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공항에서 그랩 로고를 입힌 택시가 승객을 태우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사진 : 블룸버그>
싱가포르 공항에서 그랩 로고를 입힌 택시가 승객을 태우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사진 : 블룸버그>

전 세계 차량 공유 서비스 업체 중에선 우버가 가장 유명하다. 2009년 등장해 기존 택시보다 저렴한 요금과 편리한 이용 방법으로 세계인들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일부 지역에선 우버와 비슷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현지 기업이 인기를 끌고 있다. 동남아시아의 ‘그랩(Grab)’도 그중 하나다.

동남아에서 ‘우버의 라이벌’인 그랩에 소프트뱅크, 알리바바 등 일본과 중국 기업이 앞다퉈 투자하고 있다. 현재 그랩은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태국, 베트남, 필리핀, 미얀마 등 7개국 65개 도시에서 이용할 수 있다. 전 세계 600여 도시에서 탑승할 수 있는 우버와 비교하면 이용할 수 있는 지역은 적지만, 7개국의 인구를 모두 더하면 6억명이나 될 정도로 잠재력이 크다.


하버드 MBA 동기가 공동 창업

하버드대 경영대학원(MBA) 동기(2011년 졸업)인 안소니 탄(최고경영자·CEO)과 탄 후이링(최고운영책임자·COO)은 2012년 6월 말레이시아에서 우버와 유사한 택시 예약 앱을 출시했다. 안소니 탄 CEO가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에 다니던 시절, 동료 학생이 그에게 말레이시아에서 택시 잡기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한 게 계기가 됐다. 그는 2011년 하버드 비즈니스플랜 경연대회에서 2위로 입상했고, 이후 엔젤펀드의 투자를 받아 회사를 세웠다. 그랩은 다음 해인 2013년 8월 필리핀에, 10월 싱가포르와 태국에 진출했다. 2014년엔 베트남과 인도네시아에서 서비스를 시작했고, 올해 3월엔 미얀마에서 첫선을 보였다.

그랩은 우버보다 앞선 현지화로 고객을 확보하고 있다. 우버의 장점은 차량에 탑승한 뒤 목적지에 내리면 회원 가입할 때 등록한 신용카드로 요금이 자동 청구돼 따로 계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용카드 보급률이 낮은 나라에선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는 고객이 많아 불리하다. 그랩은 요금을 현금으로 낼 수 있게 했다. 신용카드 보급률이 낮은 인도네시아 같은 나라에서 유용하다.


그랩 공동창업자 안소니 탄 CEO(왼쪽)와 탄 후이링 COO. <사진 : 블룸버그>
그랩 공동창업자 안소니 탄 CEO(왼쪽)와 탄 후이링 COO. <사진 : 블룸버그>

인도네시아 오토바이 호출서비스도 운영

우버는 택시 기사의 생존권을 위협한다는 반발을 샀지만, 그랩은 택시 업계와 공존을 택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우버와 달리 정식 면허를 가진 택시 기사도 호출할 수 있게 했다. 필리핀 마닐라의 경우 그랩은 400여개 택시 회사 중 300여 개사와 제휴를 맺었다. 이들은 그랩을 사용하기 시작한 후 하루 매출이 종전보다 2.5배쯤 늘었다. 택시 기사들이 손님을 태우기 위해 돌아다니지 않아도 돼 휘발유 사용량도 줄었다. 택시 업계와 공존을 선택하자 현지 정부와의 갈등도 우버보다 적다. 덕분에 동남아시에선 우버보다 그랩 이용자가 더 많다. 가격도 우버보다 그랩이 더 저렴한 편이다.

그랩은 인도네시아에선 자동차가 아닌 오토바이 호출 서비스도 운영하고 있다. 오토바이 호출 서비스는 인도네시아 자체 스타트업인 고젝(Go-Jek), 우버와 경쟁하고 있다.

동남아에서 그랩이 시장을 장악해 나가자 일본과 중국 기업들은 그랩에 앞다퉈 투자하고 있다. 7월 16일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그랩이 소프트뱅크와 ‘중국판 우버’ 디디추싱(滴滴出行)으로부터 총 20억달러(약 2조2400억원)를 유치하기 위해 협상 중이라고 보도했다. 논의가 마무리되면 그랩의 가치는 50억달러(약 5조6000억원)를 넘어 동남아 스타트업 중 가장 가치가 높은 기업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소프트뱅크와 디디추싱은 지난해에도 그랩에 투자했다. 우버를 중국에서 몰아내고 우버차이나를 인수한 디디추싱은 그랩, 미국의 리프트, 인도의 올라택시와 협력해 우버를 압박하고 있다. 이들은 각사의 고객들이 여행을 갔을 때 제휴사의 서비스를 통해 현지에서 차량을 호출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소프트뱅크는 우버를 상대로 경쟁하는 이 네 개 회사에 모두 투자했다.

지난달 마윈(馬雲) 알리바바 회장도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과 공동으로 그랩에 투자한다고 밝혔다. 알리바바가 그랩에 투자하면 동남아 지역 수백만 명의 택시 승객을 중국 최대 간편결제 서비스 알리페이 고객으로 확보할 수 있다. 현재 그랩은 요금을 낼 때 알리페이를 이용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그랩으로 택시를 탄 뒤 요금은 ‘그랩페이(GrabPay)’ 또는 현금으로 낼 수 있다. 그랩페이는 신용카드를 등록하거나 알리페이 계정을 입력하면 된다. 신용카드 없이 알리페이만으로 택시를 탈 수 있는 것이다. 알리페이는 현재 주로 중국에서만 사용되고 있다. 동남아는 알리페이가 진출을 노리는 지역이다. 

그랩은 지난해 일본 혼다자동차 등으로부터 7억5000만달러의 투자를 유치하기도 했다. 그랩은 투자를 계기로 자동차 공유 기술과 운전자 교육 프로그램을 일본 혼다와 공동 개발하기로 했다.


Plus Point

‘자율주행차 택시’ 시범 운행

그랩은 미국의 자율주행차 스타트업 누토노미(nuTonomy)와 손잡고 작년 8월 말부터 싱가포르에서 세계 최초로 자율주행차 택시를 운행하고 있다. 택시 기사라는 직업은 자율주행차가 상용화되면 없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그랩은 자율주행차 10대를 택시 예약 서비스에 투입해, 1년간 고객의 반응을 살피고 운전자 없는 차량 호출 서비스를 실제 테스트하고 있다.

누토노미는 매사추세츠공대(MIT) 출신들이 창업한 스타트업이다. 공동 창업자이자 최고기술책임자(CTO)인 에밀리오 프라졸리 MIT 교수는 “싱가포르는 장거리 주행이 적고 교통 혼잡이 심한 편”이라며 “자율주행차 택시는 적은 차량으로 같은 교통량을 감당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랩과 누토노미의 협업은 자율주행차를 시험 운행해보는 것이어서 제약이 있다. 기사가 차량 뒷좌석에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대기한다. 주행 지역도 차량 소통이 상대적으로 적은 싱가포르 일부 지역으로 제한했다. 자율주행차 택시 호출도 그랩 측이 선정한 일부 고객이 대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