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람 맥심이 개발한 맥심 기관총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피아 구분 없이 모든 교전국이 사용한 최고의 살상 병기였다. 사진 위키피디아
하이람 맥심이 개발한 맥심 기관총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피아 구분 없이 모든 교전국이 사용한 최고의 살상 병기였다. 사진 위키피디아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만 해도 미국에 전쟁은 남의 이야기였다. 전쟁터인 유럽 대륙이 지리적으로 너무 멀기도 하지만, 17세기 초에 제임스 먼로 대통령이 고립주의를 주창한 이후 미국은 자신의 안보와 관련 없다면 ‘제3국 간에 분쟁이 벌어질 경우 철저하게 중립을 지키겠다’는 것을 가장 중요한 외교 원칙으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싸움의 당사자였던 유럽 열강들도 이 전쟁이 곧바로 끝날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훗날 세계대전으로 명명될 정도로 규모가 커지자 상황이 바뀌었다. 유럽뿐만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 중동 등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다. 교전 당사자들의 식민지라는 특수성 때문이었지만 어찌 됐든 전쟁은 전 지구적으로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결국 1917년, 미국은 전쟁에 발을 담그게 됐다. 독일 잠수함에 의한 무차별 격침 작전으로 많은 미국인이 죽은 데다 독일이 멕시코를 부추겨 미국을 공격하려 한다는 내용의 ‘치머만 전보’가 참전의 기폭제가 됐다. 그리고 1918년 종전할 때까지 불과 1년 동안 무려 400여만 명의 병력을 참전시켜 당당히 승전국의 일원이 됐다.

미국은 거대한 국토와 자원을 발판으로 20세기 들어 세계 최고의 경제 대국으로 도약했지만, 유럽에 대한 자격지심이 있었다. 유럽에서 먹고살기 힘들었던 이들이 대서양을 건너와 건국했기 때문에, 미국은 유럽보다 스스로를 미흡하게 여겼다. 이 때문에 역사상 처음으로 유럽으로 대규모 원정을 떠나게 됐을 당시 미군의 사기는 그야말로 대단했다.

그런데 미군은 그렇게 보무당당히 전선에 투입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몹시 당황했다. 소총을 제외하면, 미군이 보유한 무기 대부분이 상대인 독일군은 물론 옆에서 함께 싸우는 영국군, 프랑스군 것보다 성능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다 지난 3년간 전쟁을 치른 여타 국가들과 달리 경험도 부족했다.

항상 전쟁의 위기에 놓여 있던 유럽 열강들과 달리 고립주의를 주창한 미국은 주변에 강력한 적대국이 없다 보니 군비 증강에 소극적이었다. 미국은 전쟁에 뛰어든 다음에야 자신의 문제를 알게 됐고 결국 연합군의 지원을 받아서 야포, 전차, 전투기로 교전을 해야 했다. 그중 미국에 가장 치명적이었던 부분은 오늘날 보병 부대가 반드시 갖추는 무기인 기관총이 없다는 점이었다.

기관총은 19세기 말에 등장했지만 효과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시선이 많았다. 그러나 그 위력은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서 확실하게 입증됐다. 기관총은 그야말로 전세를 한 번에 뒤집을 수 있는 강력한 병기였다. 무게가 많이 나가 공격용으로 사용하긴 곤란했지만 방어용으로는 최고였다.

기관총을 보유하지 않았던 미군은 엄청난 위력에 혼비백산해 본국에 이 총기를 시급히 개발해 공급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기관총이 전설적인 천재 총기 엔지니어 존 브라우닝(John Browning)이 제작한 ‘브라우닝 M1917’이다. 하지만 정작 M1917이 본격적으로 일선에 보급되기 시작했을 때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였다.

어쨌든 M1917의 개발과는 별개로 당장 전투를 치러야 했기에 연합군으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이때 영국군이 지원해준 맥심 기관총(이하 맥심)과 루이스 기관총(이하 루이스)은 모두 미국인이 만든 것이었다. 그것도 미군이 불필요한 무기라고 생각해서 ‘보급할 필요 없다̓고 퇴짜 놓았던 총기였다.

무기사 최초의 기관총이기도 한 맥심은 당시 영국뿐 아니라 독일, 러시아도 사용 중이었다. 한마디로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애용하는 최고의 무기였다. 맥심은 1886년 미국 발명가인 하이람 맥심(Hiram Maxim)이 개발했다. 1911년 개발된 루이스도 한때 미군 조병창에서 근무했던 아이작 루이스(Isaac Lewis)가 발명했다.

지금도 툭하면 발생하는 총기 사고로 골치가 아플 만큼 미국은 가히 총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관련 시장이 크고 기술력도 높아 지금도 수많은 총기 제작사들이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을 벌이고 있다. 맥심이나 루이스도 총에 눈 밝은 미국 땅에서, 미국인이 개발한 기관총이었다.

그런데 언급한 것처럼 미군은 기관총이 없어 다른 나라의 지원을 받고 별도로 개발에 나서야 했다. 이처럼 황당한 상황은 하이람 맥심, 아이작 루이스가 유럽으로 건너가 사업을 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물론 이 개발자들이 처음에는 미군에 무기를 판매하고자 했다. 하지만 미군은 이들이 개발한 기관총에 관심을 주지 않았고, 심지어는 고의로 무기 채택을 방해하는 이들까지 있었다.

새로운 무기에 거부감을 보이는 군부의 고루한 행태에 실망한 이들은 유럽으로 건너가 사업을 벌여 대성공했다. 미국과 달리 전력 증강에 고심하던 유럽 국가들은 기관총의 잠재력을 충분히 알아본 것이었다. 하이람 맥심은 1899년 무기 개발에 공로가 크다는 이유로 작위를 받고 영국에 귀화했을 정도였다.


영국에서 도입한 루이스 기관총으로 사격 연습 중인 미국 해병대원. 개발 직후 구매 제안을 받은 미 육군은 채택을 거부했다. 사진 위키피디아
영국에서 도입한 루이스 기관총으로 사격 연습 중인 미국 해병대원. 개발 직후 구매 제안을 받은 미 육군은 채택을 거부했다. 사진 위키피디아

국내 도움 못 받은 韓 기업인, 일본 갔다

2차전지의 핵심 소재인 ‘습식 분리막’을 생산하는 더블유스코프는 2011년 도쿄증권거래소의 마더스 시장에 상장된 일본 기업이다. 그런데 회사를 설립하고 현재 이끌고 있는 최원근 대표는 삼성전자에서 근무하기도 했던 한국인이다. 습식 분리막을 생산하는 주체도 자회사인 더블유스코프코리아, 즉 한국 회사에서 담당하고 있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다.

2000년 최 대표는 동료들과 의기투합해 관련 기술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벤처기업을 설립해 본격적으로 사업에 나섰지만, 국내에서는 그에게 도움을 준 이들이 없었다. 벤처캐피털을 비롯한 금융기관은 물론, 정부도 외면했다. 심지어 일각에서는 ‘결코 중소기업에서 가능하지 않은 기술’이라며 그를 사기꾼으로 매도하기까지 했다. 이때 그가 내세운 비전만 믿고 3000만달러(약 337억원)를 지원해 준 이는 일본의 투자자들이었다.

이제는 기업의 국적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한 시대가 됐지만, 더블유스코프의 사례를 보면 씁쓸하다. 최고의 기관총을 만든 이들이 있었고 제안까지도 받았음에도 무시하고 있다가 곤란을 겪고 나서야 뒷북을 친 100여 년 전 미국 군부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은 기분 탓만은 아닐 테다.

남도현 군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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