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오후 시민들이 도쿄 시내 전광판에 나오는 아키히토 일왕의 메시지를 보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로이터>

“천황이 건강을 해쳐 심각한 상태에 이르면 지금까지 보았듯이 사회가 정체되고 국민의 삶에도 다양한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8월 8일 오후 3시, 아키히토(明仁·83) 일왕은 ‘물러나겠다’며 대국민 메시지를 공개했다. 전날 도쿄 왕궁에 있는 고쇼(御所·개인 거처)에서 찍은 동영상 메시지다.

“전후(戰後) 70년이라는 큰 시기를 넘기고, 2년 뒤에는 헤이세이(平成) 30년이 됩니다. 저도 80세를 지나며 체력 등 다양한 제약이 나타남을 느끼곤 합니다”라고 시작한 이 메시지에서 아키히토 일왕은 생전에 퇴위해야 하는 이유를 자세히 설명했다. 그중 하나가 ‘사회 정체’ 우려다.

헤이세이라는 연호를 쓴 28년간 일본 역사는 ‘잃어버린 시기’로 요약된다. 버블 경제가 붕괴됐고, ‘잃어버린 20년’을 겪었다. 1988년 시가총액 기준으로 세계 최대 기업은 일본 통신회사 NTT였다. 뒤를 이어 스미토모(住友)은행, 다이이치간교(第一勸業)은행, 후지(富士)은행, 도쿄전력, 미쓰비시(三菱)은행, 일본개발은행, 노무라(野村)증권 등 8개 기업이 시가총액 상위 10위 안에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지난해에는 10위 안에 일본 기업은 하나도 없고, 도요타자동차가 17위로 가장 높았다.

일본을 재건하겠다며 아베노믹스가 야심차게 시작됐지만 3년이 지난 현재 성공 여부를 장담하기 힘들다. 이미 실패한 정책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경제가 성장하지 못하고 사회가 정체되자 정치적으론 극우화됐다.

쇼와 시대(1926~89년)엔 일본이 세계를 삼킬 듯한 기세였다. 그러나 헤이세이 시대(1989년 이후)에 일본은 저무는 해가 됐다. 28년간 일본은 어떻게 변했을까.



아키히토 일왕이 퇴임하면 왕위를 승계하게 되는 나루히토(德仁) 왕세자와 마사코(雅子) 왕세자비, 딸 아이코 (愛子) 공주. <사진 : 연합뉴스 AP>

‘잃어버린 20년’의 근원, 헤이세이 버블

헤이세이 시대 일본 침체에 영향을 준 첫 번째 사건은 아키히토 일왕이 즉위하기 3년 3개월 전에 일어났다. 1985년 9월 뉴욕 플라자호텔에서 체결된 ‘플라자 합의’다. 합의 전 일본 엔화는 1달러에 240엔 정도에서 거래됐으나 합의 후 1년 만에 120엔대로 떨어졌다. 합의 직후 일본 수출 산업은 큰 타격을 입었고 ‘엔고(円高) 불황’을 겪었다.

그러자 일본은행은 경기를 살리려 저금리 정책을 시행했다. 1987년 2월엔 일본은행이 민간은행에 대출해주는 정책금리를 2.5%까지 낮췄다. 은행이 경쟁적으로 대출을 해주자 대도시를 중심으로 부동산값이 빠르게 뛰었다. 1987년부터 1990년까지 지가 폭등이 계속됐다. 일본 전 국토의 지가는 1990년이 되자 1985년의 2.4배가 됐다. 지나고 보니 버블이었다. 버블이 정점에 달했을 때 일본의 모든 땅을 팔면 미국 전 국토를 4개 살 수 있었다.

플라자 합의 후 1986년 12월부터 1991년 2월까지 4년 3개월간 일본은 자산 가격이 상승하고 경기가 좋았다. 아키히토 일왕은 이 버블이 정점을 지날 때 즉위했다. 그래서 이를 ‘헤이세이 버블 경기’라고 부른다.

버블 붕괴 후 1992년부터 일본의 경제성장률은 0~2%를 기록하며 저성장이 20여년째 이어지고 있다. 때로는 국내총생산(GDP)이 줄어드는 역(逆)성장을 하기도 했다.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1990년대 중반부터 4만달러 언저리에서 맴돌다가 최근 아베노믹스로 엔화 가치가 하락하며 3만달러 수준으로 떨어졌다. 닛케이지수는 1989년 12월 29일 3만8915엔87전으로 최고치를 기록했고, 1990년부터 빠르게 추락했다. 아베노믹스 이후 연기금과 일본은행이 주가를 부양하고 있지만 2만을 넘기기도 힘든 상황이다.

버블이 꺼진 뒤 1993년 일본 정부는 경제백서에서 버블이 얼마나 위험한지 고백했다. “우리들은 버블의 역사적 교훈으로 버블의 경제적 비용이 얼마나 큰지 확인했다. 버블이 발생하면 반드시 붕괴한다. 그 과정에서 경제 타격은 피할 수 없다. 따라서 경제정책을 운용할 때는 버블 발생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공짜 점심은 없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할 수는 없다’는 경제 대원칙이 재확인됐다.”

버블이 급속하게 붕괴된 원인은 일본 대장성(현 재무성)이 지가를 낮추려고 도입한 총량규제 정책에서 비롯됐다. 대장성은 △부동산 대출액 증가율을 총대출 증가율 이하로 억제(총량대출) △부동산업·건설업·비은행(주택금융전문회사 포함)에 대한 융자 실태 보고 요구(3업종 규제) 등 두 가지 대책을 실시했다. 당시 대장성 장관은 1996년 1월부터 1998년 7월까지 총리를 지낸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郎)였다.



8일 도쿄의 한 전자제품 양판점에 전시된 TV에서 일왕의 대국민 메시지가 나오고 있다. 이 TV는 일본 전자업체 샤프가 생산한 아쿠오스(AQUOS) TV다. 샤프는 경영난을 겪다 올해 대만 훙하이에 인수됐다. <사진 : 연합뉴스 AFP>

하시모토·고이즈미·아베, 경제 개혁 도전

1990년 가을에 접어들 무렵 일본 언론들은 토지 가격을 낮춰야 한다는 여론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NHK는 ‘토지 가격을 50% 내릴 수 있을 것인가’라는 주제로 5일 연속 토지신탁 파산 방송을 내보냈다. 이런 가운데 도시 지역의 지가 하락이 현저해졌다. 여기에 더해 일본은행은 지가 상승을 억제한다며 1989년 12월부터 1990년 8월까지 정책금리를 6%로 끌어올린 뒤 1991년 7월까지 1년 가까이 유지했다. 이 때문에 은행 대출이 억제되고, 통화 공급량이 증가하지 않았다. 1991년 말이 되니 토지 거래가 극단적으로 줄었고, 도쿄와 오사카 등 대도시권의 지가는 정점의 절반 이하 수준으로 급락했다.

토지 가격이 떨어지자 일본 경제가 얼어붙었다. 지가가 안정적으로 상승한다는 것을 전제로 은행은 토지를 담보로 자금을 제공했다. 담보로 제공해야 할 땅이나 주식 가격이 떨어지자 많은 기업이 자금 조달 능력을 잃었다. 땅을 담보로 돈을 빌려준 은행은 담보가 아래로 떨어진 부동산을 대량으로 껴안게 됐고 부실 채권은 늘어만 갔다. 더 이상 일본은행이 정책금리를 인하해도 자금이 은행에서 기업으로 흘러가지 않게 되자 일본의 성장 신화가 멈췄다.

일본 경제를 다시 살리기 위해 1996년 1월 총리에 취임한 하시모토 전 총리는 행정·재정구조·금융·사회보장·경제구조·교육 등 6대 개혁을 추진했다. 2001년부터 5년 5개월간 총리직에 있었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전 총리는 우정사업 민영화 등 신자유주의적인 개혁을 추진했고, 양적완화 정책도 세계 최초로 실시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2012년 12월 집권한 후, ‘아베노믹스’의 깃발을 들고 더 강력해진 양적완화 정책을 실시 중이다. 그러나 일본 경제가 과거의 활력을 되찾을 수 있을지는 아직 판단하기 이르다.

헤이세이 초기에 일본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慎太郎) 전 도쿄도지사가 소니 창업자 모리타 아키오(盛田昭夫)와 함께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을 펴냈을 때는 1989년 1월이다. 책에서 이시하라 전 도지사는 “일본은 존중받아야 하는 강대국이고, 미국과 거래할 때 일본인은 권리나 의견을 더 강하게 주장해야 한다”고 했다. 이 책은 1990년 일본에서 베스트셀러 3위에 올랐다.

그러나 일본의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고, 일본인들은 미국을 앞서기는커녕 자신감을 잃어버렸다. ‘잃어버린 10년’을 겪은 후인 2006년엔 <국가의 품격>이 베스트셀러가 됐다. 후지와라 마사히코(藤原正彦) 오차노미즈여대 교수는 일본인은 조국에 대한 긍지와 자신감을 상실하게 하는 교육을 받았다며 무사도 정신을 부활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이 세계를 본격적으로 구할 민족은 일본 민족밖에 없다”고 했다. 오래된 침체로 자신감이 부족해진 일본인을 북돋우는 말이다.


‘노(NO)라고 말할 수 없는 일본’

비슷한 주장을 걸그룹도 했다. 모닝구무스메는 1999년 9월 발매된 ‘러브 머신’이란 곡에서 “아무리 불경기여도 사랑은 인플레이션” “일본의 미래는 세계가 부러워해/사랑을 할 수 있잖아”라고 말한다. 이 싱글앨범은 164만장 팔렸다.

하지만 불경기가 오래되자 일본인들은 조국의 긍지보다는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쪽을 택했다. 지난해 일본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은 개그맨 마타요시 나오키(又吉直樹·36)가 쓴 <불꽃(火花·히바나)>이라는 소설이다. 인기 없는 개그맨 도쿠나가가 비슷한 처지인 선배 가미야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가혹한 경쟁 사회에서 고군분투하는 젊은이들의 방황을 섬세하게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버블의 마지막쯤인 1991년 1월부터 3월까지 방영돼 일본 전국적으로 인기를 끈 후지TV의 ‘도쿄 러브 스토리’는 일본 트렌디 드라마를 완성한 작품이다. 최고 시청률은 32.3%까지 나왔다. 그 다음해 방영된 한국 드라마 ‘질투’가 이 작품을 일부 표절했다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주제곡은 일본 국민가수 오다 카즈마사(小田和正)가 부른 ‘러브 스토리는 돌연히’다. 이 곡이 수록된 싱글앨범은 총 258만장 판매돼 이 해에 가장 히트한 곡이 됐다.


1991년 후지TV에서 방영된 ‘도쿄 러브 스토리’의 남녀 주인공 오다 유지(織田裕二·왼쪽)와 스즈키 호나미(鈴木保奈美). <사진 : 후지TV>

하지만 그 10년쯤 뒤엔 한류 드라마가 일본을 휩쓸었다. 2003년 일본 NHK에서 ‘겨울연가(冬のソナタ)’가 방영됐고, 사회 현상이 됐다. 2004년 지상파 방송을 타자 최종회는 시청률 20.4%라는 높은 기록을 세웠다.

이후 한국 드라마가 연이어 일본에서 인기를 끌자 2011년에는 한류 콘텐츠를 많이 편성하던 후지TV 사옥 앞에서 혐한(嫌韓) 시위가 일어나는 퇴행적 사건도 발생했다. 혐한 운동을 이끌던 재특회(재일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 모임) 전 회장인 사쿠라이 마코토(櫻井誠·44)는 올해 7월 31일 치러진 도쿄도지사 선거에 출마해 1.7%의 득표율로 21명의 후보 중 5위를 차지했다.


‘버블로 GO! 타임머신은 드럼식’ 포스터.

일본이 버블 붕괴 충격에서 오랫동안 벗어나지 못하는 게 아쉬웠는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버블을 그대로 유지시킨다는 영화도 나왔다. 2007년에 개봉한 ‘버블로 고(GO)! 타임머신은 드럼식’의 줄거리는 유흥주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프리터 다나카 마유미(히로스에 료코·廣末凉子)에게 재무성 관료 시모카와지 이사오(아베 히로시·阿部)가 접근해 1990년으로 돌아가 버블 붕괴를 막게 한다는 내용이다.

드럼식 세탁기인 타임머신을 타고 버블 당시로 돌아간 마유미는 ‘디스코텍’에 갔다가 처음 본 남성에게 티파니 목걸이를 선물 받고, 우연히 만난 대학생과 요트 파티에 갔다가 경품으로 200만엔을 받는다.

버블을 피부로 느낀 마유미는 요트 위에서 터지는 폭죽을 배경으로 샴페인을 들고 “버블 최고!”라고 외친다. 결국 1990년 3월 대장성이 부동산 대출 총량규제를 하지 못하게 막아 지가가 떨어지지 않도록 해 역사를 바꾸는 것으로 영화가 마무리된다.

손덕호 기자

  • 목록
  • 인쇄
  • 스크랩
ⓒ 조선경제아이 & econom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