 경매에서 예상 경매 금액이 1억5000만달러를 넘어서, 1억8000만달러를 기록, 미술 경기가 조금씩 살아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 현대미술의 주류로 진입

한국은 최근에서야 사진이 순수미술로 들어오고, 시장도 형성되기 시작했지만, 미국은 사진이 순수미술로 취급된 지 4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미드타운의 오피스 빌딩 내 고급 갤러리들은 한결같이 사진을 주력 상품으로 내걸고 있다. 맥키(Mc Kee) 갤러리에서 전시중인 1966년생 리처드 레오요드(Richard Learoyd)의 크지 않은 사진 작품들은 에디션 없는 모노판으로 4만~6만달러의 가격표가 붙어 있다. 사진도 판화처럼 많은 양을 생산, 에디션 번호를 부여한 후 많은 양을 판매할 수 있으나 이 작가는 원판(필름)도 파기한 채 한 점을 고가에 책정하는 고급 마케팅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 사진작가 신디 셔면과 같은 스타의 등장도 불황기의 미술계에서 사진만이 유일하게 호황을 유지하게 되는 요인으로 분석된다. 국내도 사진 시장의 성장세가 놀랍다. 스타성을 가진 사진작가도 나타났고, 유화와 비슷한 가격이 형성되고 있다. 사진 전문 갤러리들도 속속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국내 사진 작품의 특징은 작품성보다는 크기로 승부하려한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사진작가들 및 화랑들도 스스로 컬렉터층을 확대하기보다는 사진 크기를 확대, 판매 단가를 높이려는 경향이 있다.

서울에서 해외 사진을 주로 취급하는 와이앤지의 조안 양 대표는 “국내 사진 작품 크기의 확대화 경향은 독일 사진계의 영향이 크다”고 설명했다. 사진 분야는 아직은 수요자보다는 공급자가 일방적으로 많은 시장이다.   

뉴욕의 사진학교로 알려져 있는 ICP(국제 사진센터)에서는 지난 10월1일부터 사진과 비디오 장르만 다루는 ‘사진·비디오 트리엔날레’가 열렸다. 이번에 3회째를 맞은 이 트리엔날레의 올해 주제는 ‘드레스 코드’이다. 이 미술관에서 올 한 해 동안 전시했던 대주제가 ‘패션’이었다. 한 해 동안 ‘패션 사진’을 주제로 한 심포지엄도 곳곳에서 열렸다. 그래서 ‘패션 사진’이 지금 뉴욕 미술계의 한 해를 마무리하는 화두 중 하나다. 한국 작가로는 보따리 설치 작가로 알려진 김수자씨의 인도를 소재로 한 비디오 작품 <Mumbai : A Laundry Field, 2007/

2008>이 전시실 한 칸을 차지하고 상영됐다. 김수자씨는 보따리를 주제로 한 설치 작가이나 비디오 영역까지 진출했다.

미술관과 화랑·화랑과 전문가 유기적인 관계 구축

미국은 미술관과 상업화랑이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미술관은 많은 자산가들의 기부금에 의해 운영되는데, 이들 기부자들이 미술관 운영에 관여하고 있고, 이들이 전시회 등에도 영향력을 미친다. 이들 자산가들 중에는 화랑 경영자들이 많아, 이들이 후원하는 작가들이 미술관 전시회를 하고 이중 일부를 미술관들이 구매하는데, 이러한 홍보력을 바탕으로 자신들과 관계된 작가들의 작품가는 오르게 되는 시스템이다. 국제갤러리의 직계가 운영하는 티나김 갤러리가 이러한 미국 문화계의 관행을 비교적 잘 활용한다는 평이다.

또한 뉴욕 현지에서는 직영 갤러리를 운영하지 않지만, 국제갤러리에서 오랜 큐레이터 경험을 쌓은 박경미씨가 설립한 PKM이 비교적 현지 인맥들을 잘 활용, 활발한 활동을 해나가고 있다는 평이다.

백남준 작품을 새로이 취급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 선다람타고르(Sundaramtagore) 갤러리의 선다람타고르 대표는 노벨상 수상자인 라빈드란트 타고르(Rabindranath Tagore)의 직계이자, 옥스퍼드 대학 철학박사로 구겐하임 재단, 베니스 비엔날레, 메트로폴리탄 뮤지움, MoMA 등의 대형 미술관과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갤러리스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백남준은 뉴욕에서 현대미술의 혁신가, 개혁가(innovator)로 알려져 있다. 피카소가 캔버스에만 머물지 않았고, 앤디 워홀이 작품을 공장에서 생산하듯이 재생산(reproduction)을 자기 평생의 화두로 밀었던 것이다. 전 세계 아티스트를 대상으로 영향력을 기준으로 랭킹을 정하는 독일의 전문 사이트 아트 팩트(ART FACT)는 백남준을 한국인으로 명기하고 37위에 랭크 시켜 놓고 있다. 한국 출신의 현존 작가 중 국내 최고가를 자랑하는 이우환은 1000등 밖에 있다.

백남준의 작품 <라이트 형제>(1995년 작)는 1996년 광주 신세계 전시회에서 3000만~4000만원대였는데, 최근 유럽의 한 옥션에서는 6억원대에 거래됐다. 2010년 백남준의 전시회가 유럽 등에서 연이어 있어, 그의 작품 가치는 더욱 오를 것으로 뉴욕 거주 한국 미술계 인사들은 전망하고 있다.

tip  뉴욕 미술관 순례&미술품 구매 요령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뮤지움, MoMA의 소장품들을 짧은 시간 내에 다 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뉴욕을 자주 드나드는 미술 관계자들은 뉴욕을 처음 방문하는 관람객들의 경우 각 미술관별로 각 시기별로 열리는 특별전을 우선 관람하기를 권한다. 그 후 각 미술관들의 상설 소장품들 위주의 전시를 볼 것을 조언한다. 특별전은 그 때를 놓치면, 평생 보지 못하지만 상설 소장품은 차후 뉴욕을 방문할 때 언제라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통상 뉴욕을 방문하는 한국 관광객들의 경우 현지 화랑가를 돌면서 판화를 구입하려고 하는데, 중국 작가들의 석판화(리도그라프) 작품은 에디션 번호가 없을 뿐 아니라, 작가들이 사인만 한 것은 사실상 아트 포스터이기 때문에, 오랜 아트 포스터 작품의 전통이 있는 유럽 작가들과는 구분해야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