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한 시사아카데미 일본경제사회연구소장 현 경희사이버대 일본학과 강사, 전 한국경제신문 도쿄특파원·온라인총괄 부국장
최인한 시사아카데미 일본경제사회연구소장
현 경희사이버대 일본학과 강사, 전 한국경제신문 도쿄특파원·온라인총괄 부국장

30여 년간 일본 현장을 취재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본인은 사카이(堺)의 ‘칼 장인’이다. 사카이는 일본 근대 산업의 발상지로 불릴 정도로 제조 업체가 몰려 있는 곳이다. 명품 칼을 만드는 장수 기업도 많다.

2005년 한여름에 칼 장인을 만났다. 섭씨 영상 35도가 넘는 폭염 속에 70대 아버지와 40대 아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벌겋게 단 쇠를 두드리고 있었다. 이들 부자에게 돈도 많이 벌었는데, 왜 힘든 일을 계속하냐고 물어봤다. 노인은 “내가 가장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아들 답변도 비슷했다. “좋아하는 가업을 잇고 싶어 배우고 있다.”

일본에선 제조업은 물론 농·수·축산업, 자영업 등 거의 모든 업종에서 가족이 함께 일하는 모습을 쉽게 접할 수 있다. 노인들이 자식과 함께 일하는 대를 잇는 업체가 흔하다. 유명 초밥집이나 라멘집에도 70대 요리 장인이 많다. 의사, 교수, 건축가 등 전문직에도 노년층 종사자들이 넘쳐난다. 사립대학의 경우 정년을 70세로 한 곳이 많다. 본인이 원할 경우 75세까지 교수 자리를 보장하는 대학도 꽤 있다.


제조 현장에서 활약하는 노년층 장인들

정계, 재계 등 사회 지배층도 예외가 아니다. 의원내각제인 일본의 국회의원은 60~70대가 주류다. 스가 요시히데 총리는 1948년생으로 우리 나이로 74세다. 재계 총리로 불리는 일본경제단체연합회(게이단렌) 회장은 70대 중반이다. 대기업을 대표하는 게이단렌 수장인 나카니시 히로아키(히타치 고문)는 1946년생이다.

70이 넘어도 자발적으로 계속 일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선진국에서 가장 빠른 고령화 인구 구조로 인해 노년층이 노동 시장을 지켜야 하는 현실적인 필요성도 있다. 일본은 2005년에 초고령 사회(65세 이상이 인구의 20% 초과)에 접어든 노인 대국이다. 65세 이상 인구는 3514만 명(2017년 기준)으로 전체 인구의 27.7%에 달한다.   

일본 근로자들이 노년까지 일하는 것은 21세기 현상만은 아니다. 중세 시대에도 죽을 때까지 일하는 것을 당연시했다. 교육학자로 일본론(日本論) 연구자인 사이토 다카시 메이지대 교수는 최근 저서 ‘일본인의 정신세계’에서 “일본인은 내세보다 현세의 삶을 중시하는 인생관을 갖고 있다”며 “자신의 소소한 일에 대한 보람을 인생의 가장 큰 행복으로 느낀다”고 분석했다.

일본은 ‘연속성’을 중시하는 아날로그 사회다. 급격한 변화보다 전통과 관습, 기존 제도를 고집하는 분위기가 지배한다. 기존 틀 안에서 점진적 개선을 통해 국가를 발전시키려는 성향이 있는 사람들이 주류다. 사회가 안정된 반면 외부에 대해 폐쇄적이라는 단점도 나타난다.

대를 이어 지식과 기술이 축적되고, 소부장(소재·부품·장비) 등 기초 제조업에서 세계 최고 경쟁력을 유지하는 비결도 이런 전통과 관계가 깊다. 오래된 상점과 장수 기업이 많은 것도 숙련된 노년층 인력이 존재하는 덕분이다. 70대 노년층이 활동할 사회적 공간이 충분히 있다. 고령 근로자와 마주칠 때면, ‘선진국인데, 이런 연세에도 쉬지 않고 꼭 일을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고용 유지를 위해 재정을 투입해 불필요한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일본 정부의 정책을 비판한 적도 있다. 70세로 법적 정년을 늘린 일본 사회를 어떻게 봐야 할까.


일본의 한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 고령자가 일하고 있다. 사진 조선일보 DB
일본의 한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 고령자가 일하고 있다. 사진 조선일보 DB

4월 고령자 고용안정법 개정 시행…정년 70세 시대로

1986년 제정된 고령자 고용안정법에 따른 일본의 법정 정년은 만 60세였다. 근로자가 희망하면 65세까지 고용을 의무화하는 개정안이 2013년에 통과됐다. 기업들은 65세 정년을 의무적으로 보장해야 했다. 후생노동성 조사(2021년 1월)에 따르면 65세까지 근로가 가능한 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기업 중 계속고용제도(재고용)가 76.4%, 정년 연장이 20.9%, 정년 폐지가 2.7%로 나타났다. 계속고용제도 아래 재고용의 경우 대부분이 아르바이트 또는 계약직 등 비정규직 형태다. 상당수 기업이 인건비 부담을 이유로 비정규직 형태의 재고용 제도를 시행 중이다. 

올 4월 1일부터 새로운 개정 고령자 고용안정법이 시행됐다. 이번 개정법에 따라 만 70세까지 근로자에게 취업 기회를 연장토록 하는 ‘노력 의무’가 기업들에 부여됐다. 70세 정년이 의무는 아니지만, 기업 측에서 최대한 노력하라는 것이다. 지금도 고령 근로자가 많지만, 이젠 법적으로 70세까지 일할 수 있는 평생 현역 시대가 열렸다.

이 법은 기업들이 70세로 정년을 연장하는 방식을 다음 5가지 중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① 65세 정년 제한 폐지 ② 정년을 70세로 연장 ③ 재고용 등 70세까지 근로할 수 있는 제도 도입 ④ 창업자 또는 프리랜서와 업무 위탁 계약 ⑤ NPO(비영리기구) 등 사회 공헌 사업 가능. 이들 가운데 기업과 근로자가 합의해 새로운 인사제도를 결정하라는 게 개정법의 취지다.

개정법은 기업이 70세까지 취업 기회를 보장하도록 노력할 것을 의무화하는 대신 근로자의 지위를 바꿀 수 있도록 했다. 기업 측은 65세가 넘은 근로자를 자사 직원이 아니라 개인 사업주 및 프리랜서로 분류할 수 있다. 고용 형태도 직접 고용 계약에서 업무 위탁 계약으로 변경 가능하다. 자사 직원이 아니기 때문에 각종 고용 보험에 가입할 의무도 없다. 이런 고용 형태 변경을 통해 기업은 인건비를 20~50%가량 줄일 수 있다. 정년을 늘리는 대신 기업의 인건비 부담은 줄여주자는 것.

70세로의 정년 연장은 평균 수명 증가로 고령자 근로 수명이 길어진 것이 기본 배경이다. 노동인구 감소도 정년 연장의 필요 요인이 되고 있다. 생산가능인구(15~64세)는 1995년 약 8700만 명에서 2019년 7500만 명으로 줄었다. 노동인구 감소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시니어 근로자의 정년을 연장한 것이다. 고령자 급증에 따른 연금, 의료비 지원 등 국가의 사회 복지 지출을 억제하려는 목적도 있다.


정년 없애는 기업도 잇따라 등장

세계 최대의 지퍼 제조 업체인 일본 YKK그룹은 자국 내 지사에서 기존 65세 정년제를 올 4월 폐지했다. YKK의 카메야마 히데오 사업부장은 새 인사제도와 관련, “2013년부터 단계적으로 정년을 연장해왔다. 하지만 연령만을 기준으로 하는 자동적, 일률적 퇴직 시기 결정은 불공정하다. 급변하는 시대에는 다양한 인재가 필요하다. 시니어 인재를 활용해야 한다. 연령에 상관없이 회사가 추구하는 역할이나 직무를 중심으로 인재를 평가하고, 활용하는 조직 구조를 만들고 싶다”고 밝혔다.

다이킨은 올 4월부터 희망자를 대상으로 기존 65세 정년을 70세로 연장하는 재고용 제도를 마련했다. 이번 결정은 개정된 고연령자 고용안정법의 영향을 받았다. 회사 관계자는 개정법에 나와 있는 70세까지의 고용 노력 의무에 앞서 70세까지 취업 기회를 한 설명했다. 오사카에 본사를 둔 다이킨은 1924년 창업한 일본 대표 공조기 메이커다. 2019년 기준 매출은 2조5503억엔(약 25조5000억원), 전체 직원 수는 8만여 명에 달한다.

시스템 개발 회사인 사이오스그룹은 2020년 10월에 정년을 없앴다. 도쿄증시 1부 상장사인 가전제품 유통 업체 노지마는 올해부터 정년을 65세에서 80세로 연장했다. 미쓰비시화학 같은 대기업도 정년 폐지를 검토하고 있다. 인간은 몇 살까지 일하는 게 좋을까. 70대 고령까지 일하는 일본인은 행복할까. 일본은 실험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