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를 걸러내는 PVR, DVR의 등장과, 컴퓨터 게임과 광고를 결합한 애드버게이밍이 출현하면서 TV광고가 위협 받고있다. 과연 TV광고시대는 한물간 것일까
 10년간의 인기몰이 끝에 2004년 5월 말 최종회가 방영된 미국의 인기 시트콤 ‘프렌즈’(Friends)는 이날 5000만 명 이상의 시청자를 TV 앞에 앉혀 놓은 것은 물론 30초짜리 광고료를 200만달러(약 24억원)까지 끌어올리는 진기록을 낳았다. 하지만 앞으로도 방송 광고 시장에 이런 신기록 행진이 이어질 것인지는 미지수다. 이미 북미의 대형 광고주들 사이에 ‘TV 광고를 줄이겠다’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TV 광고 시장의 위기는 컴퓨터 기술의 확산과 함께 시작됐다. 지금 현재 가장 강력한 위협 세력은 PVR, 또는 DVR이다. 개인 비디오 녹화기(PVR)와 디지털 비디오 녹화기(DVR)라는 다소 긴 이름의 이 두 장치가 1990년대 말에 선보였을 때만 해도 , 등 북미의 대형 네트워크 방송이나 광고주들은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원하는 방송을 원하는 때에, 그것도 광고 없이 볼 수 있다’는 PVR의 장점이 시청자들에게 먹혀드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미국과 캐나다는 TV 프로그램 중간에 광고를 내보내는 이른바 ‘중간 광고’가 허용된 나라다. 물론 시청자들이 이 중간 광고에 고분고분 승복한 건 아니다. 시청자들이 중간 광고를 피하기 위해 리모컨으로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는 현상이 빚어지자 방송사들은 다른 방송사와 같은 시간대에 광고를 편성하는 방법까지 동원해 광고 노출도를 높이려 했다. 여기에다 ‘맞춤 TV 광고’라는 이름으로 특정 소비자를 겨냥해 시간적, 지역적으로 서로 다른 광고를 제작해 송출하는 시도도 있었다. 전파로 TV 방송을 수신하는 것이 아니라 케이블로 각 가정에 방송이 들어오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광고를 아예 제거할 수 있는 PVR이 등장하면서 이런 다양한 시도들이 무력화하고 있는 것이다.

 PVR을 이용하면 최고 140시간까지 방송 프로그램을 녹화해 뒀다가 컴퓨터 파일을 검색하듯 자기가 원하는 프로그램만 분절(分節)화시켜 찾아내 언제든지 다시 볼 수 있다. 특히 2004년 1월 슈퍼볼(미식축구 결승전) 막간극에서 자넷 잭슨이 일으켰던 ‘가슴 노출 사건’으로 PVR도 덩달아 유명해졌다. 미국의 티보(TiVO)사는 돌발 사태 직후 “가입자들이 결정적 순간을 정지 화면으로 보기 위해 녹화기를 여러 차례 되돌림으로써 본사가 조사한 역대 어느 TV 장면보다 훨씬 많은 화면 재생 건수를 기록했다”고 밝힌 바 있다.

 티보사는 2004년 6월 말 현재 미 전역에 190만 명의 가입자를 확보한 DVR 업계의 선두 업체이다. 이 회사는 올 연말까지 미국 전체 가정의 7%가 넘는 700만 가구가 DVR 장치를 설치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는 불과 1년 전에 비해 두 배에 이르는 수준이다. 시장조사 업체인 양키그룹(Yankee Group)의 추산은 한 발 더 나아간다. 오는 2008년까지 이런 PVR이나 DVR을 갖춘 가정은 미국 전체의 3분의 1까지 증가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런데 선두 업체인 티보사는 지난해 말부터 새로운 형태의 시청률 통계를 발표하기 시작, 방송사들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고 있다. 티보사는 자사의 녹화-재생 기록을 바탕으로 특정 프로그램의 정확한 시청자 수와 광고 시청 빈도를 발표함으로써 광고가 언제, 어디에서 재생되고 있는지 정확하게 찾아준 것이다. 예를 들어 아침 식사 대용 시리얼 광고는 미국의 동부지역보다는 서부지역의 시청자들에게, 저녁 시간보다는 아침 시간에 더 많이 노출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제 광고주들이 쓸 데 없는 비용을 방송 광고에 쏟아 부을 필요가 없어졌다”고 티보사의 이 조사 통계 시스템을 설계한 팀 한론(Tim Hanron) 스타컴미디어(Starcom Media) 부사장은 자랑했다.

 이런 종류의 분석은 기존의 TV 시청률 조사기관인 닐슨사가 피플미터(People Meter) 등 표본 추출 방식으로 조사하던 데 반해 컴퓨터를 이용, 전수 조사를 통해 발표된 만큼 신뢰도가 더 높다는 게 중론이다. 특히 이 조사 결과 시청률이 높은 프로그램이라 하더라도 광고 시청률은 절대적으로 낮은 프로그램이 있는가 하면, 반대의 경우도 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예컨대 의 인기 드라마 ‘프랙티스’가 2003년 4월 방영됐을 때 시청률은 8.9%였지만 시청자의 30%만 광고를 시청한 반면 퀴즈쇼인 ‘더 위키스트 링트’(The Weakest Link)의 경우 0.9%의 시청률에도 불구하고 시청자의 78%가 광고를 열심히 봤다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사정이 이러다 보니 주요 광고주들은 “닐슨사가 발표하는 시청률도 신뢰할 수 없다”고 불만을 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특히 최근 10여 년 동안 히트작 시트콤이 늘어나면서 시청률이 폭발적으로 높아진 건 사실이지만 TV 광고가 얼마나 효과적이었느냐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면서 광고주들 사이에서 “실질적인 광고 시청 시간을 기준으로 광고료를 책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서서히 확산되고 있었다. 이런 불만에다 TV 광고를 대체할 수 있는 신기술의 확산이 뒷받침됐으니 광고주들의 ‘이탈’은 시간 문제였다.

 대형 광고주들 가운데 코카콜라가 가장 먼저 TV 광고와 거리를 두는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우선 코카콜라는 방송 광고를 줄이는 대신 최근 미국에서 가장 인기 높은 프로그램인 <폭스(Fox) TV>의 ‘아메리칸 아이돌’(American Idol)의 심사위원들 앞에 코카콜라 컵을 놓는 데 거금 2000만달러(약 240억원)를 투자했다. 1990년대 한국의 한 방송사에서 내보냈던 ‘스타탄생’과 유사한 형식의 이 프로그램은 미국 전역을 돌며 각 주의 가수 지망생들을 무대에 세워 즉석에서 우승자를 뽑는 방식을 채택함에 따라 심사위원들의 권한이 막강하다. 그래서 방송 시간 내내 심사위원 세 사람에게 수시로 카메라가 비춰진다는 점을 코카콜라가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심사위원들이 계속 콜라를 마시지는 않지만 항상 ‘코카콜라’의 로고가 정면으로 보일 수 있도록 컵을 배치해 둔다.

 간접 광고(PP: Product Placement)라는 비난이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코카콜라 입장에서는 고육지책이라 아니할 수 없다. 지난 수십 년 동안 TV 30초짜리 광고의 가장 큰 물주였던 코카콜라가 지난해 광고 수용자 실태 조사를 한 결과 이미 큰 변화가 감지됐기 때문이다. 코카콜라 광고의 인지도가 지난 1980년대에 비해 40%대로 뚝 떨어진 것이다. 코카콜라가 마케팅 전략상 뭔가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은 전 CEO인 스티븐 헤이어가 지난해 초 “이제 대량의 동질화된 마케팅 시대는 막을 내리고 있다”는 요지의 연설로 뉴욕의 광고 대행사들에 충격을 던졌을 때 예견됐던 일이다.

 결국 지난해 코카콜라는 TV 광고 집행 규모를 1억8800만달러로 줄였다. 2001년에 TV 광고비로 2억7000만달러를 썼던 점을 감안하면 거의 30% 이상 급감한 수준이다. 코카콜라는 이제 이 비용을 일부 돌려 주 소비자층에게 직접 호소하는 데 주로 사용하고 있다. 젊은 네티즌을 잡기 위해 웹사이트도 각 나라에 맞게 새로 꾸몄다. ‘아메리칸 아이돌’처럼 방송 프로그램에 직접 협찬하는 방식은 물론, 청소년들이 주로 다니는 장소에 수시로 접근이 가능한 공간을 제공하는 방법도 채택했다. 북미의 청소년들이 주로 약속을 하거나 무시로 들락거리는 쇼핑몰의 눈에 잘 띄는 위치에 ‘코크 레드 라운지’(Coke Red Lounge)라는 이름으로 일정한 공간을 확보한 뒤 그들이 즐겨 듣는 음악을 틀어 주고 영화도 보여 주는 것이다. 물론 코카콜라의 상징색인 빨간색 라운지 한편에는 자동 판매기가 설치돼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TV 광고 시장의 위기를 심화시킨 또 하나의 대체 수단은 컴퓨터 게임과 광고를 결합한 소위 ‘애드버 게이밍’(Adver-gaming)이다. 관련 업계가 추산하는 시장 규모는 내년까지 약 10억달러선(1조2000억원). 애드버 게이밍은 소비자가 컴퓨터 게임을 실제로 해 보면서 제품의 성능을 경험할 수 있는 것에서부터 단순하게 비디오 게임 화면 배경에 자사 제품을 등장시키는 방식까지 다양하다.

 최근 컴퓨터 게임 개발 전문업체인 일렉트로닉 아츠(Electronic Atrs)사는 신제품을 만들면 자사를 비디오 게임 속에 넣어달라는 기업들이 쇄도, 즐거운 비명을 올리고 있다. 심지어는 엘릭트로닉 아츠사가 새로운 게임을 개발하기 전부터 아츠사의 비디오 게임 광고를 따내기 위해 경합을 벌이기도 한다. 몇 년 전만 해도 게임업체들이 기업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해당 회사 브랜드를 게임 내용에 넣을 수 있게 해달라고 애걸하던 게 흔한 일이었지만 이제는 180도 역전된 것이다. 이에 따라 새로 출시되는 비디오 게임에 다양한 방식으로 광고를 포함시키는 일도 점점 증가하고 있다.

 이 같은 최근 분위기를 반영하듯 광고회사들도 속속 비디오 게임 광고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광고업체 퍼블리시스그룹(Publicis Group)은 최근 비디오 게임 광고만을 전문으로 하는 서비스를 시작해 기업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다. 세계적인 광고회사 WPP 그룹도 비디오 게임 광고 대행 서비스를 조만간 시작할 예정이다.

 애드버 게이밍이 확산되는 배경에는 컴퓨터 게임의 대중화가 큰 몫을 했다.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시에 본사를 둔 포레스트 리서치(Forrest Research)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의 비디오 게임 시장 규모는 전년에 비해 43%가 증가한 94억달러(약 11조원)였다. 이는 할리우드 영화의 매출 실적인 83억달러(약 9조9000억원)를 능가하는 수준이다.

 실제로 자동차 메이커인 다임러크라이슬러가 지난해 새로운 브랜드 ‘랭글러 루비콘’(Wrangler Rubicon)을 출시했을 때 TV 광고를 피하고 게임을 만들어 온라인에 띄우는 방식을 먼저 채택했다. 비디오 게임 속에 새 자동차와 똑같은 모형을 집어넣어 소비자들이 게임을 즐기면서 자연스럽게 새 브랜드에 친숙하게 만드는 방법이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6개월 만에 25만 명의 소비자들이 이 비디오 게임을 다운로드해 즐겼고, 이들 소비자는 모두 크라이슬러의 자동차 비디오 게임 동호회원으로 등록했다. 크라이슬러는 동호회원을 대상으로 집중적인 마케팅을 펼칠 수 있었고, 그 결과 이들에게 수천 대의 랭글러 루비콘 차량을 판매할 수 있었다. 동호회 회원들은 지금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애드버 게임 사이트를 이처럼 별도로 구축하는 사례도 있지만, 아예 자사의 홈페이지를 애드버 게임 사이트로 바꾸는 기업도 있다. 최근 인기를 모으고 있는 식품업체인 크래프트(Kraft Co.)의 애드버 게임 사이트(candystand.com)와 음료수 환타의 홈페이지(fanta.com)가 각각의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 사이트는 네티즌들이 자신의 신상 정보를 일부 제공해야 게임을 시작할 수 있도록 구성돼 업체로서는 광고 효과에다 소비자 정보 획득이라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올리고 있다.

 애드버 게이밍은 컴퓨터 기반을 활용해 빠르고 정확한 통계를 광고주들에게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TV 광고와 차별되고 있다. 애드버 게이밍 관련업체인 야야(YaYa Co.)에 따르면 이메일로 전송된 특정 기업의 게임을 다운로드한 소비자들의 50% 이상이 최소 25분 동안 게임을 즐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게임을 자신의 친구들에게 전송했다. 90%의 소비자들이 이 이메일을 친구들에게 알리거나 전송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 같은 결과는 광고주들이 꿈에도 그리는 ‘소비자와 관계 구축’(CRM)에 성공했다는 얘기가 된다.

 이와 함께 비용이 저렴하다는 점에서 애드버 게이밍은 광고주들에게 더욱 환영받고 있다. ‘아메리칸 아이돌’에 30초짜리 광고 한 번 내보내는 데 최고 65만달러(약 8억원)가 드는 반면 애드버 게이밍의 초기 비용은 15만달러(약 1억9000만원)선이다.

 닐슨엔터테인먼트가 최근 발표한 시청률 조사에 따르면 요즘 미국의 18~34세 사이의 청년들의 TV 시청 시간은 지난해보다 7% 이상 감소했다. 닐슨에 따르면 사정이 이런데도 미국의 광고주들은 이들을 대상으로 지난해 80억달러 이상을 쏟아 부은 것으로 나타났다.

 19세기 말 북미의 대형 광고주였던 존 워너메이커(John Wanamaker; 일종의 ‘천냥하우스’를 최초로 미국에 소개한 사업가)는 “내가 부담한 광고료 중 절반이 허비된다는 건 알겠는데, 과연 나머지 절반은 어떻게 쓰이는지 정말 궁금해”라는 말을 남겼다. 100여 년 전 그때야 과학적인 분석 기법이 없어서 광고주들이 저렇게 참고(?) 넘어갔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있을 때 잘 해~”라는 유행어가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북미의 방송업계에 절실하게 느껴질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