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계공업 공장의 전경이다. 비록 우리 의지에 따른 행위는 아니었지만 이곳에서 한반도 최초로 잠수정이 건조됐다. 사진 두산인프라코어 블로그
한국기계공업 공장의 전경이다. 비록 우리 의지에 따른 행위는 아니었지만 이곳에서 한반도 최초로 잠수정이 건조됐다. 사진 두산인프라코어 블로그

1883년 개항 이후 급속히 팽창한 인천광역시는 우리 현대사와 관련해서 유독 최초라는 타이틀이 많은 도시다. 1899년에 개통된 한반도 최초의 철도가 인천을 지나는 경인선이었다. 최초의 고속도로 또한 70여 년 후인 1968년에 개통된 경인고속도로였다. 그래서인지 열차 공장(1899년 인천공작창), 자동차 공장(1937년 국산 자동차)도 한반도에서 제일 먼저 설립됐다.

교통, 전기와 더불어 현대 문명의 3대 지표라 할 수 있는 상수도도 최초로 도입됐다. 1910년 인천 거주 일본인에게 물을 공급하기 위해 노량진에서 인천까지 관을 매설하면서 한반도에서 상수도의 역사가 시작됐다. 서울과 가까운 개항장이어서 인프라의 설치가 빨랐던 것인데, 덕분에 여타 문물이나 문화도 먼저 선을 보였다.

대불호텔(1883년), 각국공원(1889년), 제물포구락부(1901년) 등 호텔, 공원, 사교클럽과 같은 각종 편의 시설이 한반도에서 처음 생겨난 곳도 인천이다. 오늘날 최고의 국민 스포츠라 할 수 있는 야구와 축구를 가장 먼저 접한 구도(球都)이기도 하다. 거기에다 짜장면, 쫄면, 공갈빵처럼 새로운 먹거리가 태어나거나 처음 들어온 곳이다.

덧붙여 의외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한반도 최초의 잠수함정도 인천에서 제작됐다. 그것도 생각보다 상당히 오래전의 일이다. 전투용은 아니었지만 엄연히 군용으로 사용된 잠수정이 1940년대에 인천에서 만들어졌다. 태평양 전쟁 당시에 일본 육군이 사용한 ‘3식수송잠항정(三式輸送潛航艇) 마루유(まるゆ)’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1942년 봄에 이르러 일본은 서태평양과 동남아 일대를 석권했으나 초반의 연승에 눈이 뒤집혀 그들의 진격이 얼마나 많은 후속 조치를 필요로 하는 일인지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그해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승리하며 전세를 역전시킨 미군이 이후 일본의 점령 지역을 차례차례 고립시키자 문제점이 여실히 드러났다.

영국령 말라야(현 말레이시아) 점령 직후 일본은 ‘이제 고무 공급은 걱정 없다’면서 고무공을 마구 만들어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타이어를 만들 고무가 부족하다며 만들었던 고무공을 회수하는 데 급급했다. 그 외 네덜란드령 동인도(현 인도네시아)의 석유, 인도차이나 반도의 쌀처럼 많은 자원을 장악했다. 허나 정작 이를 본토까지 가져올 방법이 없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점령지에 주둔 중인 육군이었다. 해군은 배를 타고 이동하니 본토와 연결이 수월한 편이었지만 한 번 투입된 육군은 점령지를 계속 확보하고 있어야 하는 처지라서 곤란한 점이 많았다. 식량처럼 현지에서 수탈할 수 있는 물자도 있었지만 탄약을 비롯한 상당수의 군수품은 본토로부터 보급되는 것에 의존해야 했다.

특히 태평양에 산재한 작은 섬처럼 단지 군사적 이유만으로 격오지에 진주한 부대들은 제때 식사를 하지 못할 만큼 고통이 극심했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보급을 담당해주던 일본 해군도 1943년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는 바다로 나가기는 힘든 상황이 됐다. 자신들의 안위를 먼저 생각해야 할 만큼 곳곳에서 미군에게 밀리고 있었다. 결국 다급했던 육군은 수송용 잠수정을 건조해서 스스로 보급한다는 기상천외한 결정을 했다. 하지만 조선소들은 해군의 물량을 소화하기 벅찬 상황이었다. 이에 육상에서 함체를 나눠 제작한 후 바닷가로 옮겨 조립하기로 하고 1943년 10월 도쿄 인근 안도철공에서 초도함정을 건조해 시험에 들어갔다.

성능에 만족한 육군은 1944년 1월부터 모든 자원을 집중시켜 동급 잠수정의 양산에 착수했다. 이때 히타치, 니혼제강과 더불어 인천에 있던 ‘조선기계제작소(朝鮮機械製作所)’에도 양산을 지시했다. 1937년 요코야마공업의 출자로 인천광역시 동구 화수동에 설립된 조선기계는 이후 한국기계, 현대양행, 대우중공업을 거쳐 현재 두산인프라코어 인천 공장으로 가동 중이다.


1945년 9월 2일 전함 미주리에서 열린 항복 문서 조인식에 참석한 일본 대표단. 전쟁의 공을 빼앗길까봐 따로 행동하며 침략 전쟁을 벌인 일본의 육군과 해군 지휘부가 자리를 함께한 보기 드문 장면이다. 사진 위키피디아
1945년 9월 2일 전함 미주리에서 열린 항복 문서 조인식에 참석한 일본 대표단. 전쟁의 공을 빼앗길까봐 따로 행동하며 침략 전쟁을 벌인 일본의 육군과 해군 지휘부가 자리를 함께한 보기 드문 장면이다. 사진 위키피디아

5시간 먹거리 싣고 50일 항해

1946년 말까지 육군은 1차 물량으로 히타치에 24척(0001급), 니혼제강에 9척(1001급), 안도철공에 2척(2001급), 그리고 일본 본토가 아닌 조선기계에 3척(3001급)을 주문했다. 이처럼 일본과 인천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건조된 잠수정으로 구성된 수송잠항대는 1944년 5월 23일에 처음 실전에 투입됐다.

필리핀 전선에 식량과 탄약을 보급하도록 3척의 잠수정 마루유가 여타 수송선들과 선단을 이루어 출항했다. 여러 척의 수상함들이 격침됐지만 마루유 3척은 50여 일의 항해 끝에 마닐라에 입항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들이 보급한 물자는 필리핀 주둔군이 4~5시간이면 소모해 버릴 100여 t 규모에 불과했다.

전쟁을 경제적인 효율성만 따지며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단지 4~5시간 연명을 위해 격침의 위험을 무릅쓰고 수십 일간 항해를 한다는 것 자체가 상식을 벗어난 일이었다. 이런 희극 같은 상황의 배경에는 서로가 가장 큰 적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오갈 정도로 뿌리 깊은 일본 육군과 해군의 반목이 자리 잡고 있었다.

원만한 협조를 기대할 수 없어 육군이 별도로 수송잠항대를 만들어 운용했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 일본군 내에 팽배했던 비효율의 극치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관동군이 상부라 할 수 있는 ‘대본영’의 말을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행동한 것처럼, 같은 일본군 내에서도 파벌 싸움은 극심했다. 이런 상태에서 거대한 전쟁에서 승리를 기원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우리 기업 문화에도 사내 정치라는 말이 흔하게 됐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유기적인 협력이 필요함에도 단지 부서나 개인의 이기적인 기득권을 지키려다 일을 파탄 내는 경우는 일일이 거론할 수 없을 정도다. 한반도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잠수함은 단순한 흥밋거리가 아닌 반면교사의 사례라 할 수 있다.

남도현 군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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