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침체 탓 값싸고 실용적인 옷으로 갈아입다

세계 패션쇼의 시작을 알리는 뉴욕 패션위크가 경기 침체로 철저히 실용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경비를 줄이기 위해 여러 디자이너들이 공동으로 한 타임만 빌려 공동 쇼를 진행하는가 하면, 비싼 원단 대신 싼 직물을 써서 옷값을 떨어뜨렸다. 런웨이를 활보했던 누가 입을까 싶은 비현실적인 디자인은 줄어들고 대신 소매가 있는 당장 사 입을 수 있는 현실적 디자인의 옷이 늘었다.

9월17일 뉴욕 6번가 브라이언트 공원은 사람들이 어깨를 부딪칠 만큼 인파로 가득 찼다. 9월10일부터 시작된 뉴욕 패션위크 ‘2010 봄 컬렉션’의 마지막 날, 카메라를 든 사람들은 유명 모델과 연예인이 텐트(가설 전시장) 안으로 들어갈 때마다 우르르 몰려들어 플래시를 터뜨렸다. 주변의 교통이 막히고 호텔 방은 동이 났지만, 텐트 속에서는 디자이너들이 경기 침체와 힘겹게 싸웠다.

전시장 문을 열고 들어서면 분수가 있던 광장 중앙에 한국 명품 브랜드인 MCM이 베이지색의 여행용가방을 트로피 모양으로 화려하게 쌓아올린 우아한 장식이 눈에 띈다. 하지만 광장 오른쪽부터 배치된 스폰서들의 부스는 예전에 비해 무게감이 다소 떨어진다. 가장 대표적인 것인 커피 브랜드. 이탈리아 고급 커피 브랜드 대신 이번 시즌엔 맥도널드의 ‘맥카페’가 들어섰다. 맥도널드는 자신들의 에스프레소 제품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뉴욕 패션위크를 이용했지만, 뉴요커들은 “패션위크의 질이 떨어진 것 같아 슬프다”고 말한다.

브라이언트 공원 안에는 모두 3개의 전시장이 있고, 뉴욕퍼블릭라이브러리 등 그 밖의 12개 지역에서 패션쇼와 프레젠테이션이 진행된다. 하지만 브라이언트 공원 내 전시장의 경우 이용하는데 2만8000~5만달러의 경비를 운영회사인 IMG에 내야 한다.

이에 따라 일부 디자이너들은 공동으로 패션쇼를 진행하기도 했다. 니콜라스 K, 마라 호프먼(Hoffman)이 매년 공동으로 작업해왔으나, 올해는 휘트니 이브(Eve)가 합류했다. 브라이언트 공원 내 전시장을 빌리면 보통 패션 쇼 준비작업 3시간, 패션 쇼 1시간, 사후정리 30분이 배정된다. 하지만 3명이 공동작업을 하다 보니 쇼가 중간에 끊어졌고, 관객들이 이 틈에 자리를 뜨기도 했다.

또 디자이너들은 경비를 줄이기 위해 톱 모델 대신 신인 모델을 기용하기도 했고, 톱 모델을 데려온 경우에도 런웨이에서 옷을 선보이기보다는 앞줄에 디자이너와 나란히 앉아있는 경우도 많았다. 패션위크를 운영하는 IMG의 PR 담당 매니저 앨리슨 레비(Levy)는 “이번 시즌엔 브라이언트 공원 내에서 모두 64개의 쇼가 열렸다”고 말했다. 브라이언트 공원 이외의 오프사이트 쇼와 프레젠테이션을 합쳐도 80개 정도에 불과하다. 이는 한창 경기가 좋을 때 120~150개에 이르는 쇼 숫자에 비하면 상당히 떨어진다.

옷감도 저렴하고 실용적인 소재로 많이 바뀌었다. 실크 대신 물빨래를 할 수 있는 저지 소재가 주목을 받았다. 디자이너 웬런 치아(Chia)는 “하지만 세련된 스타일을 희생하지 않기 위해 저지 옷감에 시퐁이나 주름 등을 달아 드레시한 느낌을 살렸다”고 말했다.

뉴욕의 디자이너인 트레이시 리스(Reese)도 구슬, 자수 등으로 디테일을 살린 특유의 여성적이고 빈티지적 영감을 살린 디자인에서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풍의 하렘바지, 두꺼운 검정 벨트, 두터운 어깨선, 허리를 조인 스커트 등 보다 쉽게 입을 수 있는 디자인을 선보였다. 

뉴욕에서 유명한 한국계 디자이너인 리처드 채 역시 자신의 이름을 딴 럭셔리 라인 대신 ‘러브(Love)’라고 이름 붙인 저렴한 라인을 패션위크에 소개했다. 러브는 ‘리처드 채’ 라인의 3분의 1 가격으로 재킷 한 벌에 400달러, 바지 한 벌에 200달러가량 한다.

한국계 디자이너 리처드 채, ‘러브’ 선보여

한창 경기가 좋던 시절에는 가령 소매 같이 실용적인 아이템을 달아 상업적인 컬렉션을 선보이면 다소 수치스럽게 여겨졌다. 하지만 이번 패션위크에는 ‘컨템퍼러리’로 불리는 상업적인 옷들이 많이 등장했다. 무대 뒤에서 주로 디자인에 대해 얘기했던 디자이너들이 이젠 옷감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을 정도다.

버블 시절, 스타들이 자신의 이름을 달아 경쟁적으로 출시했던 패션 브랜드들도 많이 사라졌다. 유명한 미국 팝뮤지션인 저스틴 팀버레이크(Timberlake)가 만든 ‘윌리엄 래스트(William Rast)’ 브랜드는 경기 침체의 영향으로 이번 패션쇼에 나오지 않았다. 미국 여배우인 제니퍼 로페즈(Lopez), 리얼리티쇼 스타 하이디 먼태크(Montag), 팝싱어 맨디 무어(Moore), 패리스 힐튼(Hilton)의 동생 니키 등이 만든 브랜드도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이런 침체 속에서 뉴욕시는 패션위크를 살리기 위해 모든 마케팅을 총동원했다. 마이클 블룸버그(Bloomberg) 시장이 직접 나서 패션위크 시작 전날인 9월9일을 ‘패션 나이트 아웃’으로 선언하며 분위기를 돋웠다.

800여 개의 패션 점포들이 밤 11시까지 연장영업하며, 패션위크를 알리는 티셔츠를 특별 제작하고, 유명 디자이너가 자신의 가게에서 노래를 불러 사람들을 끌어 들이는가 하면 미트패킹 지역에선 모델워킹 레슨을 무료로 실시했다.

뉴욕시로서는 금융에 이어 2위 산업인 패션마저 계속 침체에 빠져서는 시 재정과 전체 경제가 큰 타격을 받는 게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뉴욕시에서만 17만5000명이 패션 산업에 근무하고, 100억달러의 세수가 바로 패션 산업에서 걷힌다. 펀 맬리스(Mallis) IMG 수석부사장은 “패션쇼를 통해서 2억4000만달러의 매출이 발생한다”고 공개했다.

뉴욕 패션위크는 지난 1993년 브라이언트 공원에서 처음 개최됐다. 뉴욕 패션위크는 프랑스 파리에 일방적으로 눌렸던 뉴욕의 디자인을 세계무대에 알리고, 미국 디자이너들이 자신의 존재를 홍보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지난 2001년부터 IMG가 패션위크 운영권을 소유하고 있다. 뉴욕 패션위크는 관리상의 문제 때문에 16년간 열렸던 브라이언트 공원을 떠나 내년부터는 링컨센터 옆 댐로쉬 공원에서 개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