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6일 충남 청양군 거리에 추석 시기 고향 방문을 자제해 달라는 내용의 현수막이 걸려 있다. 사진 연합뉴스
9월 16일 충남 청양군 거리에 추석 시기 고향 방문을 자제해 달라는 내용의 현수막이 걸려 있다. 사진 연합뉴스

추석이 지난 지 꽤 되었지만 명절 이야기를 해야겠다. ‘불효자는 옵니다’라는 역설적인 현수막이 붙은 이상한 추석이었다. 명절답지 않은 추석이지만, 시댁에서 온종일 음식 내놓고 치우기를 반복해야 하는 며느리들에게는 기쁜(?) 추석이 아니었을까.

명절 증후군이라는 용어가 있다. 명절 기간에 스트레스를 받아 생기는 육체적, 정신적 증상을 의미한다. 두통, 소화불량, 위장장애 등의 신체 증상이나 우울감과 무기력증, 짜증 등의 심리적인 증상이 나타난다.

몇 년 전에 진료했던 한 여성분이 떠오른다. 40대 초반의 여성인데 남편 손에 이끌려 병원을 찾았다. 사흘 전부터 양손이 뻣뻣하게 마비되고 혀가 굳어서 말하는 게 어눌해졌다고 한다.

신경과에서 여러 검사를 했지만 별 이상이 없다며 정신과를 가보라고 해서 왔다. 그때가 추석이 며칠 지난 뒤였다. 조금 이상한 게 환자는 양팔과 혀가 마비되었음에도 놀라거나 불안해하지 않고 편안해 보였다는 것이다. 짚이는 게 있었다. 남편에게 추석 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더니 어떻게 알았냐는 듯이 나를 쳐다본다.

환자는 맏며느리였다. 추석 때 혼자서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그 와중에 시어머니는 ‘이거 해라’ ‘저거 해라’며 구박 아닌 구박을 반복했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라고 말한 환자는 버릇없다고 한 소리를 들었다. 집에 와서 남편에게 하소연하면서 울었단다. 다음 날 증상이 나타났다.

이 환자의 진단은 심리적 스트레스가 근육 마비 증상으로 나타나는 ‘전환장애(con-version disorder)’였다. 신체화 장애의 일종이다. 심리적 갈등이 어떻게 신체 증상으로 전환할까?


전환장애의 숨은 이득

뭔가 이득이 있기 때문이다. 환자가 보인 증상에는 두 가지 특별한 의미가 숨어 있다. 하나는 시어머니를 욕하고 때리고 싶은 무의식적 욕망에 대한 방어기제로 자기 손과 혀를 마비시킨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이런 증상은 힘들다는 무언의 메시지로, 주위의 관심과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증상이 오히려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주고 가족들로부터 관심받을 수 있기 때문에 증상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기분 좋은 무관심(la belle indifference)’이라고 한다.

이런 경우 환자의 억눌린 화를 풀어주고 스트레스 상황에서 벗어나게 하면 대개는 금방 좋아진다. 남편에게 부인이 추석 때 너무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일시적으로 생긴 근육 마비라고 설명하고 환자를 스트레스 상황에 부닥치지 않도록 주의시켰다. 더불어 어떻게 이런 지경이 될 때까지 놔두었냐고 남편에게 한마디 했다. 옆에 있던 환자의 표정이 더 편안해지는 듯했다. 다음번 진료 시간에 왔을 때 환자의 마비 증상은 거의 다 풀어졌다. 다행이다. 

내가 환자분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다음 명절 때는 차라리 아프다고 꾀병 부리고 가지 마세요.” 환자분이 말했다. “그래도 제가 가야죠. 어머니 혼자 힘드실 텐데요.” 참 착한 며느리였다. 그 뒤로 그분은 병원을 찾지는 않았다. 이번 ‘불효자는 옵니다’ 추석에도 시댁에 갔을까. 갔다면 즐거운 명절이었다면 좋겠다.


▒ 윤우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밝은마음병원 원장, ‘엄마 심리 수업’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