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프랑스 파리 엘리제궁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만난 앙겔라 메르켈(맨 왼쪽) 독일 전 총리와 블라디미르 푸틴(맨 오른쪽) 러시아 대통령. 사진 블룸버그
2019년 12월 프랑스 파리 엘리제궁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만난 앙겔라 메르켈(맨 왼쪽) 독일 전 총리와 블라디미르 푸틴(맨 오른쪽) 러시아 대통령. 사진 블룸버그

“독일과 유럽이 지난 며칠간 겪은 일은 전제군주와의 조약을 통해 평화와 자유를 보장하려던 메르켈 내각의 정책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입증한다(독일 디벨트).”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메르켈의 유산은 망가졌다. 계속해서 푸틴과 손 잡기를 고집한 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지정학적 계산 착오다(영국 더타임스).”

“유일하게 푸틴을 설득해 분쟁 해결을 주도하던 메르켈은 우크라이나에 러시아의 폭탄이 떨어진 뒤부터 독일을 취약하게 만든 장본인으로 떠올랐다(프랑스 AFP).”

“모든 전쟁은 지도자의 평판을 단번에 뒤집는다. 메르켈은 이제 ‘푸틴의 위험성을 심각하게 간과하고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의 방위력에 기여하지 않은 지도자’가 됐다(미국 월스트리트저널).”

앙겔라 메르켈(Angela Merkel) 전 독일 총리가 퇴임한 지 석 달여 만에 전 세계 언론에 다시 등장했다. 유럽 최대 경제 대국 독일에서 첫 여성 총리이자 16년 재임해 최장수 집권 지도자 기록을 세운 업적이 재조명된 게 아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공습으로 민간인 2000명 이상이 사망하고 국제사회의 전방위적인 대(對)러시아 제재가 메르켈에 대한 재평가를 이끌었다. 골자는 메르켈이 재임 당시 추진했던 탈(脫)원전 정책의 여파로 유럽 최대 경제 대국인 독일의 러시아산(産) 에너지 의존도가 높아졌고, 이로써 러시아가 유럽의 에너지 안보를 인질로 삼은 탓에 독일 등 유럽 국가들이 대러시아 제재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 경제전문매체 CNBC는 3월 14일(이하 현지시각) ‘푸틴의 전쟁과 메르켈 유산의 재평가’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유창한 러시아어로 모스크바와 에너지 동맹을 맺어온 메르켈식 독일 정치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왔다”고 보도했다. 또 가스관과 정치적 사안을 분리하려던 올라프 숄츠 신임 총리가 지난 2월 노르트 스트림 2 사업 승인 절차를 중단한 데 대해 “러시아를 ‘안정 지향적 행위자’로 전제하는 기존의 대외경제 정책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분석했다.

AFP통신도 3월 12일 “러시아의 침공으로 메르켈의 유산에 먹구름이 드리웠다”며 “노르트 스트림 2는 러시아 제재 국면에서 독일을 무력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다만 “메르켈은 블라디미르 푸틴이 누구인지, 러시아가 어떤 존재인지 상당히 잘 알고 있었다”고 분석했다. 실용주의자 메르켈로서는 탈원전의 대안을 찾아야 하는 동시에 러시아와 경제적 유대를 선호하는 연립정부 파트너(SPD·사회민주당)의 요구도 무시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독일 보수 일간지 디 벨트(Die Welt)는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해 “푸틴과 데탕트 정책을 추진하고 에너지 사업 계약과 조약에 정권을 묶어두려 했던 메르켈의 시도는 이제 ‘완전한 실수’라는 평가를 피하지 못하게 됐다”고 했다. 독일 쥐트도이체차이퉁 역시 “메르켈은 러시아와 긴밀한 경제적 유대를 모색하려는 열망으로 독일의 러시아산 에너지 의존도를 높인 책임을 져야 한다”며 “끔찍한 실수”라고 했다.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서방은 러시아에 고강도 제재를 부과했다. 그러나 러시아산 원유 수입 금지 등 에너지 제재를 두고 미국과 유럽의 단일대오에 균열이 커지고 있다. EU 제1 경제 대국의 에너지 수입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막강하기 때문이다. 독일 공영 도이체벨레(DW)는 독일의 연간 천연가스 수입 중 55% 이상이 러시아에서 온다고 보도했다. 전체 공급원 대비 비율도 러시아가 가장 높다. 데이터 분석업체 ICIS에 따르면, 러시아산 가스는 지난해 12월 기준 독일의 가스 공급원의 32%를 차지한다.

러시아산 가스에 대한 독일의 높은 의존도는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 시절부터 유지해온 탈원전 정책과 연관이 깊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1986년 소련의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계기로 독일이 원전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과학자 출신인 메르켈도 집권 초반 원전의 필요성을 주장했지만,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원자로를 점진적으로 폐쇄하는 방향으로 돌아섰다.

메르켈은 탈원전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2012년부터 노르트 스트림 2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원자로 폐쇄로 전기료가 급등하고 석탄 사용과 탄소 배출량도 늘어 대안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노르트 스트림 2는 발트해를 통해 러시아 북부와 독일을 연결하는 1230㎞의 해저 가스관으로, 2021년 9월 완공됐다. 이 가스관을 통해 연간 최대 550억 ㎥(세제곱미터)의 러시아산 천연가스가 독일로 유입된다. 러시아 국영 가스 기업 가스프롬은 이 사업으로 연 150억달러(약 18조원)의 수익을 기대하고 있다.

미국은 건설 과정부터 이 사업을 반대했었다. 러시아가 이를 발판으로 유럽 에너지 시장에서 영향력을 확대할 거란 우려 때문이었다. 반면 독일 정부는 가스관 사업과 정치적 문제는 별개이며 국가 에너지 안보와 직결된 사안이라고 맞섰다. 미국의 조 바이든 행정부는 독일과의 외교 관계를 고려해 결국 2021년 7월 ‘러시아의 에너지 우위를 견제하기 위해 협력한다’는 조건하에 건설을 합의했다.

독일 정부가 가스관 사업 승인 절차를 중단한 건 2월 22일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 친(親)러시아 분리주의 세력의 독립을 인정하고 이 지역에 군을 투입키로 한 데 대한 조치였다. 외신들은 “노르트 스트림 2로 머뭇거리던 독일이 고강도 제재에 동참했다”고 평가했다.

문제는 실질적인 제재 여부였다. 독일은 3월 7일 미국이 주도하는 러시아산 가스·석유 수입 금지 요구를 거절했다. 에너지를 제외한 제재에는 적극 동참하겠다는 것이다. 독일은 ‘무기 수출 불가’ 원칙을 바꿔 우크라이나에 대전차 무기와 지대공 미사일 등 살상용 무기를 제공하고 자국 국방력 증강에 연간 1000억유로(약 137조7000억원)를 투입키로 했지만, 에너지 제재에는 선을 그었다. 숄츠 총리는 “유럽의 난방·이동·전력·산업을 위한 에너지를 (러시아 외) 다른 방식으로 확보할 수 없다”고 했다. 독일 에너지·물산업협회(BDEW)에 따르면 독일의 전기료는 2021년 7월 기준 ㎾h당 31.94센트(약 440원)로 전 세계에서 가장 비싸다. 한국의 세 배 이상이다. 여기에 러시아산 천연가스 공급까지 중단되면 전기료 추가 상승을 피하기 어렵다. 독일 주간지 ‘슈피겔’은 자국 에너지 공급업체 RWE 자료를 인용해 러시아산 천연가스 공급이 끊기면 “수주일 정도의 짧은 시간밖에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FT는 “독일의 딜레마는 메르켈이 러시아를 대안으로 삼아 적극 주도한 탈원전 정책의 결과”라며 “푸틴에게 독일의 탈핵(脫核) 정책은 절대적인 횡재”라고 했다. 또 “러시아에 대한 EU의 과도한 에너지 의존이 대러시아 공동 전선의 ‘약한 고리’로 부각됐다”며 16년에 걸쳐 글로벌 리더십을 발휘한 지도자 메르켈의 소신과 철학이 역설적으로 현재의 지정학적 질서와 정면으로 부딪친다고도 했다.

메르켈의 전임자인 사민당 출신 슈뢰더 전 총리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에도 푸틴 대통령과의 친분을 유지해 비판을 받아왔다. 그는 퇴임 직후 가스프롬의 노르트 스트림 담당 자문위원장을 맡았고, 최근 가스프롬 이사로 지명됐다. 푸틴과 연계된 러시아 국영 석유회사 로스네프트의 이사장을 맡기도 했다. 3월 10일에는 모스크바를 방문해 푸틴과 만나 종전을 위한 중재에 나섰다고 독일 주간지 ‘빌트암존탁’이 전했다.

이슬기 조선비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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