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빈 접대에 빠지지 않는 ‘주중지왕’ (酒中之王)

- (왼쪽)제1차 적수하 도강 때 홍군이 이용했던 토성도구. (오른쪽)적수하를 낀 마오타이진.

- 마오타이주 술병
- 마오타이주 술병

최근 중국의 대표적인 배갈 마오타이(茅台)주 한 병 값이 올 들어 1600위안(27만2000원)까지 올랐다는 보도가 있었다. 작년 초까지만 해도 이 술의 소비자 값은 950위안에 불과했다. 유통과정의 거품이 심한 데다 도매상들이 대량으로 술을 사서 유통량을 줄이는 방법 등으로 술 가격을 높이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또한 중국 배갈 시장에서 마오타이주의 독점적 지위를 잘 보여주는 예가 된다.

수천 종의 배갈이 있는 중국에서도 마오타이주를 으뜸으로 치는 데 주저하는 이는 없다. 따라서 ‘국주(國酒)’ ‘주중지왕(酒中之王)’이라고 일컫는 것도 자연스럽다.

1949년 공산 중국의 건국 축제에서 주은래(朱恩來)가 마오타이주를 국가 연회주(宴會酒)로 확정한 이후 이는 국가적 연회나 귀빈을 초대할 때 필수적으로 준비하는 술이 되었으며 이로써 마오타이주는 예빈주(禮賓酒)라는 별칭도 얻었다. ‘국주(國酒)’란 명칭은 1975년 제1차 전국회의에서 국무원 부총리 왕쩐(王震)이 선포한 데서 비롯된다.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은 그의 회고록에서 이 술에 대한 일단을 그려놓고 있다. 닉슨 전 미국 대통령도 중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가면서 마오타이주를 가져갔다. 한 병을 백악관 집무실에서 땄는데 그만 부주의해서 탁자에 엎지르고 말았다. 때마침 불붙은 성냥개비가 그 위에 떨어져 탁자를 태워버렸다는 것이다. 이야기의 진위 여부를 따질 수는 없지만 이 또한 마오타이의 품성을 설명해주는 일화가 된다.

마오타이주는 장향형(醬香型) 배갈의 대표다. 따라서 ‘장향’이란 말 대신 아예 술 이름을 따서 ‘모향(茅香)’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많다. 술의 빛깔은 맑고 투명하다. 입안에 넣으면 술 향기가 가득 차며 곧 부드럽고 섬세한 장향을 느낄 수 있다. 알코올 도수가 높은 경우에도 자극감은 크지 않다. 이 술은 중국의 장향형 대곡(大曲: 밀 누룩) 배갈 중에서도 풍격이 가장 완전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분석에 의하면 마오타이주의 특수한 성질과 풍격은 이 장향을 비롯하여 발효지의 향, 주정(酒精)의 향미가 융합돼 이루어진 것이다. 여타의 특성 또한 각종의 화학성분에 의한 것이다.

- 중국 공안이 마오타이주 유사품을 단속하고 있다.
- 중국 공안이 마오타이주 유사품을 단속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 1세대 지도자들과의 인연

애호가들은 이 술이 의료 및 건강상으로도 일정한 효험이 있다고 주장한다. 1935년 모택동, 주은래 등이 이끈 홍군(紅軍)이 네 번이나 마오타이 인근의 적수하(赤水河)를 건널 적에 이곳 주민들이 술을 갖고 와서 병사들을 위로했다고 전한다. 전투와 행군에 지치고 다친 병사들이 이 술을 마시곤 피로와 통증을 잊었다고 전하는 것이다. 신 중국 수립 후 공산당 지도자들이 마오타이를 집중 지원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마오타이주는 궈이저우성(貴州省) 런후이현(仁懷縣)에 있는 마오타이진(茅台鎭)에서 생산된다. 문헌에 따르면 2000년 전 춘추시대 인회 지역은 고단국(古鍛國)에 속했다가 파국(巴國)에 병합됐는데 파국은 일찌감치 술이 발달된 나라로 소문났다. 한대(漢代)부터 이곳은 장안에서 남월(南越: 운남과 월남)로 통하는 상업 도로를 끼고 있었다.

마오타이 술 공장이 있는 곳은 양유만(楊柳灣)인데 명(明) 가정(嘉靖: 1530년경) 때 대화소방(大和燒房)이란 양조장이 이곳에 가장 먼저 생겨났다. ‘소방’은 소주를 만드는 집이다. 명 후기와 청 초기까지만 해도 앞뒤가 강과 산으로 막힌 모태진은 어업과 농업을 하면서 가축을 놓아 먹이던 벽촌 마을이었다. 주석이며 구리를 캐내는 광산도 있었다. 건륭(乾隆) 10년(1745년) 적수하의 강바닥을 파내어 뱃길을 열면서 모태진은 소금 운반의 집산지가 되었다. 모태진의 번영기가 온 것이다. 청 도광(道光: 1821~1850년) 연간에 모태진의 양조장 수는 스무 집이 넘었으며 마오타이 술 또한 점차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오래전, 250여 년의 역사를 헤아리게 하는 옛 마오타이 술병이 이 지역에서 발굴된 일이 있었다. 주둥이는 작고 목이 짧으며 몸통이 볼록한 이 술병은 건륭 20년, 즉 1755년 제품으로 규명되었다. 병의 주둥이는 나무토막으로 막게 돼 있으며 병은 짐승의 창자나 돼지의 오줌통으로 감싸 노끈을 조여 밀봉하도록 돼 있다. 병에는 ‘귀주성 모태주(貴州省 茅台酒)’라는 간단한 상표가 삼각형으로 새겨져 있다. 마오타이의 양조 역사를 가늠케 하는 귀한 유물이 아닐 수 없었다.

마오타이 쪽에서는 잘 드러내지 않지만 마오타이 술 또한 일정 부분 산서성(山西省) 행화촌(杏花村)에서 생산되는 ‘분주(汾酒)’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많은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청 강희(康熙) 때 산서성 분양(汾陽: 이곳 행화촌에 분주 회사가 있다)에 살던 가부(賈富)라는 상인이 제 고장의 양조 전문가를 이곳에 데려와 분주의 양조 기법대로 술을 만든 것이 마오타이주의 시초라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초창기 마오타이 술이 ‘화모주(華茅酒)’라고 불린 유래에 대해서도 서로 주장이 엇갈린다. 이곳 토박이 화능오(華塢)의 양조장에서 만든 술이란 뜻에서 그랬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마오타이에서 만들어진 행화촌의 술 즉 ‘행화모태(杏花茅台)’를 줄인 말이란 주장이 팽팽히 맞서는 것도 그 예다. ‘화(華)’자와 ‘화(花)’자는 서로 통하는 탓에 ‘화모(華茅)’는 ‘화모(花茅)’와 다름없다.

사실, 중국의 여러 명주의 산지를 여행하다 보면 특히 산시(山西), 산시(陝西) 같은 북쪽 지역에서는 마오타이, 우량예 같은 쓰촨, 궈이저우의 술들이 중국 배갈을 대표하는 듯한 세태를 퍽 언짢아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분주, 서봉주(西鳳酒), 보풍주(豊酒) 쪽에서 특히 그러한데 이들 술 관계자들은 마오타이, 우량예 같은 남쪽의 술들이란 게 모두 북쪽의 양조 기술을 빌려서 만든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굽히지 않는다. 

- 1950년대의 마오타이주 양조장 모습.
- 1950년대의 마오타이주 양조장 모습.

중국 최초로 ‘국가 명주’ 반열에 올라

신 중국 수립 전, 마오타이의 이름은 이미 나라 밖까지 나 있었지만 발전의 속도는 대단히 더뎌 연간 생산량이 수십 톤을 넘지 못했다. 건국 후 국가에서는 모태진에 있던 세 군데 개인 양조장들을 하나로 병합하여 국가가 직접 운영하는 국영 마오타이 술 회사를 세웠으며 매년 투자를 늘리고 시설을 확충하여 생산량을 늘려 나갔다. 지난 2003년 처음으로 연 생산량 1만 톤을 넘겼다. 1952년 개최된 제1회 전국주류평가회에서 금장을 받아 가장 먼저 ‘중국 명주’의 반열에 들었으며 이후 2, 3, 4, 5회 대회에서도 거푸 금장을 받아 분주, 루저우라오자오(瀘州老) 술들과 함께 전 대회 금장을 받는 기록을 세웠다. 

마오타이주는 왜 다른 술들이 흉내를 낼 수 없는 독특한 풍미를 가지는가? 이는 술의 생산지와 원료 그리고 양조기술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마오타이 술 마을은 인회현에서 12㎞ 떨어진 적수하 강가에 위치한다. 강 유역은 운남 및 귀주의 고원지대와 사천 분지가 마주하는 요충지다. 1억3000만년 전 주라기시대부터 이곳의 홍색 사암(砂巖)과 낙석(礫石)이 형성되었는데 이런 지층은 통투성(通透性)이 좋으며 여러 광물질을 풍부하게 함유하고 있다. 인도양에서 불어오는 따뜻하고도 습한 대기의 영향으로 여름철에는 날이 덥고 비가 많이 내린다. 연 강우량은 1000㎖를 넘으며 빗물은 갑자기 불어난다. 비 온 뒤 범람하는 강물이 홍색을 띠기 때문에 ‘적수’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마을은 해발 400m쯤에 위치하는데 뭇 산들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다. 가운데가 패인 프라이팬처럼 생긴 지형이다. 바람이 잘 통하지 않는 이곳의 凹형 지형은 기후와 어우러져 술의 발효 장소로서 최적의 조건을 제공한다.

300~400년 전, 하나의 작은 어촌에 지나지 않았던 마을은 도처에 무성하게 자란 갈대로 인해 ‘모초촌(茅草村)’이라고 불렸으며 줄여서 ‘모촌’이라고도 했다. 서기 1745년, 청나라 정부가 강바닥을 준설하여 배들의 내왕을 수월하게 했는데 이로써 모초촌은 교통의 요지가 되었다. 마을이 번창하면서 갈대밭은 거의 사라지고 오로지 한파령 아래쪽의 한 둔덕에만 남았다. 이후 사람들은 마을 이름을 ‘모태촌(茅台村)’으로 바꾸었다.

산과 샘물이 어우러져 만든 적수하, 이 강물은 깨끗하여 나쁜 성분이 없다. 토양은 붉은색을 띤 주사토(朱砂土)다. 술을 만들 때 발효를 위해 구덩이를 깊게 파는데 그 바닥도 이 흙으로 다진다. 이런 토질은 향의 생성과 미생물의 번식에 유리하다. 이로써 마오타이주 특유의 풍미를 갖추게 되었는데 이는 프랑스의 코냑, 스페인의 셰리(Sherry)처럼 지리환경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마오타이의 병마개를 열면 먼저 그윽하고도 매끄러운 향이 코끝에 느껴진다. 전향(前香)이라고 부르는 이 향은 술맛을 이끄는 작용을 한다. 주요 성분은 낮은 비등점에서 생성된 알코올과 에스테르(ester) 같은 유기화합물, 그리고 알데하이드(aldehydes) 같은 물질이다. 계속해서 음미하면 삽상하고도 열에 잘 다스려진 단맛의 향을 맡을 수 있는데 이것이 장향이다. 술을 마신 뒤에도 빈 잔에서는 난초와 장미꽃 향기 같은 것이 발산되는데 이것을 후향(後香)이라고 한다. 5~7일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이 향의 주요 성분은 높은 비등점에서 생긴 산성 물질로 알려져 있다. 전향과 후향은 상호 보완적으로 생성되며 이내 혼연일체가 되어 장향형 배갈의 독특한 매력을 구성한다.

마오타이 술병도 나름의 구실을 한다. 도자 병은 둥근 기둥꼴이며 주둥이는 짧다. 단정하면서도 무게감이 느껴지는 이 병은 예스럽고 질박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런 도자 병은 유리병이 가지지 못하는 성질을 드러내기도 하는데 병의 결구가 조밀치 않아 적은 양이나마 공기가 드나들 수 있기 때문이다. 전자현미경으로 보면 병의 면에 많은 틈새가 있다. 이러한 공극들은 작은 물 분자들이 쉽게 빠져나가게 한다. 술을 담으면 물 분자들이 완만하면서도 끊이지 않게 병의 벽으로 스며들어 소실된다.

따라서 주액 속의 산화반응이 잘 이루어지며 특수한 향미를 가지는 화합물의 함량을 높여갈 수 있다. 흙의 기운을 가진 마오타이 술병은 비록 모양새가 좋지 못하다 해도 좋은 술이 되게 하는 데는 적잖은 공헌을 하는 것이다. 근래 마오타이주도 유리병을 많이 쓰고 있다.

- 마오타이 문화공원의 조형물들.
- 마오타이 문화공원의 조형물들.

배합 방식 따라 70~80종이나 만들어져

 술을 만들 때는 전통의 양조기술을 채용한다. 그 기술은 복잡하며 엄격한 조작법을 요구한다. 마오타이 술 제조는 계절성을 띤다. 반드시 매년 중양절(重陽節: 음력 9월9일) 전에 재료들을 넣어야 하는 것이다. 원료 투입에서부터 밑술을 만드는 데까지 10개월 정도가 소요된다. 수수를 주원료로 하며 밀로 만든 누룩을 쓰는데 누룩의 총량이 수수의 양보다 많다는 점이 또 특이하다. 원료찌기-발효-증류의 과정이 일곱 차례 거듭되며 이 과정에서 차례로 걸러진 술은 구분 저장되며 3년 이상의 숙성기간을 거친다. 이후 ‘궈투이(勾兌)’라고 하는 배합과정을 가지는데 이는 서양 술의 블렌딩과 다를 바 없다. 술 배합은 일종의 특수기술이다. 배합에 따라서 색과 향, 맛이 서로 다른 완성품들이 나오는데 적게는 30~40종, 많게는 70~80종의 술이 만들어진다. 우리 한국인들의 눈에도 쉽게 띄는 ‘모태왕자주(茅台王子酒)’, ‘모태영빈주(茅台迎賓酒)’ 같은 저가의 마오타이 술들도 이 과정에서 대량으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배합 기술자들은 기본적으로 향형(香型)이 다른 술 그리고 생산 순서와 저장 기간, 알코올 농도가 다른 술끼리 배합한다. 여기에 배합의 묘미가 가미되면서 술의 맛과 향이 두드러지는 것이다. 배합을 거친 술은 항아리에 밀봉된 채 상당 기간 보관되어 숙성 과정을 거친다. 불순한 성분을 제거하고 향과 맛을 깊게 하기 위해서다. 일반적으로 모든 마오타이 술은 3년 이상의 숙성 과정을 거친다. 

한국에서 마오타이로 가는 길은 참으로 멀고 어렵다. 윈난성(雲南省) 쿤밍(昆明)에서 열차를 타고 북쪽으로 올라가 궈이저우의 준이(遵義)에 이른 뒤 런후이-마오타이로 가는 방법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쓰촨의 청두에서 준이로 가는 방법을 택한다. 청두-준이까지의 열차 시간이 12시간이며 준이에서 마오타이까지가 네댓 시간 걸린다.

적수하를 사이에 두고 양쪽 연안에 자리 잡은 술의 마을 마오타이에 당도하면 짙은 술 향기가 곧바로 온몸을 덮친다. 술 회사를 방문하여 소문난 술을 제조하는 과정을 직접 보는 것도 좋은 구경거리이지만 적수하를 오르내리며 그 빼어난 풍광을 눈에 담는 것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된다.

 

필자 최학 교수는...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고, 1979년 한국일보 장편소설 공모에 역사소설 <서북풍>이 당선되면서 큰 주목을 받은 중견 소설가다. 대표작으로 <서북풍>, <미륵을 기다리며>, <화담명월> 등이 있으며, <배갈을 알아야 중국이 보인다>, <니하오 난징> 등 중국 관련 저서도 있다. 현재 우송대 한국어학과 교수로 많은 중국인 학생들을 가르치며 한·중 양국간 교류에 일조하고 있다. 네이버에 ‘배갈, 白酒의 향과 맛을 찾아 (
http://blog.naver.com/jegang5)’라는 블로그를 운영하며 배갈 대중화 작업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