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가 미국과의 마찰을 불사하고 구매를 결정한 러시아의 S-400 트리움프 대공미사일. 러시아는 앞선 기술력으로 여전히 군사 강국으로 군림하고 있다. 사진 위키피디아
터키가 미국과의 마찰을 불사하고 구매를 결정한 러시아의 S-400 트리움프 대공미사일. 러시아는 앞선 기술력으로 여전히 군사 강국으로 군림하고 있다. 사진 위키피디아

지금의 러시아에서 과거 초강대국이었던 소련의 위상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명목상 국내총생산(GDP)이 경제 수준을 판가름하는 절대 기준은 아니라지만, 순위가 우리나라와 엎치락뒤치락하는 수준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가 국제 사회에서 여전히 강대국으로 인정받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이유는 군사력 때문이다.

비록 많이 약화됐지만 러시아가 냉전 시기부터 이어온 엄청난 군비는 지금도 가히 공포의 대상이다. 2010년대 들어 G2로 부상한 중국이 대대적으로 군사력 증강에 나서고 있지만 러시아에는 아직 상대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S-400 대공미사일처럼 중국이 필요로 하는 최신 무기의 유일한 공급선이라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군사 분야에서 러시아가 돋보일 수 있는 이유는 오랜 기간 축적된 기술력 때문이다. 군사력의 첫 번째 지표라 할 수 있는 무기는 흔히 나토(NATO) 표준이라 불리는 서방 측 규격과 한때 동유럽을 이끈 소련이 정한 규격으로 크게 나뉜다. 러시아는 여전히 해당 분야의 표준을 선도하는 국가다.

과거 소련의 방산 업체는 당의 계획과 명령에 따라 가동됐으나 1991년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하면서 각자도생에 나서야 했다. 이때부터 러시아의 군수 업체는 적극적으로 대외 판매에 뛰어들었다. 소련 시절에도 해외에 무기를 공급했지만 당시에는 상품이 아니라 정치, 외교적인 수단이어서 업체가 판촉에 신경 쓸 일은 거의 없었다.

하루아침에 체제가 바뀌자 방산 업체는 살아남기 위해 엊그제까지 적대적이었던 나라에까지 적극적으로 판매를 시도했다. 러시아 정부도 해당 산업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이를 장려했다. 이제 막 개발을 끝낸 최신 전투기, 전차도 과감하게 판매했다. 물론 나중에 안보에 위험으로 돌아올 수도 있는 중요한 무기는 제외했다.

2000년 우리나라가 제1차 FX(차기 전투기 도입 사업)를 실시했을 때, 러시아는 아직 러시아군에도 배치되지 않았던 최신예 Su-35 전투기를 후보로 내세웠을 정도였다. 당시 Su-35는 경쟁에서 탈락했지만 T-80U 전차, BMP-3 장갑차, KA-32 헬기처럼 소련 붕괴 전까지는 상상도 못 했던 최신 무기가 국내에 도입됐다.

방산 관련 제품은 공산주의 시절부터 소련이 최고의 경쟁력을 유지한 거의 유일한 공산품이었다. 그 덕에 연방이 해체되고 러시아가 자본주의 체제로 바뀌는 혼란스러웠던 변혁기에도 시장 개척에 나설 수 있었다. 지금도 방산은 농수산물, 천연자원 등을 제외하고 러시아가 외화를 벌어들일 수 있는 유일한 부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도 러시아의 주력 폭격기로 활약 중인 Tu-22M 백파이어. 실패작이었던 Tu-22의 후속작처럼 보이게 하려던 소련의 기만책에 속아 미국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사진 위키피디아
지금도 러시아의 주력 폭격기로 활약 중인 Tu-22M 백파이어. 실패작이었던 Tu-22의 후속작처럼 보이게 하려던 소련의 기만책에 속아 미국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사진 위키피디아
시범비행 중인 러시아 공군 소속의 Su-35. 대외 판매를 위해 Su-27과 완전히 다른 전투기처럼 보이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사진 위키피디아
시범비행 중인 러시아 공군 소속의 Su-35. 대외 판매를 위해 Su-27과 완전히 다른 전투기처럼 보이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사진 위키피디아

감추기 위해, 선전하기 위해

경쟁을 하며 러시아의 방산 업체들은 마케팅 기법을 자연스럽게 터득했다. 시장에 뛰어들면서 선전하고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행위를 알게 된 것이었다. 소련 시절 Tu-22M 폭격기와 Su-27 전투기 시리즈의 제식 부호 명명(命名) 사례를 보면 그들이 어떻게 변신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다.

1962년 배치가 시작된 Tu-22 폭격기는 성능이 매우 나빠 일선에서 혹평이 이어졌다. 이에, 곧바로 개량 사업이 시작됐다. 그런데 이것저것 대폭적으로 손을 대면서 판이 커졌고, 결국 페이스리프트(외관을 개조해 새롭게 보이게 하는 작업)를 넘어 완전히 새로운 폭격기가 탄생했다. 성능도 월등히 뛰어났지만 외형으로도 Tu-22와 비슷한 점을 찾기 어려울 만큼 전혀 다른 기종이었다.

이 정도면 별개의 제식 부호를 붙이는 것이 타당하지만 소련은 미국을 기만하기 위해 개발 당시부터 파생형 냄새가 나는 Tu-22M이라는 제식명을 썼다. 때문에 미국은 1969년 예상치 못한 폭격기가 위성사진에 잡히자 당황했고 이후 백파이어(Backfire)라는 식별코드를 부여해 감시에 들어갔다.

반면 소련 말기인 1985년부터 배치되기 시작해서 지금도 러시아를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주력기로 활약 중인 Su-27 시리즈는 위 사례와 정반대다. Su-27 시리즈는 Su-27 전투기 이후에 탄생한 Su-30 전폭기, Su-33 함재기, Su-34 장거리폭격기, Su-35 전투기 등을 일컫는데, 모두 Su-27을 기반으로 한 파생형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Su-27PU, Su-27K, Su-27IB, Su-27M으로 명명됐지만 이후 Su-30, Su-33, Su-34, Su-35로 이름이 바뀌었다. 물론 임무가 각각 다르기는 하다. 그렇지만 이처럼 동일한 기체를 바탕으로 개발된 파생형이 아닌, 다른 기종으로 구분한 이유 중에는 해외 판매를 위해 더 좋은 별개의 전투기처럼 보이기 위한 목적도 분명 있었다.

사실 제품을 시장에 내놓을 때 판매자는 예외 없이 작명에 고심한다. 성공한 전작의 명성을 살리기 위해 다른 제품이라도 유사한 이름을 쓰는 경우가 있는 반면 실패한 전작과 비슷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이름을 붙이는 경우도 있다. 전혀 그렇지 않을 것 같은 무기의 세계에서도 그런 모습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남도현 군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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