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선은 쏘아 올리면서 독자 기술로 승용차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나라’ 중국에게 자동차산업은 시련이자 수치였다. 국가 차원의 거듭된 지원책에도 중국의 자동차산업은 대표적인 산업정책의 실패사례로 꼽힌다. 중국의 자동차업체는 100개가 훨씬 넘지만, 아직 독자 기술과 독자 브랜드의 승용차를 세계 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곳이 거의 없다.

이치(一汽)·상하이(上海)·둥펑(東風)·창안(長安)·베이징(北京) 등 중국 자동차업계 상위 1~5위를 차지하는 업체들이 모두 폴크스바겐(이치·상하이), GM(상하이), 기아·닛산·시트로엥·푸조(둥펑), 포드·마쯔다(장안), 현대·벤츠(베이징) 등과 합작을 통해 승용차를 생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1~5위가 그럴진대 그 이하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중국 자동차업계가 최근 이런 ‘굴욕’을 타파하겠다고 일어나고 있다. 선봉에는 상하이자동차그룹이 서 있다. 4월10일 상하이자동차그룹은 5년 안에 30개의 독자 브랜드 신차 모델을 개발하겠다고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선언했다. 중국 2위의 자동차그룹인 상하이차는 지금까지 GM·폴크스바겐 등 외국 자동차업체와의 합작회사를 통해 외산 브랜드의 승용차만 생산해왔다. 따라서 상하이차의 이날 발표는 외국 자동차업체와의 종속적인 관계에서 벗어나겠다는 중국 자동차업계의 ‘독립 선언’이라 할만하다.

왕샤오치우(王曉秋) 상하이자동차제조유한공사(이하 상하이차) 총경리는 이날 경영진을 대동해 가진 기자회견에서 “국내외 자원을 창조적으로 결합해 중국인들이 국제적인 자동차 브랜드를 갖도록 만들겠다”며 “2010년까지 30여개의 신차 모델을 개발하겠다”고 밝혔다.

상하이차는 상하이자동차그룹이 독자 브랜드의 승용차 생산을 위해 최근 설립한 자회사. 상하이차는 이날 발표한 ‘5개년 계획’을 통해, 연내에 독자 브랜드의 고급형 세단을 출시하고, 2007년부터 2010년 사이에 중형승용차와 RV차량 등 5개 생산라인을 통해 30여개 신차 모델을 생산하겠다는 구체적인 목표를 밝혔다. 연간 평균 6개 신 모델을 내놓겠다는 것이다. 현대차도 1년에 많아야 3~4개 모델을 내놓은 것을 감안하면 초스피드로 외국 업체를 추격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왕 총경리는 “자체 브랜드 승용차 가격대는 6만5000위안~30만위안에 이를 것”이라고 말했다. 중고가 승용차는 물론 SUV(스포츠유틸리티차량)까지 망라하겠다는 것이다. 현대차가 중국 합작법인인 베이징현대차를 통해 만드는 엑센트에서부터 엘란트라, 쏘나타 등 모든 현지 생산 브랜드와 경쟁이 불가피함을 의미한다.

상하이차가 연내 출시할 고급 세단은 지난해 인수한 영국 MG로버그룹의 ‘로버75’를 개조한 모델이다. 상하이차는 ‘로버75에 의한, 로버75보다 높은’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이미 신 모델 개발을 완료한 상태이며, 지난달 유럽 표준에 맞춘 충돌시험까지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 상하이차는 이를 중국뿐 아니라 이르면 2007년 EU 지역으로도 수출할 계획이다. 중국 내 시장에서뿐 아니라 해외시장에서도 합작사인 GM, 폴크스바겐과 경쟁하겠다는 목표다.

해외업체에 역공나서

쌍용자동차를 인수한 상하이차는 적극적인 해외 자동차업체 인수·합병 및 GM·폴크스바겐 등 강자(强者)에게 노하우와 기술을 배워 독자 브랜드업체로 나가겠다는 중국 자동차업체의 전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외국 강자와의 20년 동안 합작을 통해 습득한 기술과 디자인을 바탕으로, 이제 역공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상하이차는 세계적인 독자 브랜드 자동차 생산업체를 지향하기 위해 올해 중 영국에 대형 연구센터 설립도 추진하고 있다. 로버사의 연구원 20명이 이미 상하이에 상주하고 있으며, 현재 100명 수준인 영국 개발센터 근무인원을 연내 500명으로 확대해 세계적인 자동차 연구개발센터로 키우겠다는 계획이다.

중국 자동차업계는 상하이차뿐 아니라 치루이(奇瑞)·지리(吉利) 등 중소형 자동차업체들도 적극적으로 독자 브랜드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과거 GM대우 마티즈의 디자인을 무단 도용해 문제가 됐던 치루이는 3월28일 중국 자동차산업 역사상 처음으로 독자 브랜드 차종 생산누계 50만대를 돌파했다. 50만대라는 숫자가 가소롭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치루이는 세계 자동차산업 역사상 가장 발전 속도가 빠른 기업이다. 2004년 자체 브랜드 차종 20만대를 돌파한 치루이는 2년도 지나지 않아 50만대를 돌파했다. 앞으로는 더 가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최근 이탈리아 자동차 디자인업체를 인수했으며, 독자 브랜드 승용차 개발을 위해 4억위안(약 480억원)을 투자해 ‘치루이자동차공정연구원’까지 설립했다.

중국 업체들의 이런 노력은 중국 내수시장에서는 이미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 중국에서는 지난 1월 중국 독자 브랜드 승용차의 시장 점유율이 28.7%를 기록, 처음으로 일본·미국·유럽산 브랜드를 제치고 1위로 올라섰다.

독자 브랜드 차종 개발에 성공한 중국 업체들은 해외 진출에 적극 나서고 있다. 치루이자동차는 올 2월 러시아 아브토토르와 계약을 맺고 독자 브랜드 차량을 러시아에서 조립 생산키로 합의했다. 또 장링(江鈴)모터스도 지난해 SUV 독자 모델 ‘랜드윈드’를 개발, 유럽에 수출을 시작한 상태다. 중국의 지난해 자동차 수출량은 17만2639대를 기록, 처음으로 수입량(16만1608대)을 초과했다. 수출량은 아직 미미하고 수출 차량도 대부분 저가(低價) 차량 위주이다. 그러나 상하이차가 기자회견에서 밝혔듯 이제 중국 자동차업체들도 30만위안(약 3600만원)의 중·고가 차량 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중국 자동차 업체들이 최종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은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시장 진출이다. 중국 최고의 민영 자동차기업인 지리자동차(吉利汽車)는 올 1월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2006 북미국제모터쇼’에 중국 업체로는 처음으로 5인승 세단 ‘7151CK’ 모델을 출품했다. 지리자동차 미국법인 관계자는 “2008년에서 2009년 사이 미국에 자동차 조립공장을 설립해, 대당 1만달러(약1000만원) 하는 소형 승용차를 생산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미국 본토에 생산기지 설립까지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치루이자동차도 작년 초 미국 자동차 유통업체인 비저너리자동차와 2007년부터 세단과 SUV(스포츠유틸리티차량) 등 5종의 자동차를 미국에 수출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이미 중국을 진원(震源)으로 한 세계 자동차업계의 지각변동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