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한시사일본연구소 소장 전 일본 유통과학대객원교수, 전 한국경제신문 도쿄특파원
최인한시사일본연구소 소장 전 일본 유통과학대객원교수, 전 한국경제신문 도쿄특파원

올 9월 나온 일본인의 ‘중류(中流·중간 정도의 생활을 하고 있는 사회 계층) 의식’에 대한 NHK 여론 조사 결과는 시사점이 적지 않다. 소득 감소와 노후 대비 우려로 ‘중류’ 의식을 가진 국민이 크게 줄었다는 내용이 골자다. 20~60대 6000여 명을 대상으로 ‘중류의 삶을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56%가 ‘중류보다 아래’라고 답했다. 1990년대만 해도 자신이 ‘중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90%에 달했다. 중류층이 줄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배경은 실질 소득 감소다. 장기 경기 침체로 개인 소득이 줄고 있는 데다 고령화로 인한 노후에 대한 불안감이 일반인들의 ‘중류 의식’을 떨어뜨리는 걸로 나타났다. 일본의 고령화율(65세 이상 인구 비중)은 지난해 29%를 기록, 세계 주요국 가운데 가장 높다. 우리나라는 17%다.


 

일본의 일반 노인홈(왼쪽)과 도쿄 최고급 노인홈. 사진 최인한·사쿠라비아 세이죠
일본의 일반 노인홈(왼쪽)과 도쿄 최고급 노인홈. 사진 최인한·사쿠라비아 세이죠

노후 거주 시설도 양극화하는 일본

가족을 떠나 머무는 시설을 일본에선 ‘노인홈’으로 부른다. 한국의 요양원과 요양병원, 실버타운 전체를 아우르는 광의의 개념으로 이해하면 된다. 노인홈은 공적 시설과 민간 시설·주택의 두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공적 시설은 사회복지법인과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한다. 돌봄 서비스(가이고·介護)가 많이 필요한 고령자와 저소득층 고령자를 지원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들 공적 노인홈에 입주하려면, 조건이 꽤 까다롭다. 민간 시설·주택은 민간 기업이 운영한다. 입주하기 위한 조건은 운영 시설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일본에서도 고령자 본인이 자발적으로 집을 떠나 노인홈을 선택하는 사례는 그리 흔하지 않다. 대부분 고령 부모의 경우 자녀들이 직접 돌봐주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고령자의 건강 상태가 악화하거나 가족의 노인 ‘돌봄’이 매우 어려워져야 노인홈을 찾는 사례가 일반적이다.

일본 부유층에서는 기업이 운영하는 고급 노인홈(한국의 고급 실버타운)에서 노후를 보내는 사례가 늘어나는 추세다. 이들 사이에 가장 인기 높은 시설이 도쿄에 있는 ‘사쿠라비아 세이죠(成城)’다. 도쿄 세이죠학원 앞 역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다. 입주 조건은 우선 70세를 넘어야 한다. 입주 시점 기준으로 돌봄 인정이나 정부 지원이 필요하지 않은 고령자여야 한다. 15년 동안 거주하는 입주 비용으로 싼 객실은 1억2000만엔(약 12억원), 비싼 객실은 4억엔(약 40억원)을 선금으로 내야 한다. 거기에다 레스토랑 등 부대시설 이용료로 월 30만엔(약 300만원)가량 필요하다. 

사쿠라비아 세이죠의 클리닉(병원 시설)에는 하루 24시간, 365일 내내 의사가 상주한다. 휴일 야간에 약을 받는 것도 가능하다. 고령자들이 안심하고 생활하는 데 필요한 내과, 심료 내과(心療內科), 정형외과, 안과 등 전문의들이 항상 대기하고 있다. 거주하는 객실(호텔식 형태)의 욕실, 화장실, 침실 등 모든 곳에 ‘너스 콜(비상벨)’이 설치돼 있다. 긴급 상황이 발생하면 의사와 간호사가 즉시 객실로 달려온다. 객실 내 화장실로 가는 통로에는 센서가 붙어 있어 일정 시간 거주자가 이동하지 않을 경우 체크하는 시스템을 갖췄다. 시설 내 로비에는 고급 샹들리에와 값비싼 명화가 걸려 있다. 로비 안쪽에 있는 레스토랑에서는 일본식 정원을 바라보며 30종 이상의 양식과 일식 메뉴를 즐길 수 있다. 제철 식재료를 이용한 메뉴와 전국 각지 최고급 고기로 만든 음식을 준비해 둔다. 

보통 사람들은 상상하기 어려운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사쿠라비아 세이죠의 150개 객실은 항상 만실이다. 입주자들은 기업 경영자들과 그들 가족이 대부분이다. 현재 입실을 기다리는 대기자들이 많다. 평소 50~60대들이 시설 견학을 많이 온다. 운영 회사인 프라임스테이지 관계자는 “대기 회원이 되려면 보증금 100만엔(약 1000만원)을 내야 하는데, 현재 30명 이상 부부가 신청한 상태”라며 “이들이 입주 가능한 70세까지 10~20년을 기다리는 동안 정기적으로 소식지를 보내주며 깊은 관계를 맺는다”고 설명했다. 


고령자 사이에 확산하는 슈카츠

일본에는 ‘슈카츠(終活)’라는 말이 있다. 인생의 마지막인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생전 활동을 뜻한다. 세상을 떠나기 위해 미리 준비까지 해야 할까. 좀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자녀가 한 명이거나 아예 없는 인구 감소 시대의 현실을 감안하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일본은 2008년을 정점으로 2009년부터 13년째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 일본 신문들은 2009년 ‘슈카츠’를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용어는 2010년에 일본의 신어(新語) 및 유행어 대상에 첫 지명됐다. 2012년에는 신어 대상을 받으며 새로운 사회 트렌드를 반영했다. 슈카츠 덕분에 장례식, 묘지 준비 등 관련 시장이 빠르게 커지고 있다. 슈카츠는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일본인의 특성을 반영한다. 고령자들은 주변에 피해를 주지 않고 인생을 마무리하려는 의지가 강하다. 다수 노인이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을 위한 장례, 묫자리 등을 준비한다. 남은 가족에게 재산 상속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계획을 미리 세워 실행하는 고령자들도 최근 급증하는 추세다.

묘에 대한 일본인의 의식이 많이 변했다.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묘지가 있다면, 그곳에 묻히는 경우가 가장 일반적이었다. 최근 들어 고향을 떠나 도시에 거주하는 젊은 세대가 늘어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조상들의 묘지가 멀면 성묘나 무덤 관리를 위한 시간과 교통비가 많이 들어간다. 오래된 조상 묘를 처분하고 새로운 묘로 옮기는 ‘이장(하카지마이(墓じまい))’이 증가하는 배경이다.

‘하카지마이’는 대대로 내려오는 묘를 없애고, 묘를 관리해온 절에 반환하는 것을 말한다. 기존에 있던 묘를 철거한 뒤 다른 무덤으로 유골을 옮기는 것이다. 이를 위해 ‘묘지, 매장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신청 절차를 밟아야 한다. 이런 절차를 절에 부탁하는 과정에서 돈이 필요하다. 이게 바로 ‘이장료’다. 이장은 오랜 기간 묘소 관리를 해온 절에 대한 시주를 그만두는 것을 뜻한다. 

새로운 묘지로는 다양한 선택지가 있다. 공동묘지인 영대공양묘(永代供養墓·공동 납골당)는 서로 모르는 사람들끼리 함께 납골 된다. ‘셰어 하우스’가 아닌 ‘셰어 묘’ 형태로 보면 된다. 나무나 꽃 아래 잠드는 ‘수목장’이나 산골(散骨)을 선택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해양 산골’은 가루가 된 유골을 바다에 뿌리는 방식이 주류였으나 섬과 산, 우주에 뿌리는 방식도 나왔다.

묘지 비용은 형태별로 크게 차이가 난다. 가장 전통적인 게 일반 묘다. 조상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전통적인 무덤 스타일이다. 부지를 구입한 뒤 야외에 석재로 된 무덤을 만든다. 이런 묘는 대대로 계승되고, 무덤 관리도 후손들이 직접 해야 한다. 가격은 80만~300만엔(약 800만~3000만원) 정도. ‘영대공양묘’는 다른 사람의 유골과 함께 매장하고, 함께 잠드는 형태다. 묘지 앞에 손을 마주하고 기도를 드릴 장소가 마련돼 있다. 유골이 납골되는 공간은 구분되지 않는다. 비용은 5만~30만엔(약 50만~300만원) 선으로 일반 묘보다 저렴하다. 

수목이나 꽃 밑에 잠드는 수목장은 늘어나는 추세다. 벚꽃과 단풍 등 상징 나무 주위에 유골을 묻는다. 답답한 묘지 안이 아니라 나무나 화초에 둘러싸이는 형태다. 평소 자연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잘 맞는 무덤이다. 가격은 10만~100만엔(약 100만~1000만원) 선이다. 2만5000~50만엔(약 25만~500만원)인 해양 산골 무덤도 있다. 유골을 가루로 만들어 바다에 뿌리는 것이다.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이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무덤을 갖지 못하는 사람에게 최적의 방식이다. 저출산, 고령화, 인구 감소 시대를 맞아 노후 대비는 이제 당사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평안하고 행복한 노후를 기대할 수 있는 국가가 진정한 선진국이다. 그래야 중류층이 늘고, 사회도 안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