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18일 정오 무렵. 광주광역시는 높고 청명한 하늘에 선선한 바람까지 불어 전형적인 가을 정취가 물씬 풍겼다. 고속버스터미널에서부터 탁 트인 시내도로를 30분쯤 내달려 광산구 장덕동에 위치한 화천기공 본사에 도착했다.
화천기공은 1991년 준공(제3단지 기준)된 광주 지역 최대 규모 산업단지인 하남산업단지에 자리를 잡고 있다. 바로 근처에는 삼성전자, LG이노텍, 대우일렉트로닉스 등 굴지의 대기업 공장들이 이웃하고 있다.
일반인들은 잘 알지 못하지만 사실 화천기공은 우리나라 기계산업 발전에 아주 중요한 초석을 다진 기업이다. 이른바 ‘기계를 만드는 기계’로 불리는 공작기계를 국내 최초로 개발해 선보인 주인공이 바로 화천기공이다. 화천기공의 60년 역사는 곧 한국 공작기계 산업의 역사와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
화천기공은 2010년부터 2년 주기로 ‘H-ROAD(화천의 길)’라는 타이틀의 행사를 열고 있다. 국내외 고객사 관계자를 대거 초청해 반세기 이상 축적한 첨단 기술력을 소개하는 한편 다양한 제품 정보도 공유하는 대규모 이벤트다. 올해 행사는 창사 60주년을 맞아 ‘화천 오픈하우스 H-ROAD 2012’라는 이름으로 10월31일~11월3일 본사에서 열렸다. 화천기공은 ‘H-ROAD’ 행사를 통해 첨단 제품들을 선보이며 ‘공작기계 명가’의 자부심을 대내외에 유감없이 뽐내고 있다.
화천기공은 현재 재벌그룹 계열의 두산인프라코어, 현대위아와 함께 국내 공작기계 산업의 ‘빅3’를 이루고 있다. 생산량은 두 회사보다 적지만 기술력과 품질력은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실 어느 업종을 불문하고 중견 기업이 재벌 기업과 한 시장에서 어깨를 겨룬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뭔가 특별한 경쟁력이 없다면 대기업과 대등한 위상을 갖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화천기공의 핵심 경쟁력은 무엇일까.

‘국내 빅3’로 대기업과 당당히 어깨 겨뤄
김기태 기술개발연구소장(기계사업부 공장장 겸임)은 “무엇보다 60년간 공작기계 분야에서 쌓아온 제조 기술력과 노하우가 강점이다. 아울러 오너 경영자의 대를 이은 장인정신도 빼놓을 수 없다. 이런 점들이 잘 어우러져 결국 제품의 우수성으로 나타난다고 본다”고 말했다.
화천기공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5월 설립됐다. 당시 전남 광주시 궁동에서 합명회사인 ‘화천기공사’로 첫 걸음을 뗐다. 창업주는 고 권승관 명예회장(1916~2004)이다.
권승관 창업주는 일제 강점기 시절 10대의 어린 나이에 가족의 생계를 돕기 위해 일본인이 경영하던 주물(鑄物) 공장 견습공으로 들어가면서 ‘쇳물 인생’을 시작했다. 그는 원체 성실한 데다 실력도 뛰어나 일본인 사장의 큰 신임을 받았다.
그러다 1945년 8월 우리나라가 해방을 맞으면서 운명적인 기회가 찾아왔다. 일본인 주인이 고국으로 돌아가면서 “자네가 맡아 뱃심 있게 운영해보라”며 선뜻 공장을 넘겨준 것이다. 이렇게 물려받은 공장을 토대로 권승관 창업주는 기업가로서 첫 걸음을 떼게 됐다. 당시 공장 이름은 ‘파(巴)철공소’라는 일본식 상호를 썼는데, 1951년 전란의 와중에 화천기공사라는 새로운 간판을 내걸었다. 화천은 재물 화(貨)자와 샘 천(泉)자로 이뤄진 이름이다. 모든 경제활동의 토대이자 목표인 재화의 원천이라는 뜻이 담겼다고 한다.
권승관 창업주는 1950년대 말 새로운 사업에 도전했다. 선반(旋盤, Lathe)을 만들어 팔기로 한 것이다. 선반은 각종 금속재료를 회전운동으로 갈고 파내거나 도려내는 공작기계다. 공작기계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졌을 뿐 아니라 가장 널리 사용되는 기계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선반 제조업체가 전무한 시절이었다.
권승관 창업주는 1959년 8월 마침내 국내 최초의 선반(벨트 구동식)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자신의 손으로 우리나라 공작기계 산업의 첫 씨앗을 뿌리는 감격을 맛본 것이다. 이때부터 그는 오로지 공작기계라는 한 우물만을 파기 시작했다.
화천기공은 공작기계 분야에서 국내 최초 기록을 다수 세웠다. 1977년 NC(수치제어) 공작기계 최초 개발, 1978년 세계공작기계전시회(IMTS) 최초 출품, 1983년 CNC(컴퓨터 수치제어) 밀링머신(회전식 절삭공구로 공작물을 절삭하는 기계) 최초 개발, 1987년 수평형 머시닝센터(Machining Center: 다양한 기능의 공구들을 자동 교환하며 공작물을 가공하는 복합공작기계) 최초 개발 등 선구적인 이정표를 여러 차례 남겼다.
회사가 커지면서 권승관 창업주는 주변사람들로부터 부동산이나 건설 등 다른 사업을 해보라는 권유도 자주 받았다. 하지만 그때마다 권 창업주는 “쇳물 먹고 사는 놈들은 평생 쇳물 먹어야지, 딴 물 먹으면 안 된다”며 모든 유혹을 뿌리쳤다고 한다. 공작기계 외길만을 걸은 장인(匠人)의 고집과 신념을 엿볼 수 있는 일화다.
현재 국내 공작기계 시장은 CNC 공작기계류가 80% 이상을 차지한다. CNC 공작기계류 비중이 80%선을 넘으면 공작기계 선진국으로 분류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외에 공작기계 산업의 선진국은 어디일까. 대체로 생산량을 기준으로 하면 일본, 독일, 중국, 이탈리아, 한국(또는 미국) 순이라는 설명이다. 반면 품질을 기준으로 하면 독일, 일본, 한국, 스위스 순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공작기계 산업 발전에 초석 놓은 선구자
산업적으로 볼 때 공작기계 산업은 매우 독특하면서도 중요한 위상을 차지한다. 기계산업을 비롯해 주요 제조업의 기초이자 토대를 이루기 때문이다. 공작기계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국가들이 모두 제조업 강국인 점을 보면 쉽사리 이해가 된다. 김기태 소장의 설명이다.
“공작기계는 기계를 만드는 기계입니다. 말하자면 기계의 어머니인 셈이죠. 자식이 ‘모성’을 닮아가듯이 공작기계가 좋으면 품질이 좋은 제품이 나오고 공작기계가 나쁘면 품질이 나쁜 제품이 나오게 됩니다. 다시 말해 공작기계는 제조업 경쟁력의 원천이라는 것이죠. 일본을 예로 들면 20년이 넘는 장기불황 속에도 나라가 버티고 있다는 게 신기하지 않습니까? 저는 그 비결이 일본 공작기계 산업의 확고한 뒷받침이라고 봅니다. 그 덕분에 일본 제조업이 그나마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는 겁니다.”
화천기공은 매달 약 200대(관계사인 화천기계 생산량 포함)의 공작기계를 생산하고 있다. 대당 가격은 기종에 따라 수천만원에서 10억원대에 이른다. 경쟁사인 두산인프라코어와 현대위아의 월 생산량은 각각 800대와 500대 수준인 것으로 추산된다. 단순히 숫자만 비교하면 화천기공의 생산량이 많이 떨어지는 셈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한다. 김기태 소장의 말이다.
“화천기공은 고객사들의 입맛과 요구를 완벽하게 충족시킬 수 있는 제품만을 생산한다는 ‘유저 오리엔티드(User-oriented)’ 경영철학을 갖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눈앞의 이익을 욕심내기보다는 우리 역량에 맞게 생산량을 정한다는 게 경영진의 확고한 방침입니다.”
공작기계가 가장 많이 사용되는 산업은 자동차산업이다. 세계 공작기계 수요의 약 60% 정도를 자동차산업이 차지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 수요가 많은 산업은 전자산업(전기·IT·가전 등 포함)이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화천기공의 주요 고객 중에는 삼성전자와 현대·기아차도 포함된다. 또 삼성전자의 1차 협력업체들도 상당수가 고객이다. 특히 화천기공이 생산하는 금형(金型) 가공 기계의 절반 이상이 삼성전자 협력업체들에게 납품되고 있다.
현재 화천기공은 국내 금형 가공 기계 시장의 약 60%를 차지하고 있다. 원래 화천기공은 1990년대 초반까지 부품 가공 공작기계만 생산해 왔다. 그러다 일부 대형 고정고객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는 한편 신시장을 개척하자는 전략적 판단에 따라 1996년부터 금형 가공 기계 사업을 본격화했다.
그 승부수는 결국 멋들어지게 적중한 셈이다. 요즘 관련 업계에서는 “금형 가공 기계는 화천기공”이라는 인식이 널리 심어져 있을 정도라고 한다. 또한 화천기공 덕분에 과거 독일, 일본 등에 의존하던 금형 가공 기계 수입량도 상당 부분 줄일 수 있게 됐다는 설명이다.
화천기공은 해외 시장에서도 성가를 높이고 있다. 특히 미국, 유럽 등 선진국 고객사들에게 자사 제품을 상당 부분 공급하고 있다. 아시아에서는 인도가 주요 시장으로 꼽힌다. 일본은 자국산 중심의 폐쇄성, 중국은 비즈니스 관행의 불확실성 등의 이유로 진출하지 않고 있다. 다만 중국에 진출한 일부 한국 기업에는 공작기계를 공급하고 있다. 현대차 중국법인이 그런 사례다.
화천기공의 전체 매출 가운데 수출 비중은 40%를 넘는다. 또한 수출이 해마다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수출액은 2006년 5000만달러를 돌파한 데 이어 올해는 1억달러를 달성할 것으로 예상된다.
‘35년간 무분규’ 노사화합의 모범기업
화천기공은 노사화합의 모범사례로도 손꼽히는 기업이다. 1977년 노동조합 설립 이래 무려 35년간 무(無)분규 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과연 그 비결은 무엇일까. 이성호 지원본부장의 설명이다.
“무엇보다 권승관 창업주의 현장 중심, 사람 중심 경영철학이 기업문화로 뿌리를 내린 덕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창업주께서는 항상 모든 직원을 따뜻하고 자상하게 보듬어주셨죠. 일례로 아드님(권영두 사장)이 임직원을 야단치는 장면을 보기라도 하면 ‘이놈아, 좀 따뜻하게 대하거라. 우리가 먹고 사는 것도 다 직원들 덕분이다’라며 혼을 내실 정도였으니까요.
아울러 노사가 자주 만나 대화하는 것도 노사화합의 토대가 되고 있습니다. 서로 솔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투명하게 경영실적을 공유하면서 자연스레 공감대가 형성되는 거죠.”
화천기공이 광주에 둥지를 튼 지도 어언 60년이 지났다. 수도권이나 영남권에 비해 인적, 물적, 산업적 인프라가 부족한 지역에서 사업을 영위하는 것은 여러모로 불리한 측면이 많은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화천기공은 향토를 지켜왔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일까. 아무래도 한 우물만을 판 우직한 장인정신과도 큰 연관이 있을 듯싶다. 이성호 본부장의 말이다.
“오너 경영자들이 편리나 이익을 챙기는 데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에요. 보통 지방 기업들이 성장하면 사업상 유리한 서울로 본사를 이전하는 경우가 많죠. 하지만 우리 경영진은 그런 것을 검토는 고사하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권승관 창업주께서 생전에 ‘탯자리’의 중요성을 늘 강조하시곤 했는데, 아마도 그런 영향이 크지 않을까 싶습니다.”
화천기공 본사 구내에는 ‘덕인(德人)’이라는 두 글자가 한자로 새겨진 큼지막한 비석이 우뚝 서 있다. 권승관 창업주가 공작기계 산업과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한 공적을 기리기 위해 지난 1992년 광주지역 상공인 60여명이 뜻을 모아 건립한 송덕비다. 창업주는 타계했지만 화천기공은 빛고을 지역민들에게 오래도록 ‘덕인의 상징’으로 남을 듯하다.
Tip | 공작기계 외길 화천그룹 현황
화천기공 비롯해 4개 계열사가 주축
화천기공은 공작기계 사업으로 수직계열화를 이룬 화천그룹의 모기업이다. 화천그룹은 화천기공 외에 화천기계, 서암기계, TPS코리아를 주요 계열사로 두고 있다. 화천기계는 공작기계 사업과 자동차부품 사업을 하고 있고, 서암기계는 공작기계 핵심부품을 생산하고 있다. TPS코리아는 자동차용 양산부품 가공설비 전문업체다.
화천그룹의 창업이념은 ‘공업보국’이다. 고 권승관 창업주는 ‘끈기, 정직, 성실’의 3대 경영이념을 바탕으로 한국 공작기계 산업의 선구자 역할을 해냈다. 현재 화천그룹은 권승관 창업주의 세 아들이 이끌고 있다. 장남 권영열씨가 화천그룹 회장, 차남 권영두씨가 화천기공 사장, 삼남 권영호씨가 서암기계 사장을 각각 맡고 있다. 화천그룹 전체 매출 규모는 약 6000억원 정도다. 화천기공은 2011년 기준 약 2410억원의 매출을 기록했으며, 임직원 수는 300여명이다.
Tip | 전통문화 후원자 서암문화재단
권승관 창업주의 예술사랑 유지 받들어
화천그룹은 2010년 재단법인 서암문화재단을 설립했다. 서암(瑞巖)은 고 권승관 창업주의 아호다. 서암문화재단은 국악과 그림을 사랑했을 뿐 아니라 예술인들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권승관 창업주의 유지를 받들어 전통문화 계승과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설립됐다. 권승관 창업주는 특히 당대를 풍미한 동양화가 허백련 선생(1891-1977), 판소리 명창 임방울 선생(1904-1961)과 교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서암문화재단은 2011년부터 ‘서암문화대상’을 제정해 전통문화 계승·발전에 기여한 예술인들에게 상금을 수여하는 한편 활동도 지원하고 있다. 또 장학사업, 학술사업, 문화사업 등으로 사업 범위를 점차 넓혀나갈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