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남미 좌파의 대부’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77) 전 브라질 대통령이 12년 만에 권좌 재탈환을 노리고 있다. 브라질 선거법원에 따르면 10월 2일(이하 현지시각) 치러진 브라질 대통령선거 1차 투표에서 노동당(PT) 후보 룰라 전 대통령은 예상 밖 접전 끝에 48.4%를 득표해 재선에 나선 자유당(PL) 소속 자이르 보우소나루(43.2%) 현 대통령을 누르고 1위에 올랐다.
10월 30일 결선투표
브라질 대선은 1차 투표에서 유효 투표수의 과반 득표자가 나오면 당선이 곧바로 확정된다. 그러나 과반 득표자가 없으면 1·2위 후보가 결선 투표를 치러 최종 당선자를 가린다. 이에 따라 10월 30일 예정된 결선투표에서 룰라 전 대통령과 보우소나루 대통령이 다시 맞붙게 된다.
룰라 전 대통령과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각각 중남미 좌파와 우파를 상징하는 인물로 통한다. 양 진영의 대결 구도 속 1차 투표에서 탈락한 군소 후보 9명의 표심 향방이 주목된다. 특히 각각 3·4위를 차지한 시모네 테베트(4.2%) 민주운동(MDB) 후보와 시로 고메스(3%) 민주노동당 후보의 표가 향하는 쪽이 승기를 잡을 것으로 예상된다.
룰라 전 대통령은 브라질 북동부 농촌 마을 출신으로, 상파울루로 이주 후 금속 노동자로 일하다 노동 운동을 계기로 정치에 발을 들였다. 그는 세 차례 낙선 끝에 2002년 대통령에 당선됐다. 2006년 재선에도 성공해 2003~2010년 8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퇴임했다. 룰라 전 대통령은 임기 동안 식량 무상 지원, 최저임금 인상, 최저 생계비 지원 등 빈곤 퇴치 정책을 적극 펼쳤다. 또 1인당 국내총생산(GDP)을 세 배 이상 늘리고 브라질을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전환하는 등 경제 호황을 이끌었다. 룰라 전 대통령을 향한 국민의 신임은 두터웠고, 퇴임 직전까지 지지율은 80%를 넘었다.
그러나 퇴임 후 위기가 찾아왔다. 재임 시절 부패 의혹이 불거지며 2016년 돈세탁 등 혐의로 구속된 것. 같은 해 6월 그의 후계자였던 지우마 호세프 전 대통령까지 탄핵당하며 룰라 전 대통령의 정치적 입지는 더 좁아졌다. 하지만 그는 지난해 3월 대법원으로부터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으며 정계 복귀에 나섰고, 대선에 출마했다.
브라질은 코로나19 대응 실패 여파로 심각한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다. 연간 물가상승률은 두 자릿수에 달하며, 실업률은 9%를 넘어섰다. 이에 현 정권에 대한 심판론이 대두한 가운데 룰라 전 대통령은 부자 증세, 사회복지 강화, 최저임금 인상, 엘리트주의 타파, 아마존 삼림 벌채 감소 등 공약을 내세워 표심 몰이에 나섰다.
다만 룰라 전 대통령이 대선에서 최종 승리하더라도 좌파 정책을 무조건 추진하기는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다. 대선 1차 투표와 같은 날 치러진 연방의회 선거에서 우파 성향 집권 여당인 자유당이 하원에서 기존보다 22석 증가한 99석, 상원 27석 중 13석을 확보해 최다 정당이 됐다. 룰라 전 대통령의 노동당은 하원에서 68석을 차지해 제2 정당이 됐고, 상원에선 4석 확보에 그쳤다. 로이터는 “룰라 전 대통령은 당선되더라도 보수 우위 의회에서 법안 통과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전했다.

연결 포인트 1
‘룰라 컴백 유력’
중남미 핑크 물결에 美·中 촉각
룰라 전 대통령과 보우소나루 대통령의 맞대결이 양강 이념 대결 구도로 비치면서 중남미 국가는 물론 이 지역에서 패권 다툼을 벌여온 미국과 중국도 이들을 주목하고 있다.
이번 대선에서 룰라 전 대통령의 승리가 확정될 경우 중남미에서 좌파 집권이 확산하는 2차 핑크 타이드(pink tide·분홍 물결)가 짙어질 전망이다. 실제로 2018년 이후 최근까지 아르헨티나, 멕시코, 칠레, 페루, 콜롬비아 등 정권이 우파에서 좌파로 교체됐다. 룰라 전 대통령이 당선되면 사상 처음으로 중남미 주요 6개국 모두 좌파 정권이 들어서게 된다. 특히 룰라 전 대통령은 재임 당시 미국 주도 ‘미주자유무역지대(FTAA)’에 대항해 주변 국가와 ‘메르코수르(남미공동시장)’를 추진하는 등 중남미 좌파 물결을 주도한 바 있다.
이에 룰라 전 대통령이 대권을 잡으면 이 지역 패권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신경전도 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 ‘지정학적 뒷마당’인 중남미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커질 수 있어서다.
중국은 과거 1차 핑크 타이드 기간 이념적 동질성을 내세우며 중남미 지역에 진출, 영향력을 확대해왔다. 최근에는 경제 협력과 코로나19 백신 지원 등을 통해 더욱 밀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브라질의 경우 지난해 중국의 투자액이 약 60억달러(약 8조7480억원)로 2017년 이후 최대치를 기록했다.
미국 퀸시연구소 온라인 매체 ‘리스폰서블 스테이트크래프트’는 “룰라의 승리는 미국에 일종의 도전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고, 브라질 언론 네오피드는 “룰라가 승리하면 브라질은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육해상 실크로드) 이니셔티브’에 합류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했다.

연결 포인트 2
‘브라질 트럼프’ 보우소나루 쿠데타설도
대선 1차 선거에서 룰라 전 대통령이 먼저 승기를 잡은 가운데 보우소나루 대통령이 선거 결과에 불복해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룰라 전 대통령의 대선 출마가 거론된 이후 여러 차례 진행된 여론조사에서 그에게 뒤처지자 줄곧 선거 불복 의사를 밝혀왔다.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이탈리아계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육군 대위 출신이다. 극우 성향의 그는 국영기업 민영화, 연금 개혁을 추진하는 등 친기업 정책을 펼치는 가운데 군사 독재 옹호, 여성과 흑인, 동성애 차별 발언, 코로나19 음모론 등을 일삼아 ‘브라질의 (도널드) 트럼프’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 역시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롤모델이라고 공언한 바 있다.
이에 일각에서는 룰라 전 대통령의 당선이 확정될 시 보우소나루 대통령이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된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2020년 대선에 패하고도 부정선거론을 주장하는 등 선거 불복 행보를 이어왔다. 결국 지난해 1월 6일에는 일부 과격 트럼프 지지자들이 워싱턴 국회의사당을 무력 점거해 다수 사상자가 발생했다. 실제로 보우소나루 대통령 유세 현장에서는 지지자들이 군사 개입을 촉구하기도 했으며, 브라질 검경은 소셜미디어(SNS)상에서 ‘보우소나루 패배 시 쿠데타 모의’를 한 혐의로 브라질 기업인 10여 명을 수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