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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기업을 공포에 떨게 하는 엘리엇매니지먼트를 창업한 폴 싱어 회장. 사진 블룸버그

TWA, 엔론(Enron), 컴캐스트(Comcast), P&G, 델파이(DELPHI), 티센크루프(Thyssenkrupp), 텔레콤 이탈리아(Telecom Italia), 워터스톤즈(Waterstones), 삼성물산, 현대글로비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국적도 다양하고 항공, 통신, 미디어, 철강, 서점, 광고, 자동차 등 업종도 다르지만 ‘치욕적인 공통점’이 있다. 세계적인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Elliott Management·이하 엘리엇)의 공격으로 ‘홍역’을 치른 기업들이다.

한국의 간판 기업 현대자동차 그룹은 5월 21일 엘리엇에 ‘백기 투항’했다. 현대모비스·현대글로비스 분할·합병으로 경영권 승계를 추진했지만 엘리엇의 도전에 ‘표 대결’도 못 하고 포기했다.

삼성도 ‘엘리엇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2015년 엘리엇의 반대를 누르고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을 성사시켰지만 엘리엇은 최근 7000억원대 소송을 예고했다. ‘삼성 뇌물 사건’을 빌미로 한 국제소송(ISD)이어서 결과를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유럽 기업들도 ‘엘리엇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이탈리아 최대 통신사 ‘텔레콤 이탈리아’의 경영권은 지난 5월 초 엘리엇에 넘어갔다. 텔레콤 이탈리아 주식 24%를 가진 프랑스 재벌 비방디 그룹이 주식 9%를 가진 엘리엣과의 표 대결에서 졌기 때문이다.

영국의 최대 서점 체인 워터스톤즈는 지난 4월 엘리엇에 인수됐다.

블룸버그 통신은 “유럽을 대표하는 독일 철강, 중공업 기업인 ‘티센크루프 그룹’이 엘리엇의 새로운 먹잇감이 되고 있다. 엘리엇이 유럽 재계를 휘젓고 있다”고 5월 23일 보도했다.

‘소액 주주의 이익을 대변하는 행동주의 펀드(Activist fund)’ ‘기업이나 국가의 불량 채권을 인수해 무자비한 이익을 취하는 벌처 펀드(vulture fund)’.

엘리엇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월스트리트에서 가장 스마트하고 터프한 펀드(포천)’란 평가와 ‘흡혈귀(bloodsucker)’, ‘자본 테러리스트’란 저주와 비난이 공존한다.

엘리엇은 1977년 뉴욕 출신 변호사 폴 엘리엇 싱어(Paul Elliott Singer·74)가 창업한 월스트리트의 헤지펀드다. ‘엘리엇’이란 이름은 창업자 싱어의 중간 이름에서 따왔다.

1944년 뉴욕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뉴저지에서 자란 싱어 회장은 로체스터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뒤 1969년 하버드 로스쿨에서 법학박사 학위(J.D.)를 받았다.

1974년 뉴욕의 투자 은행 ‘도널슨, 루프킨 앤드 젠레트(Donaldson, Lufkin & Jenrette)’에 입사한 뒤 1977년 친지와 친구들에게서 130만달러를 끌어모아 당시에는 생소했던 헤지펀드를 창업했다.

‘벌처 펀드’라는 별명처럼 경기 침체, 증시 폭락을 틈타 사세를 급격히 키웠다. 벌처 펀드란 죽은 동물의 고기를 깨끗이 먹어 치우는 대머리 독수리에서 파생된 이름이다.

1987년 미국 증시 대폭락, 1990년 장기 불황기에 항공사(TWA), 통신·미디어(MCI, WorldCom), 에너지(Enron) 등 업종과 분야를 불문하고 경영상 어려움에 처한 기업들의 주식을 사들인 뒤 경영권을 공격하거나 부실 채권을 인수해 비싸게 되파는 방법으로 높은 시세 차익을 챙겼다. 창업 이후 30여년간 2년간을 제외하고 매년 고수익을 올리며 S&P 평균 투자 수익률(10.9%)보다 높은 연평균 14.6%의 수익률을 기록했다.

국가 부도 위기에 몰린 아프리카와 남미 국가들은 엘리엇의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1995년 금융 위기에 몰린 페루 국채를 2000만달러에 매입한 뒤 5800만달러를 벌었고 콩고에 3000만달러를 투자해 1억달러를 챙겼다. 특히 2002년 아르헨티나의 금융 위기 당시 6억3000만달러에 매입한 국채를 무기로 국제소송 등을 통해 392%의 수익을 올린 것은 엘리엇의 ‘악명’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됐다. 2012년 그리스 금융 위기 당시 엘리엇 습격에 대한 공포감 때문에 그리스 정부가 채무 재조정 조건을 완화했다는 분석이 나올 정도다.

21세기 들어 활동 무대를 더욱 넓히고 있다. P&G(2003년), 샵코(Shopco·2005년), 컴퓨웨어(2012년), 컴캐스트(2015년), 삼성물산·제일기획(2015년), 아테나헬스(Athenahealth·2018년) 등 글로벌 기업들도 엘리엇의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2007년 글로벌 금융 위기도 절묘하게 피해갔다. ‘단타 거래’ ‘공매도’로 유명한 거물 헤지펀드 매니저 짐 차노스(Jim Chanos)는 “금융 위기를 예감하고 싱어와 함께 G7 정상들을 찾아 다니며 부동산 거품과 금융 시스템 붕괴를 경고했지만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국제 소송, 정부 로비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시체를 뜯어 먹고 억만장자가 됐다’는 비난에 대해 싱어 회장은 “기업의 시장 가치에 대한 적절한 지불을 거부하는 악당들과의 싸움이자 약탈적 정부에 대한 정당한 견제”라며 ‘소액주주의 대변자’임을 자처한다.

2014년 프랑스 금융 당국으로부터 내부자 거래 혐의로 2200만달러 벌금을 무는 등 각국의 견제 속에 최근 기술 기업들을 중점적으로 공략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2004년 이후 유망 기술 기업 40여개를 인수했다는 보도도 있다.


美 공화당 최대 후원자

싱어 회장은 정치 이념상으로는 열성적인 공화당 지지자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선거 운동을 지원했고, 루돌프 길리아니 전 뉴욕 시장은 개인 제트기를 제공하면서까지 선거 운동을 도왔다. 미트 롬니 공화당 대선 후보에게도 거액을 후원했다. ‘공화당 최대 돈줄’인 코크 형제가 운영하는 재단에 100만달러를 기부하는 등 공화당 거액 후원자 모임의 핵심 멤버다.

지난 대선 초기 공화당 내 트럼프 후보 반대 모임인 ‘트럼프는 절대 안 돼(Never Trump)’에 자금을 지원하는 등 트럼프 대통령과는 거리를 뒀지만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 행사에 100만달러를 기부한 25명의 거액 기부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최근 이스라엘 주재 미국 대사관의 베이루트 이전과 관련, 셀던 아델슨(Sheldon Adelson·85) 라스베이거스 샌즈그룹 창업자, 버니 마커스(Bernard Marcus·89) ‘홈 디포’ 공동 창업자와 함께 트럼프 대통령을 움직이는 ‘유대인 억만장자 3인방’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10살 때부터 시작한 피아노 연주 실력이 수준급이며 두 아들, 사위와 함께 밴드 활동을 하고 있다. 유명 가수 미트 로프(Meat Loaf)와 함께 공연한 적도 있다. 전설적인 록 그룹 ‘레드 제플린’과 프리미어 리그 축구팀 아스날의 열성팬이다. 아스날 경기를 관람하는 모습이 가끔 목격되기도 한다.

개인 재산 28억달러(2018년 5월 현재)로 ‘포브스’ 선정 ‘미국 억만장자 순위 284위’에 올라있다. 살아 생전 재산의 절반을 기부하겠다는 억만장자들의 ‘기부 서약 운동(The Giving Pledge)’에도 동참했다. 1996년 부인과 이혼했다.


plus point

동성결혼, 성소수자 운동  지지하는 ‘큰손’

“동성 결혼은 아름답고 멋지며 환상적이다. 붕괴된 미국 결혼 제도를 살리고 가정의 안정성을 높인다.”

싱어 회장은 공화당 인사로는 드물게 동성 결혼 합법화, ‘성소수자(LGBT·lesbian, gay, bisexual, transgender)’ 인권 운동 지지자다. 성소수자 차별 철폐를 위한 월스트리트 최고경영자 모임, 동성결혼 합법화를 위한 공화당 조직 활동과 공화당 정치인 당선을 위해 거액을 기부했다. 의사인 둘째 아들 앤드루 싱어가 2009년 동성결혼이 금지된 뉴욕을 피해 매사추세츠주에서 결혼식을 올려야 했던 경험 때문이다.

“처음에는 아들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진지한 대화 끝에 젠더와 성 정체성에 대해 눈을 떴다”고 2014년 다보스 포럼에서 고백했다.

방성수 조선비즈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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