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공과대학(CTU) 산하 정보과학·로봇·인공두뇌 연구소(CIIRC) 내부 시뮬레이션 센터. <사진 : 이윤정 기자>

체코 프라하의 북쪽 외곽에 위치한 체코공과대학(CTU) 산하 정보과학·로봇·인공두뇌 연구소(CIIRC). 이곳 1층엔 연구원들의 책상 대신 거대한 은색 레일이 대부분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레일 위는 아무것도 올려져 있지 않은 채 고요하다. 그러나 바로 옆 컴퓨터에 설치된 VR(가상현실) 고글을 쓰고 레일을 쳐다보면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진다. 팔 하나가 달려 있는 주황색 로봇 네 대가 레일 위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며 자동차 부품을 조립하고 있다.

이곳의 소프트웨어 개발과 운영을 담당하고 있는 ‘팩토리코 솔루션’은 체코공과대학의 연구 실적을 바탕으로 창업한 스핀오프 스타트업이다. 독일의 글로벌 기업 지멘스 등 대기업과 개발 협력을 하고 있다. 마틴 론(Martin Ron) 팩토리코 솔루션 엔지니어는 “이곳은 생산라인에 투입될 로봇이 개발을 마친 뒤 실제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될지 시뮬레이션하는 공간”이라며 “시뮬레이션 과정 없이 바로 현장에 투입될 경우 여러 번 시행착오를 겪게 되는데, 이렇게 가상현실을 통해 사전에 검증하면 비용과 시행착오 과정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고, 설치까지 완료되는 시간을 30%가량 단축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전통 제조업 강국으로 꼽히는 체코가 인더스트리 4.0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인더스트리 4.0이란 정보통신기술(ICT)을 활용한 제조업 혁신 전략으로, 독일에서 처음 시작됐다. 공장을 무인화하고, 이 무인화된 공장을 다른 공장과 연결한다. 모든 작업과정은 인공지능이 통합적으로 관리한다. 기존 재래식 공장을 ‘스마트’하게 진화시키는 것이다. 노동자가 생산 과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낮아지고, 창의적인 기술 개발과 혁신이 제조업의 경쟁력을 좌우하게 된다. 낮은 인건비를 바탕으로 제조업 경쟁력을 끌어올렸던 체코는 최근 실업률이 크게 낮아져 완전고용 상태에 다다르는 등 인건비가 큰 폭으로 상승하고 있다. 이런 체코에 인더스트리 4.0은 필연적 과제다.


전통 제조업 강국 체코… GDP 27% 차지

세계 어느 도시를 가도 차가 밀리는 시간대는 비슷하다. 아침과 저녁, 즉 출퇴근 시간대다. 그러나 체코 믈라다 볼레슬라프(Mlada Boleslav)는 다르다. 이곳의 러시아워는 오전 6시, 오후 2시·10시 세 번이다. 체코의 ‘국민 자동차’로 불리는 스코다 오토의 핵심 공장이 이곳에 위치한 탓이다. 하루 3500대의 자동차를 쏟아내기 위해 2만2000명이 3교대로 일하는데, 교대 시간마다 최소 7000명의 직원이 움직이면서 교통체증이 발생한다. 스코다 오토 관계자는 “5000대의 자동차가 이틀에 한 번씩 출고되고, 매일 950대의 트럭이 공장을 드나든다”고 했다.

체코는 자동차의 나라다. 자동차 산업이 전체 제조업의 20%를 차지해 체코 경제를 지탱하는 제1산업이라고 불린다. 2016년 기준 체코 자동차 생산량은 134만 대로, 유럽 전체 국가 중에선 5위, 중동부 유럽 국가 중에선 1위 자동차 생산국이다. 자동차 부품 산업도 함께 발달했다. 글로벌 100대 자동차 부품 기업 중 60여 곳이 체코 내 거점을 두고 있다. 자동차 부품 업체가 800여 곳에 달해 부품 조달부터 완성차 생산까지 전 공정을 체코 내에서 끝내는 것이 가능하다.

자동차 산업에 힘입어 체코는 유럽 내에서도 손꼽히는 제조업 강국으로 성장했다. 체코 제조업은 국내총생산(GDP)에서 27%를 차지하는데, 이는 프랑스(11.4%), 폴란드(18.4%), 독일(22.2%), 헝가리(23.3%) 등에 비해 훨씬 높은 수준이다. 2000년대 이후 유럽 글로벌 기업의 생산기지로 거듭나면서 그 위치가 더욱 공고해졌는데, 이는 체코의 수준 높은 제조 기술은 물론 지리적 이점도 한몫했다. 유럽 중심부에 위치해 대부분의 유럽 주요 도시까지 비행기로 2시간 이내에 도달할 수 있다. 철도 수송 규모는 유럽 국가 중 4위다. 체코투자청 관계자는 “전체 도로(5만5748㎞) 대비 고속도로(1228㎞) 비중이 중동부 유럽에서 가장 높다”고 자랑했다.



스코다 자동차는 체코의 ‘국민 자동차’다. 현재 독일 폴크스바겐 그룹이 운영하고 있다.

임금 낮은데도 기술인력 수준은 ‘상위권’

체코에서 제조업이 발달할 수 있었던 주된 이유 중 하나는 낮은 인건비다. 2015년 기준 체코의 연평균 임금은 1만2773달러(약 1360만원)로, 미국(5만8714달러), 독일(4만1761달러), 프랑스(4만471달러), 일본(3만3542달러) 등보다 훨씬 낮다. 한국(2만9979달러)과 비교해도 절반 수준이다.

저렴한 인건비로 고학력 기술자를 채용할 수 있는 점 역시 체코의 강점이다. 2016년 기준 체코 대학생 수는 약 32만6000명인데, 이 중에서 과학·기술 분야 교육 이수자가 28%(9만1000명)에 이를 정도로 양질의 기술인력이 많다. 각 학교는 자체 연구소를 설립해 교육 수준을 더욱 끌어올린다. 체코공과대학(CTU) 소속 ‘지속 가능 이동성을 위한 차량 연구소(CVUM)’의 비트 베라넥(Vit Beranek) 엔지니어는 “CVUM에선 변속기와 엔진·전기차 등을 주로 연구하는데, 학생들의 과제를 위한 연구와 기업 의뢰로 인한 산학 협력 연구가 각각 절반씩 실시된다”며 “전문 엔지니어들이 상주하면서 학생들의 연구를 지도해주고, 기업 현장에 적용되는 기술을 학생 때부터 접하기 때문에 졸업 후 바로 현장에 투입돼도 무리가 없다”고 했다.

국제경영개발원(IMD)이 각국 교육 제도가 산업계의 요구를 얼마나 충족시키는지 10점 만점으로 조사한 결과, 체코는 5.32를 기록했다. 이는 이웃 국가인 슬로바키아(4.40), 헝가리(3.35), 루마니아(3.25), 불가리아(3.06)는 물론, 한국(4.77)보다도 높다.

제조업 분야에서 우위를 선점한 체코는 이를 발판으로 인더스트리 4.0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글로벌 4차 산업혁명 흐름도 무시할 수 없지만, 제조업 경쟁력을 뒷받침해온 낮은 인건비에 한계가 올 수 있다는 우려가 인더스트리 4.0의 마중물이 됐다. 체코 실업률은 2013년 이후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해 2017년 2분기에는 2.9%를 기록했다. 사실상 완전고용 수준이다. 노동인력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은 임금 상승을 부추기고 있다. 2017년 2분기 평균명목임금 상승률은 전 분기 대비 2.6%포인트 상승한 7.9%로 나타났다.

최저임금 상승세도 가파르다. 2013~2017년 5년간 40% 가까이 올랐다(이하 월급 기준). 특히 2017년엔 전년 대비 11.1% 오른 1만1000코루나(약 57만6000원)로 두 자릿수 상승률과 1만코루나선 돌파라는 두 가지 기록을 동시에 달성했다. 올해 역시 1만2200코루나로 전년보다 10.9% 올랐다. 로만 홀리(Roman Holy) 체코 국립 인더스트리 4.0 센터장은 “체코의 인건비는 다른 나라에 비하면 여전히 낮지만, 이 추세대로라면 ‘강점’으로 내세우기엔 어려운 수준까지 높아질 것”이라며 “노동력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공장 시스템을 무인화하는 등 혁신을 골자로 하는 인더스트리 4.0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강조했다. 제조업 발달로 이공계 교육 시스템이 잘 갖춰진 점 또한 체코가 인더스트리 4.0에 쉽게 뛰어들 수 있었던 요인이다.

체코 정부는 ‘이니셔티브 인더스트리 4.0’이라는 전략계획 하에 △데이터·통신 인프라 구축 △관련 교육 시스템 향상 △신기술 도입 기업 재정 지원 등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체코 정부의 목표는 글로벌 공급망에 참여하는 체코 기업의 능력을 향상시키고, 보다 신속하고 자원 효율적인 제조 시스템을 확립하고, 소프트웨어 솔루션·특허·생산라인 개발을 위한 연구·개발(R&D)을 활성화 시키는 것이다.

인더스트리 4.0을 위한 ‘총알’도 두둑이 마련했다. 2014년 체코 정부는 2020년까지 사용할 수 있는 약 219억유로(약 21조원)의 EU펀드를 끌어왔는데, 이 중 4차 산업혁명을 위해 45억유로(약 5조9000원)를 배정했다. EU 국가들의 연구 혁신을 지원하는 ‘EU 호라이즌 2020’ 펀드 역시 유치했다. 홀리 센터장은 “EU 호라이즌 2020 펀드 규모는 총 786억유로(약 104조원)인데, 이 중 10분의 1가량을 체코가 받고 있다”고 했다. 이외에도 체코 정부는 관련 분야 외국인 투자를 장려하기 위해 조세 감면, 고용 창출 보조금 지급 등의 인센티브 제도도 마련해 실시하고 있다.



체코는 제조업과 함께 이공계 교육도 발달했다. 사진은 체코공과대 학생들이 개발한 로봇.


체코 프라하에 위치한 GE항공 사옥.

글로벌 기업 투자 확대로 고용도 증가

체코 정부가 인더스트리 4.0을 적극 추진하자 기업들도 이에 호응하고 있다. 제너럴일렉트릭스항공(GE Aviation)이 대표적이다. GE항공은 2016년 체코 정부와 투자 계약을 체결, 프라하에 터보프롭(항공기 엔진) R&D생산센터를 세웠다. 약 95억코루나(약 4900억원)를 투입했는데, 고용 창출 규모는 500명 이상이다. 현재까지 180명이 채용됐고, 올해는 80명을 추가로 고용할 예정이다. GE항공은 프라하 센터에서 최대 400기까지 엔진을 생산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독일 기반 글로벌 기업인 지멘스 역시 체코 오스트라바(Ostrava)에 오는 2023년까지 70억코루나(약 3600억원)를 투자해 신규 전기모터 개발센터를 설립하고, 체코 내 기존 공장을 확장해 1800명 이상을 신규 채용하겠다고 지난해 발표했다. 1800명 중 3분의 1 이상은 R&D, 관리 부문에 채용된다. 보후슬라프 소보트카(Bohuslav Sobotka) 체코 총리는 “이 같은 대규모 확장은 지멘스가 진출한 전 세계 국가 중 체코가 유일하다”며 “이번 투자는 전기모터의 개발과 인더스트리 4.0에 명확히 초점을 맞춘 것으로, 수년 내로 체코가 디지털화와 전기공학에서 선도적 위치를 차지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외에도 독일 자동차 부품 기업인 로베르트 보쉬가 체코 체스케 부데요비체(Ceske Budejovice)에 22억코루나(약 1151억원)를 들여 R&D센터 설립과 공장 확장에 나섰고, 독일 자동차 제조사인 BMW그룹은 체코 소콜로프(Sokolov)에 차량 테스트센터를 세울 계획이라고 지난해 말 발표했다. BMW그룹은 구체적인 투자 규모를 밝히지 않았지만, 최소 수억유로를 투자할 계획이다.


plus point

인더스트리 4.0 창시국 독일


독일 암베르크에 위치한 지멘스의 스마트 팩토리. <사진 : 지멘스>

일찍이 인구 고령화가 시작된 독일은 지속적인 경제 성장, 고부가가치 부문의 신규 고용 창출 등을 위해 2006년부터 ‘첨단기술전략(High-Tech Strategy)’을 추진했다. 인더스트리 4.0은 이 첨단기술전략에 정보통신기술(ICT)이 융합된, 제조업의 경쟁력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키는 전략이다.

독일은 인더스트리 4.0 창시국답게 스마트 팩토리 분야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다. 독일 남부 암베르크(Amberg)에 위치한 지멘스의 스마트 팩토리 ‘EWA(Electronics Works Amberg)’는 독일 인더스트리 4.0의 표준모델이자 가장 성공적인 스마트 팩토리로 꼽힌다. 공정의 75%가 자동화로 진행되며, 기계 설비는 모두 네트워크로 연결돼 있다. 직원들의 근무 시간은 평균 35시간(1주일 기준)에 불과하지만, 생산성은 최고 수준이다. EWA는 99.7%의 제품을 주문 후 24시간 내 출하가 가능하고, 제품 불량률은 0.001%에 불과하다.

운동화 만큼은 해외에서 전량 아웃소싱하던 아디다스 역시 2016년 독일로 ‘유턴’을 선언했다. 기존 공장에선 운동화 한 켤레를 생산하는 데 몇 주씩 걸렸지만, 스마트 팩토리를 세운다면 이를 5시간으로 줄일 수 있어 가능한 결정이었다. 아디다스는 독일 내 스마트 팩토리의 공정 속도를 강조하기 위해 ‘스피드 팩토리’라고 명명했다.


plus point

체코, 창업 활성화에 ‘유럽판 실리콘밸리’로 부상


길에서 노트북을 이용하고 있는 체코 대학생들.

체코가 스타트업 창업 활성화를 통해 ‘유럽판 실리콘밸리’로 부상하고 있다. 국제 비영리단체 아스펜 인스티튜트에 따르면, 2016년 기준 체코 스타트업은 550개로 집계됐다. 분야별로 살펴보면 소프트웨어 서비스 관련 스타트업이 28%로 가장 많았고, 이 외에는 웹서비스(21%), 모바일 소프트웨어 서비스(17%), 기업 데이터를 수집·정리·분석해 활용하는 기술인 비즈니스 인텔리전스(16%)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체코는 제조업과 함께 이공계 고등교육 시스템이 발달해 전문기술 인력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최근 글로벌 기업들이 체코 내 R&D센터를 잇따라 세우고 이들을 활용하면서 창업 환경이 자연스럽게 조성됐다. 창업 아이디어만 있는 초기 단계 스타트업을 발굴해 지원해주는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가 40여 곳, 스타트업에 사업 공간과 경영 컨설팅, 기술 지도 등을 통해 창업 성공률을 높여주는 스타트업 인큐베이터가 50여 곳에 이른다.

최근 설립된 체코 스타트업 중에선 ‘굿데이터(Good Data)’가 성공사례로 꼽힌다. 2007년 설립된 굿데이터는 데이터 분석 플랫폼을 통해 데이터를 상업화하고 수입을 창출할 수 있는 솔루션을 기업들에 제공하는 업체다. ‘포천’ 선정 500대 기업 중 40% 이상이 굿데이터를 이용하고 있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큰손’ 안데르센 호로위츠를 비롯해 인텔의 투자기업인 인텔캐피털, 피델리티 그로스 파트너스 등으로부터 투자를 유치했다.

이외에도 1980년대 후반 설립돼 글로벌 보안 업체로 거듭난 어베스트(Avast), 지난해 초 오라클에 인수된 클라우드 소프트웨어용 API(응용프로그램 인터페이스) 업체 애피어리(Apiary) 등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코트라 체코 무역관 관계자는 “이러한 스타트업 성공사례를 지켜보면서 체코 내 젊은층 사이에선 창업에 대한 관심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며 “실제로 대부분의 스타트업 창업자가 20~30대”라고 말했다.

이윤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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