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8월 15일 도쿄의 일본부도칸(日本武道館)에서 열린 전국 전몰자 추도식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아키히토 일왕 내외 앞을 지나가고 있다. 일본이 제2차세계대전에서 패배한 70주년에 열린 이 행사에서 아키히토 일왕은 처음으로 “앞서 있었던 대전(大戰)에 대해 깊은 반성”이라고 언급했다.<사진 : 연합뉴스 로이터>
2015년 8월 15일 도쿄의 일본부도칸(日本武道館)에서 열린 전국 전몰자 추도식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아키히토 일왕 내외 앞을 지나가고 있다. 일본이 제2차세계대전에서 패배한 70주년에 열린 이 행사에서 아키히토 일왕은 처음으로 “앞서 있었던 대전(大戰)에 대해 깊은 반성”이라고 언급했다.<사진 : 연합뉴스 로이터>

헤이세이 버블이 붕괴한 후 일본 경제는 혼란스러운 정치권 때문에 더 큰 어려움을 겪었다. 1994년 4월 취임한 하타 쓰토무(羽田孜) 전 총리(제80대)는 단 64일간 재임해 역대 두 번째로 짧은 재임 기록을 세웠다.

헤이세이 시대에 총리를 지낸 16명의 인물 중 경제 구조 개혁을 추진한 사람은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郎),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아베 신조(安倍晋三) 등 세 명이다. 하시모토 전 총리는 대규모 금융개혁을 실시했고, 고이즈미 전 총리는 세계 최초로 양적완화를 도입했다. 아베 총리의 아베노믹스는 현재 진행형이다.

하시모토 전 총리는 1990년 3월 대장성이 총량규제를 도입할 때 대장성 장관이었다. 은행의 부동산 대출을 억제해 헤이세이 버블이 꺼지는 원인을 제공한 셈이다. 그는 6년 뒤인 1996년 1월 총리에 취임했다. 그가 일본 경제 개혁을 위해 꺼내 든 카드는 금융 시스템을 개혁한 ‘금융빅뱅’이다.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가 1986년 실시한 증권제도 개혁이 ‘빅뱅’이라 불린 데서 유래한다. ‘일본판 빅뱅’이다.


버블 붕괴 불러온 하시모토

버블 붕괴 후 일본은 저금리와 엔화 약세를 유지해 경제 회복을 꾀했지만 일본에 유입된 해외 자금이 이탈하는 부작용이 발생했다. 또 은행 산업이 부실화하자 대출이 부진해졌고, 금융 개혁 없이 일본 경제가 회복할 수 없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고령화가 진행되자 금융 기능이 산업 부문에 자금을 공급하는 것에서 가계가 자산을 운용해 수익을 얻을 수 있는 방향으로 전환해야 했다. 1996년엔 일본 개인 금융자산 1209조엔 중 765조엔(63.3%)이 수익성이 낮은 현금이나 예금으로 운용되고 있었다.

1996년 11월 하시모토 전 총리는 금융분야 전반에 걸친 집중적 개혁을 지시했다. 원칙은 △자유경쟁(시장 원리가 작동하는 자유시장) △공정화(투명하고 신뢰할 수 있는 시장) △글로벌(국제적이고 시대를 앞서갈 수 있는 시장) 세 가지였다. 이에 따라 지주회사 또는 자회사를 통해 은행·증권·보험업이 상호 진출할 수 있게 했고, 상품 규제를 폐지해 다양한 서비스를 개발할 수 있게 했다.

하시모토 전 총리의 개혁은 처음엔 환영받았다. 그러나 개혁에 착수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시아 각국에서 통화위기가 발생해 일본도 영향을 받았다. 또 1997년 11월부터 홋카이도다쿠쇼쿠(北海道拓殖)은행과 산요(三洋)증권, 야마이치(山一)증권 등 대형 은행과 증권사 파산이 이어지면서 금융시장이 혼란을 겪었고 개혁이 동력을 잃었다. 그러나 금융빅뱅은 하시모토 전 총리가 퇴임한 후인 2001년까지 계속됐다.

고이즈미 전 총리는 2001년 4월부터 5년 5개월간 총리를 지냈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총리 중에서 세 번째로 긴 임기였다. 고이즈미 내각은 2001년 7월 참의원 선거 여당 승리에 힘입어 9월부터 구조 개혁에 착수했다. 당시 국제적 유행이던 신자유주의에 따른 개혁 조치가 많았다.

대표적인 신자유주의 개혁이 우정(郵政) 민영화다. 국영이던 우정 사업을 민간기업으로 바꾸는 작업이다. 일본 우정성은 행정 개혁의 일환으로 2002년 우정공사로 재편됐고, 고이즈미 전 총리는 2003년 9월 우정 사업을 4개 회사로 분할한다는 민영화 방침을 세웠다.

2004년 3월 기준 우정공사의 우편저금·간이보험 자산은 350조엔으로 일본 전체 금융자산(1400조엔)의 4분의 1에 해당했다. 예금 잔액 227조엔은 4대 민간은행 예금 잔액(226조엔) 수준이었고, 간이보험 총자산(122조엔)은 4대 생명보험사 총자산(121조엔)과 비슷했다. 이렇게 막대한 규모의 돈이 국채 매입을 통한 재정적자 보충과 지자체 자금 지원 등에 사용돼 왔다. 고이즈미 전 총리는 마치 예산처럼 사용된 우정공사 자금을 개혁해 재정건전화를 달성하려 했다. 또 우정공사가 자금을 주식이나 다른 나라의 국채에 투자할 수 있게 하면 ‘투자 펀드’ 역할도 할 수 있다. 우정 민영화는 지난해 11월 일본우정과 자회사인 우정은행, 간포생명이 도쿄증시에 상장하며 결실을 봤다.


고이즈미 보다 더 강해진 아베의 완화 정책

한편으로는 일본은행이 고이즈미 내각이 출범하기 전인 2001년 3월부터 세계 최초로 양적완화 정책을 실시했다. 일본은행은 경기를 부양하려고 1999년 2월부터 2000년 8월까지 제로금리 정책을 실시했다. 하지만 이후 경기 회복이 늦어지자 고이즈미 내각이 출범하기 직전인 2001년 3월, 시장에 자금을 직접 공급하는 양적완화 정책과 동시에 제로금리를 다시 도입했다.

일본은행은 2006년 3월 양적완화를 중단했고, 2006년 7월 정책금리인 콜금리 목표치를 0%에서 0.25%로 올리며 제로금리에서 탈출했다. 일본은행은 당시 “일본 경기는 내수·외수, 기업·가계 부문에서 균형이 유지된 채 점진적으로 확대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완만하게 확대될 것”이라고 미래를 낙관적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2008년 리먼 사태로 글로벌 금융위기가 일어났고, 2011년 동일본대지진이 발생하자 일본 경제가 큰 타격을 받았다. 2011년엔 엔화가 1달러당 80엔을 밑돌며 수출이 부진에 빠졌다.

이런 상황에서 2012년 12월 아베 총리가 취임했고 아베노믹스가 실시됐다. 대담한 금융완화, 기동적 재정운영, 성장전략이라는 ‘세 개의 화살’이 핵심 요소다. 양적완화와 저금리라는 점이 고이즈미 내각 당시 시행된 정책과 비슷해 부정적인 견해도 나왔다. 아베 2차 내각이 출범한 2013년 초 월스트리트저널은 아베 신조 총리의 대담한 금융 완화와 관련해 고이즈미 전 총리 시절에도 비슷한 정책이 추진됐지만 성과는 제한적이었다고 지적했다.

아베노믹스가 고이즈미 내각 당시의 양적완화와 다른 점은 양적·질적완화(이차원 완화)를 실시한다는 것이다. 본원통화가 증가하도록 금융시장을 조정하고(양), 중앙은행이 상장지수펀드(ETF) 등 리스크가 있는 자산과 국채를 매입한다(질)는 점이 다르다. 또 올 들어 민간은행이 일본은행에 예치하는 자금(당좌예금)에 연간 0.1%의 수수료를 부과하는 ‘마이너스 금리’를 도입하기로 일본은행이 결정한 점도 고이즈미 정부 때와 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