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득 증가해도 행복체감 하락 ‘WHY?’…

  

정부·학계에서 원인 찾기 ‘활발’

- 영국 정부의 등록금 인상에 반대하는 한 젊은이가 집권당인 보수당 본부가 있는 런던의 밀리뱅크 타워 유리창을 발로 걷어차고 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기존 경제학 모델의 효용성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지는 가운데 영국 학계는 물론 정부에서도  ‘행복 경제학’을 만들기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기존의 경제 생산 지표를 보완할 ‘국민행복지수’를 만들어 실제 이를 경제정책 수립에 반영하겠다고 나섰다. 말하자면 국내총생산 (GDP) 수치로는 파악할 수 없는 국민행복지수 (GNH)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사회과학 분야 학자들은 국민소득이 증가하고 소비수준이 높아짐에도 행복 체감도가 떨어지는 현상에 주목했다. 이에 따라 그 원인과 대안을 찾는 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최근 영국에서 이런 흐름이 형성돼 온 것은 바로 영국이 처한 경제적 사회적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영국 경제는 불과 5년 전까지만 해도 ‘10년 호황’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장기적 상승 국면을 유지해 왔다. 1997년 토니 블레어가 이끄는 노동당 정권이 출범한 이후 3차례 연속 집권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장기 호황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러나 주머니 속 지갑이 두툼해지고 살고 있는 집값이 치솟았다고 해서 영국인들이 과거보다 행복해졌을까. 이 질문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일 영국인은 많지 않아 보인다.

범죄율 증가로 인해 교도소가 넘쳐났고 10대 흡연율과 임신율은 유럽 국가들 중 최고를 기록했다는 소식이 연이어 전해졌다. 알코올 관련 범죄와 질병이 늘어나면서 시민들을 불안하게 했고 영국 사회에서 절대적 권위를 유지하던 경찰에 대한 신뢰는 무너지는 듯 보였다.

‘욥’(Yob) 문화 (‘boy’라는 말의 철자를 뒤집어 청소년들의 일탈 현상을 비꼬는 신조어)나 사회적 붕괴 (broken society) 같은 말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신문 헤드라인에 등장했다.

2차 대전 이후 영국 의료 시스템을 지탱해 온 국가 무상의료 체계(NHS)는 오랫동안 영국인들의 자부심 원천이었다. 그러나 NHS도 환갑을 넘기면서 체력이 한계에 도달했다. 재정은 천문학적 적자에 허덕였고 수술환자들은 최소한 몇 개월을 기다려야 했다.

사회적 병폐를 개선하고자 정부는 연일 ‘5개년’ 또는 ‘10개년’ 계획 같은 청사진을 쏟아 냈지만 이런 숫자놀음은 많은 영국인들에게 피로감만 더했다.     

이 모든 일들이 정부가 ‘수’자가 찍힌 경제 성적표를 받아들고 흡족해하는 사이 벌어졌다. 앞마당에서 잔치가 벌어지는 사이 뒷마당에서는 술주정판이 벌어진 것이다. 영국의 중산층과 서민들이 내린 심리적 결론은 충격적이었다. ‘영국인들은 행복하지 않다.’

캐머런 총리는 이런 밑바닥 정서에 착안해 지난 2005년 보수당 당수 경선 당시부터  ‘국민행복지수’라는 공약을 꺼내들었다. 물론 기존의 경제생산지표 이외에 다소 주관적 요소가 포함될 수밖에 없는 행복지수를 통해 국민생활 개선대책을 내놓겠다고 공약한 정치지도자 중 캐머런 총리가 처음은 아니다.

니콜라스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도 대선 공약으로 새로운 국민 행복 지표를 만들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이를 위해 사르코지 대통령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셉 스티글리츠와 아마르티아 센 교수에게 기초 보고서 작성을 의뢰하기도 했다.

영국 내에서만 보더라도 민간 싱크탱크인 신경제 재단(New Economics Foundation)과 같은 단체들이 이미 세계 146개국을 상대로 행복지수를 조사해 왔다. 이러한 조사에는 개인들이 느끼는 행복의 정도는 물론, 사회적 행복, 직업 만족도 등이 모두 포함된다. 모두 기존의 경제 계량 지표에서는 잘 다루지 않던 문제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실제로 정부 통계를 작성해 이를 경제정책 수립에 반영하겠다고 나선 것은 캐머런 총리가 처음이었다. 이를 위해 배정한 예산도 200만 파운드(약 36억원)에 이른다.

사실 고실업과 각종 복지 혜택 축소 등으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정부 경제정책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이런 공약을 그대로 밀어붙인다는 것은 커다란 모험이 아닐 수 없다. 얼마 전에는 정부의 복지수당 삭감과 공무원 정원 축소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런던 시내를 사실상 마비시키기도 했다. 이 때문에 보수당 내에서조차 이를 당장 추진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놓고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캐머런 총리는 국민행복지수는 경제가 상승 곡선을 그릴 때뿐만 아니라 하강 국면에 들어섰을 때도 여전히 중요하다는 논리를 내세워 일단 이를 예정대로 추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를 위해 공약 이행의 첫 단계로 통계청에서 전국 20만 가구를 대상으로 실시하는 ‘통합 가구 조사’ 항목에 올해부터 행복지수와 관련한 질문을 포함시키도록 지시했다. 통계청에서는 이에 따라 관련 질문 4개를 포함한 가구 조사를 최근 마쳤고 이 결과는 내년 중 발표될 예정이다.

학계에서도 ‘행복학’ 중요 탐구영역으로 부상

정부 차원에서뿐 아니라 학계에서도 ‘행복학’은 점점 더 중요한 탐구 영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학자들이 느끼는 문제의식의 출발점은 소득이 일정 수준 이상 높아지더라도 개인이 느끼는 행복도가 이에 비례해서 높아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미국 남가주대 경제학 교수 리처드 이스털린이 이론화한 이른바 ‘이스털린 패러독스(Easterlin Paradox)’다.

최근 들어 물질적 풍요와 행복의 관계에 대해 가장 왕성한 집필 및 강연 활동을 벌이는 사람은 영국 학자 로버트 스키델스키 교수다. 그는 <케인즈 평전>의 저자로 국내에도 꽤 이름이 알려진 학자다.

스키델스키 교수는 사회학이나 심리학 분야 학자가 아니라 영국 워릭대에서 경제사와 정치경제학을 가르쳐 온 경제학자. 엑스터대 교수인 아들 에드워드 스키델스키와 함께 그가 곧 펴낼 책의 제목은 <충분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 경제학과 행복한 인생(How Much is Enough : Economics and the Good Life)>이다.

스키델스키 교수의 행복학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필요한(need)’ 것과 ‘갖고자 하는(want)’ 것을 구분하는 데서 출발한다. ‘니드(need)’를 뛰어넘어 ‘원트(want)’에 집착하면 사람은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원트’는 ‘니드’와 달리 무한한 욕망만을 촉발하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영국 학자들이 유럽인들과 미국인들의 행복에 대한 인식 차이를 설명하는 것도 대부분 이러한 분석틀에 근거한다. 쉽게 말하면 미국인들은 소비를 행복의 척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큰 반면 유럽인들은 음식, 여가, 가족과 같은 금액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것들에서 더 큰 만족을 찾으려 한다는 것이다.

다분히 계몽적이고 도덕철학적으로 비치지만 2008년 이후 금융권의 천문학적 보너스 관행이 온 국민의 지탄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영국을 대표하는 스타 경제학자의 이러한 주장은 상당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행복에 관한 학술적 연구를 다른 인접 분야 학문과 연관시키는 일종의 학제적(interdisciplinary) 연구도 활발하다. 이 같은 작업에 나선 학자들은 질병과 행복, 또는 가족심리와 행복 같은 계량화하기 어려운 요인들이 어떻게 개인의 행복감에 기여하는지를 추적하고 있다.

예를 들어 역대 노벨상 수상자들과 후보군에만 올랐던 학자들을 비교 분석해 이들의 수입 변화와 평균수명을 분석하거나 고혈압 환자들이 느끼는 행복과 불행의 변화 추이를 조사하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여고 졸업앨범을 뒤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이른바 ‘뒤솅 미소’를 짓고 있는 학생과 억지웃음을 짓고 있는 학생들의 그 이후 삶을 주기적으로 추적해 비교한 뒤 누가 더 행복한 인생을 살았는가를 검증하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이런 학술적 연구 작업들이 모두 행복을 만드는 요인을 ‘돈’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 찾고자 한다. 그런 면에서 ‘행복 경제학’은 기존 주류 경제학의 가정을 뒤집는 ‘대안 경제학’의 하나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영국 정부와 학계에 불고 있는 이러한 ‘행복학’ 열풍이 기존의 경제지표를 대신하거나 최소한 보완할 수 있을지 아니면 경제적 불안 심리에 편승한 유행으로 끝나 버릴지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는 아직 이르다.

토니 블레어 전 총리 역시 ‘행복지수’ 개발을 공언한 바 있지만 여러 차례에 걸친 전문가 회의 끝에 결국 이런 구상을 접고 말았다. 계량적 방법을 동원해 행복을 객관적으로 정의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세계 경제를 다시 한 번 공황 직전으로 몰고 갔던 2008년 금융위기가  영국인들에게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학습효과를 가져다주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경제학자들에게만 맡겼던 현실 경제에 대한 분석 및 예측 작업에 대해 많은 국민들이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행복지수’를 만들려는 대안적 모색이 10년 전과 마찬가지로 실패할 것이라고 보기 어려운 것도 이 때문이다. 정치경제사를 통틀어 새로운 정책 대안은 늘 침몰 직전 위기를 거치고 난 후 태동했기 때문이다.

- 캐머런 영국 총리는 기존 경제 생산지표를 보완할 ‘국민행복지수’를 만들어 경제정책 수립에 반영하겠다고 밝혔다. 지난해 서울 G20 비즈니스 서밋 폐막총회에서 연설하고 있는 캐머런 영국 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