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가지 오묘한 맛과 ‘봉황의 향기’ 그윽

봉황의 향기 하늘로 퍼져 들고  (百鳳飄香入九)

술잔 든 이마다 유림 술을 칭찬하네. (銜杯却贊柳林豪)

다섯 가지 맛을 다 갖춘 술의 어여쁨이여 (五味俱全眞醇美)

고금을 통해 영예로운 이름을 높였네. (博得今古譽聲高)

- 서봉주
- 서봉주

진시황 병마용(兵馬俑)과 양귀비의 화청지(華淸池)가 있는 시안(西安). 한국인 관광객의 발걸음이 그치지 않는 이곳을 본거지로 하는 중국의 국가 명주가 서봉주(西鳳酒)이다. 서봉주는 산시성(陝西省) 펑샹(鳳翔)에서 생산되는데 펑샹은 시안에서 차로 두 시간 거리다.



서봉주의 빛깔은 맑고 투명하다. 향기는 짙고 그윽하며 맛은 진하고 달다. 일찍이 애주가들이 탐했던 신맛, 단맛, 쓴맛, 매운맛 그리고 향기로운 맛 등 다섯 가지 맛을 다 갖추고 있으면서도 이들 각각의 맛이 서로 다투지 아니하며 공교롭게 어울리는 데 서봉주의 매력이 있다. 즉 시면서도 거칠지 아니하고 달면서도 느끼하지 않고 쓰면서도 달라붙지 않으며 매우면서도 찌르지 않고 향기로우면서도 자극하지 않는 것이다. 술을 마신 후엔 오디 맛이 가미된 듯이 단맛이 도는데 이는 오래 입안에 향기를 채운 것 같은 묘함을 가진다. 중국 배갈의 한 갈래를 일컫는 ‘봉향형(鳳香型)’ 배갈의 유래가 서봉주에서 비롯됐음은 이 때문이다. 



나 또한 ‘15년 진양(陳釀)’이라고 표시된 호화로운 포장의 서봉주를 마셔본 일이 있는데 이를 통해 나는 말로만 듣던 다섯 가지 맛을 나름으로 음미할 수 있었다. 시고 매운 맛도 배갈의 풍미를 살리는 데 한몫을 함을 그때 비로소 알았던 것이다. 참고로 ‘15년 진양’ 술이란 15년 숙성의 원주가 블렌딩에 포함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陳’자에는 ‘묵다’ ‘묵히다’라는 뜻이 있는데 배갈 또한 오래 숙성할수록 맛과 향이 더 좋아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춘추시대 봉상 지역에서 유래해

서봉주는 섬서성(陝西省)의 봉상(鳳翔), 기산(岐山) 일대가 주산지였다. 그렇지만 봉상 서쪽의 유림진에서 생산되는 것이 가장 유명했다. 봉상성은 옛 이름이 옹성(雍城)으로서 춘추시대 ‘다섯 패왕(五覇)’ 중의 하나였던 진목공(秦穆公)의 도읍지였다. 당대(唐代)에는 수도에 버금가는 서부(西府)로 승격되었는데 서부봉상(西府鳳翔)이라는 별칭과 함께 서봉주라는 술 이름도 여기서 비롯되었다.



지역의 유구한 역사와 더불어 서봉주의 역사도 춘추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진목공 때의 어느 날, 야인(野人)들이 임금이 아끼던 말을 잡아먹었으나 진목공은 그들을 벌하지 않고 되레 나라의 술 ‘진주(秦酒: 서봉주)’를 내려 마시게 했다. 말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지 않으면 몸을 해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뒷날 진(秦)과 진(晉)이 전쟁을 벌일 때였는데 진목공은 진혜공(晉惠公)의 군사들에게 포위되었다. 위태롭기 짝이 없던 때 홀연히 한 야인부대가 나타나 포위 군사들을 무찔렀다. 예전 진목공이 저희에게 내렸던 은혜를 갚기 위해 달려온 야인들이었다.



훗날 진시황이 된 진왕(秦王) 영정(政)은 연(燕)과 조(趙)나라를 차례로 공파한 뒤 승전을 축하하기 위해 전국적인 술잔치를 벌이고 ‘진주’를 마셨으며 마침내 천하를 통일하여 스스로 황제에 오르는 때에도 ‘진주’로 식을 거행했다.

안녹산의 난이 발발했을 때 반란군은 옹성 가까이까지 쳐들어왔다. 태수가 성을 쌓았지만 성은 쌓기만 하면 무너졌다. 어느 날 밤, 큰 눈이 쏟아졌으며 새벽녘에는 동쪽 하늘에서 한 마리 봉황이 날아올라 유림진 상공을 돌았다. 마침내 땅으로 내려온 봉황이 찬란한 햇빛을 받으며 눈밭을 걸었다. 이 광경을 본 태수가 봉황이 걸은 자취를 따라 성을 쌓았는데 그 견고함이 철옹성 같았다. 뒷날 옹성에서 황위(皇位)를 이은 당 숙종(肅宗)은 봉황이 날았던 뜻을 새겨 옹성의 이름을 봉상성으로 고쳤다. 



봉상은 시인 두보에게도 생애의 요처였다. 서기 755년, 낙양마저 안녹산의 반란군 손에 떨어지자 장안에 있던 황제는 황황히 피난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호위 군사들의 요구에 양귀비의 목숨까지 내어준 황제가 머나먼 사천 땅으로 도망치고 있을 무렵 먼저 피난길에 올랐던 태자는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흩어진 조정을 수습하였다. 그가 곧 당 숙종이며 임시로 조정을 차린 데가 바로 봉상이었다. 반란 소식을 듣고 장안으로 달려왔던 두보는 황제도 보지 못한 채 반란군에게 붙잡혀 하염없는 구금생활에 들어갔다. 일년 가까이 불안한 나날을 보내던 두보의 귀에도 새 황제의 등극 소식이 들려왔다. 희망을 가진 그는 감시의 눈을 피해 장안을 탈출했다. 그 길로 밤낮을 걸어 봉상에 이르렀으며 황제의 환대를 받고 좌습유(左拾遺)의 벼슬을 얻었다. 우국(憂國)의 정만 가득한 시인 두보가 난생처음 벼슬살이를 했던 곳이 봉상이었던 것이다.



북송(北宋)의 시인 소동파(蘇東坡)가 봉상에서 첨서판관(簽書判官)의 벼슬을 할 때다. 호숫가에 희우정(喜雨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술을 즐겼다. 오랜 가뭄 끝에 단비가 내린 탓에 정자 이름을 이렇게 지었으며 그의 명편(名篇) ‘희우정기(喜雨亭記)’도 여기서 나왔다. ‘유림의 술과 동호의 버드나무는 모두 아낙네의 손으로 만든 것처럼 공교롭다(柳林酒 東湖柳 婦人手)’라고 자랑한 이도 바로 그였는데 유림주가 곧 유림진에서 생산된 서봉주임은 말할 것이 없다. 술을 만드는 방법에도 관심이 많았던 소동파는 직접 유림주의 양조법도 배웠다. ‘근래 가을비 넉넉하니 그대와 함께 술 거르는 기계를 돌려보세(近日秋雨足 公餘試新)’라고 읊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어 그는 자신의 경험을 살려 봉상의 술 산업을 진작시킬 방안을 조정에 아뢰기도 하였으며 그 뜻이 받아들여져 유림주는 봉상주로 정비되어 획기적인 발전을 하였으며 봉상은 전국적인 주향(酒鄕)이 되었다. 이를 보면 소동파는 단순한 애주가가 아니라 제조와 유통 방법을 개선하여 국가 산업을 발전시킨 거대 구상의 음주자라고 할 수 있다.

- (왼쪽)서봉주 숙성저장용기 주해. (오른쪽 위)서봉주 포장작업. (왼쪽 아래)서봉주 회사의 원료저장고.
- (왼쪽)서봉주 숙성저장용기 주해. 
(오른쪽 위)서봉주 포장작업. (왼쪽 아래)서봉주 회사의 원료저장고.

두보가 걸었던 길 따라 서봉주 공장 찾아가

두보가 황제를 배알하기 위해 걸었던 그 길을 나는 소문난 술 공장 하나를 만나기 위해 차로 달렸다. 시안에서 펑샹까지는 100여km 남짓. 장쑤성에서 허난성을 거치는 동안 적잖은 고생을 했던 나도 뤄양(洛陽)에 도착해서부터는 한 중국 학부형의 배려로 뜻밖의 호사를 누릴 수 있었는데 시안에서는 사정이 한층 나았다. 이곳에서 사업체를 여럿 거느리고 있는 저(儲) 회장이 바로 그 학부형의 오랜 친구였기 때문이다. 그룹 회장님이 역에서부터 내 가방을 끌어 승용차에 실었으며 회사 직원 셋을 아예 수행원으로 붙여주었다. 이런 고마울 데란!



스모그가 짙게 낀 아침, 젊은 기사가 끄는 독일제 승용차를 타고 시안의 시가를 벗어났다. 17년 만에 다시 와본 시안. 세월이 세월이니 만큼 그사이 이곳도 크게 변해 있었다. 특히 엄청난 규모의 분수광장을 갖춘 대안탑(大安塔) 주변은 여느 국제도시에 비견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미려하게 가꾸어져 있었다. 진시황 병마용도 발굴지역을 크게 넓혀 놓은 탓에 예전보다 볼 것이 많았다.



시안에서 펑샹 인근 도시인 천창(陳倉)까지는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수월하게 갈 수 있다. 이 고속도로는 란저우(蘭州), 주취안(酒泉)을 거쳐 우루무치까지 이어진다. 천창에서 고속도로를 버린 뒤 30여 분 더 낡은 도로를 달려 펑샹 시내에 들어섰다. 여느 중국의 중소 도시와 마찬가지로 차와 사람들로 북적이는 도심에는 붉은 현수막과 광고판들이 눈을 어지럽힌다. 펑샹 시가를 벗어나서도 20여 분 더 차를 달려야 유림진에 닿는다. 또 사위는 끝없는 들판인데 지평선이 세상 끝을 일러준다. 들판 가운데 자리한 유림진은 전형적인 농촌 소읍. 따라서 이곳에서 홀로 높고 큰 술 공장 건물은 먼 데서도 곧바로 눈에 잡힌다. 우리나라의 시멘트 공장을 연상케 하는 규모며 모양새다.



머나먼 한국 땅에서 술 공장 하나 보려고 이곳까지 왔다는 말을 듣곤 정문을 지키던 경비원들이며 또 연락을 받고 나온 선전실 직원도 놀라기는 한 가지다.



정문을 들어서면 본관 정원 앞에 관복을 입은 소동파의 석상이 서있다. 안쪽 건물 벽에도 ‘역사 명주 서봉주는 소동파가 말한 전통의 맛을 지닌다(西鳳歷史名酒 東坡傳統味型)’는 큰 글씨를 붙여놓은 것에서 보듯이 소동파는 서봉주의 브랜드 캐릭터다.



서봉주는 현지에서 생산된 수수를 원료로 하며 보리와 밀, 완두로 누룩을 만든다. 물은 공장 안에 있는 깊은 우물물을 길어 쓰며 양조 과정은 예부터 전해지는 전통의 방법을 따른다. 원료를 땅광(구덩이)에서 발효시키는 과정은 여느 술과 다를 바 없지만 한 번 사용했던 구덩이를 두 번 쓰지 않는 점이 이곳의 특색이다. 술을 만드는 주기(酒期)가 일년이니 일년에 한 번 발효 구덩이를 바꾸는 셈이다. 전통적으로 서봉주는 흙구덩이에서 원료를 발효시키는데 구덩이를 바꿀 때는 바닥과 흙벽 등을 모두 걷어내고 새 흙이 드러나게 한다. 이는 기존에 생긴 발효균들을 제거하기 위해서다.

- 서봉주 회사 전경. 정면에 위치한 소동파 석상.
- 서봉주 회사 전경. 정면에 위치한 소동파 석상.

‘주해’라 불리는 특별한 용기서 숙성돼

증류로 얻은 술을 어둡고 건조한 창고에 넣어 숙성시키는 과정 또한 여타 술과 다르지 않지만 이때 서봉주는 독특한 ‘주해(酒海)’라는 용기를 사용한다. 주해는 싸리나무 가지로 짠 거대한 바구니 같은 것이다. 이들 싸리나무는 멀리 진령(秦嶺) 산속에서 베어온 것이다. 용기의 높이는 어른의 키보다 높으며 둘레는 장정 서넛이 팔을 뻗어야 둘러쌀 정도다. 이는 중국에서도 가장 독창적인 용기로 알려져 있는데 서봉주의 안내문이나 광고에 단골로 등장하는 자랑거리가 된다. 통풍성이 일반 항아리보다 나을 뿐만 아니라 만드는 비용이 많이 들지 않고 술의 손실을 적게 한다는 ‘주해’는 바깥사람이 언뜻 봐서는 되레 이해가 되지 않는 용기다. 나뭇가지로 엮은 바구니에 술을 담아서 짧게는 3년, 길게는 20~30년을 보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렇지만 옹기보다 튼튼하고 수명이 길다는 것이 술 회사의 설명이다.



주해에는 예부터 전해오는 중국인들의 지혜가 숨어있다. 먼저 싸리나무 가지를 촘촘히 엮어 바구니를 만든 다음 그 안쪽에 마지를 발라 틈새를 모두 막는다. 마지 위에는 돼지 피를 바르고 그 다음 달걀흰자, 밀랍, 유채기름 등을 일정 비율로 섞어 바른다. 이것을 건조시키면 흙항아리보다 견고하고 빈틈이 없는 장기 저장용 주해가 되는 것이다. 양조기술의 발달과 함께 주해도 더욱 크게 되었는데 큰 것은 5~8톤의 술을 담을 수 있다. 주해의 내부에 바른 도료(塗料)들은 서봉주 특유의 풍미를 만드는 데도 적잖은 작용을 한다. 술을 저장 숙성하는 과정에서 이들 도료의 일부가 용해되어 술에 섞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적은 양이지만 에틸카바네이트, 리놀레산, 테르펜 같은 성분이 있어서 서봉주의 맛과 향을 높이는 데 영향을 미친다. 술에서 미미한 꿀 향기가 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반적으로 서봉주의 숙성 기간은 3년이다. 그렇지만 프리미엄급 술을 만들기 위해 20년에서 30년 이상 주해 속에서 잠자고 있는 술들도 많다.



나는 다른 술 공장에서 쉬 볼 수 없던 누룩 제조 과정을 이곳 서봉주 양조장에서 보는 행운을 가졌다. 벽돌 모양의 누룩 덩어리들을 기계가 찍어내는 모습이며 뜨거운 수증기를 뿜어 수천 개의 누룩 덩이들을 띄우는 광경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그렇지만 서봉주 술 공장에서만 볼 수 있는 ‘주해’ 창고의 장관은 이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넓은 곳간에 줄줄이 도열해 있는 거대한 술 바구니들! 바구니의 나뭇가지들은 하얗게 색이 바랬지만 단단하기가 돌 같은데 틈새를 막았던 도료들이 댓살 사이로 삐져나와 응고된 양은 석회동굴의 종유석을 연상케 했다. 1978년, 1980년…. 각각의 주해들은 저마다 술을 담은 연도와 날짜를 적은 명찰을 붙이고 있다. 훗날 어느 저녁, 술 좋아하는 이의 목구멍을 타 넘어가서 열정과 웃음, 분노로 산화될 술 방울들은 어둠 속에서 이렇듯 20년, 30년의 깊은 잠을 자고 있는 것이다. 



1956년 10월 저우언라이(周恩) 당시 중국 총리가 직접 관장하여 여러 개로 분산돼 있던 양조장들을 통합하여 서봉주 술 회사를 만들었다. 현재 공장부지가 50만㎡ 이상이며 직원 수는 3000여명, 연 생산량은 5만 톤에 이른다. 1952년 제1회 전국주류평가대회에서 최고의 영예인 금장(金章)을 받아 일찌감치 ‘중국 명주’로 선정된 서봉주는 이후 네 번의 평가대회에서 세 차례 더 금장을 받으면서 국가 명주의 이름을 날렸다.

- 서봉주를 사든 시민의 모습.
- 서봉주를 사든 시민의 모습.





<일러두기>

❶ 현대 중국의 인명 및 지명, 중국의 고유명사는 중국어 발음대로 표기했다. 단,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고유명사는 한자 독음대로 표기하였다.

 <예> 毛澤洞 마오쩌둥 西安 시안 / 長江 장강 杏花村 행화촌



❷ 술 이름의 경우에도 중국어 발음대로 표기해야 하나 우리에게 익숙한 술에 한해서만 그렇게 했다. 여타의 술은 발음이 어렵거나 의미 전달이 잘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에서 한자 독음으로 표기했다.

<예> 茅台酒 마오타이주 五粮液 우량예 / 黃鶴樓酒 황학루주 劍南春 검남춘



❸ 신 중국 수립(1949년)을 기준으로 그 이전의 인명 및 지명은 한자 독음대로 표기했다.

<예> 李白 이백 杜甫 두보 南京 남경



최학 소설가 · 우송대 교수는...

필자 최학 교수는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고, 1979년 한국일보 장편소설 공모에 역사소설 <서북풍>이 당선되면서 큰 주목을 받은 중견 소설가다. 대표작으로 <서북풍>, <미륵을 기다리며>, <화담명월> 등이 있으며, <배갈을 알아야 중국이 보인다>, <니하오 난징> 등 중국 관련 저서도 있다. 현재 우송대 한국어학과 교수로 많은 중국인 학생들을 가르치며 한·중 양국간 교류에 일조하고 있다. 네이버에 ‘배갈, 白酒의 향과 맛을 찾아 (http://blog.naver.com/jegang5)’라는 블로그를 운영하며 배갈 대중화 작업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