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동 훈련 중인 수도사단 소속 K-21 장갑차. 1973년 수도사단은 베트남에서 귀환한 후 제32사단 주둔지에 새롭게 터를 잡았다. 하지만 전통 있는 부대의 이름과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실제로는 제32사단을 수도사단으로 바꾼 것이다. 사진 위키피디아
기동 훈련 중인 수도사단 소속 K-21 장갑차. 1973년 수도사단은 베트남에서 귀환한 후 제32사단 주둔지에 새롭게 터를 잡았다. 하지만 전통 있는 부대의 이름과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실제로는 제32사단을 수도사단으로 바꾼 것이다. 사진 위키피디아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이름은 가장 기초적인 구분 수단이다. 설령 이름이 같더라도 동일한 인격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한마디로 이름은 특정인의 모든 것이 함축적으로 담겨있는 일종의 브랜드다. 그래서 살아온 삶에 따라 이름으로 가치가 바뀐다. 이순신처럼 존경의 상징일 수도 있지만, 이완용처럼 치욕의 대명사가 될 수도 있다.

반면 여기서 더 나가 이름 때문에 삶이 결정된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일종의 운명론인데, 우리나라에 특히 많은 편이다. 이 때문에 이름을 지을 때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외부에 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작명을 의뢰하는 경우도 흔하다. 과거에는 너무 귀하게 여겨서 타인이 함부로 언급하지 않도록 호(號), 휘(諱), 자(字) 등이 별도로 존재했을 정도다.

기업에도 이름은 중요하다. 일단 자신들의 가치와 소비자에게 어필하려는 것을 함축적으로 담아야 한다. 당연히 작명에 신경 쓸 수밖에 없다. 그래서 효과가 좋지 않거나 업종 자체가 완전히 바뀔 때 이름을 바꾸기도 한다. 이럴 때는 기존에 펼치던 노력과 비용이 완전히 매몰될 수도 있기 때문에 신중을 기한다.

이처럼 한 번 정해진 이름을 바꾸려면 고려해야 할 부분이 많다. 인명의 경우는 소송을 통해야 가능할 만큼 절차마저 복잡하다. 기업명은 기존에 존재하던 다른 기업명과 중복되거나 유사하지 않다면 바꾸는 데 크게 제약이 없는 편이다. 그래도 어지간해서는 바꾸지 않거나 LG, SK, CJ처럼 예전 이름과 최대한 연관되도록 신경 쓴다.

오히려 현실적으로 보자면 굳이 이름에 연연할 필요가 없지만, 단지 전통을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지키는 경우도 있다. 물론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만, 이름을 사수하기 위해 쓰지 않아도 될 비용과 노력을 굳이 낭비하기도 한다. 이처럼 합리적이지 못한 모습까지 드러난다는 것은 그만큼 이름의 가치가 중요하다는 의미다.

이런 사례를 쉽게 볼 수 있는 곳이 군이다. 군의 활동 단위인 부대는 필요에 따라 창설, 해체가 이뤄진다. 특히 전시라면 수시로 반복되는 일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가변적인 조직임에도 부대의 이름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경이로울 정도다. 어쩌면 그 정도로 전통과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중요한 가치라고 할 수 있다.

1965년 한국에 주둔 중이던 미 제1기병사단이 본토로 철수하고 대신 미국에 배치돼 있던 미 제2사단이 한국으로 이동했다. 당시 두 부대의 규모나 무장 수준이 그다지 차이가 없었으므로 그냥 맞교대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제1기병사단은 미국에 도착한 지 석 달 만에 다시 태평양을 건너 베트남 전쟁에 뛰어들었다.


미국이 참전한 모든 전쟁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소리를 듣는 미 제1기병사단의 전통을 엿볼 수 있는 행사 장면. 비록 서류상 맞교환이었지만, 부대의 전통과 이름을 지킨 덕분에 3개월 만에 한국에서 미국으로, 다시 베트남으로 이동 전개하는 희한한 기록을 남겼다. 사진 위키미디어
미국이 참전한 모든 전쟁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소리를 듣는 미 제1기병사단의 전통을 엿볼 수 있는 행사 장면. 비록 서류상 맞교환이었지만, 부대의 전통과 이름을 지킨 덕분에 3개월 만에 한국에서 미국으로, 다시 베트남으로 이동 전개하는 희한한 기록을 남겼다. 사진 위키미디어

‘이름’에 담긴 가치

이 때문에 상식적으로 보자면 복잡하게 그럴 필요 없이 제2사단을 베트남으로 보내는 것이 가장 합리적으로 생각될 것이다. 아무리 돈 많은 미군이라도 사단급 부대를 재배치하는 데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부대를 전개했다. 이는 부대의 이름을 지키려는 미군의 유별난 고집 때문에 벌어진 일종의 착시다.

1963년 미군은 기존 사단 중 하나를 신속 기동 부대로 바꾸기로 했다. 어느 사단을 개편해도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지만, 기병대의 전통을 승계한 제1기병사단을 개편하는 것이 뭔가 이치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당시 해당 부대는 한국에 주둔 중이라는 점이었다. 그렇다고 이들을 철군시키고 대신 다른 부대를 보내는 것은 불합리했다.

이에 본토의 제2사단을 제1기병사단으로, 한국에 주둔한 제1기병사단을 제2사단으로 이름만 바꾸기로 했다. 즉 병력, 장비, 시설 같은 하드웨어는 그대로 두고 간판, 역사, 전통 같은 소프트웨어만 교환한 것이다. 물론 이로 인한 행정 비용 등이 발생했지만, 어쨌든 제1기병사단을 본토로 이전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국군에도 그런 사례가 있다. 1973년 베트남에서 철군한 수도사단은 제32사단 주둔지에 자리 잡았다. 대신 제32사단은 국군의 월남 파병 이전에 주둔했던 충남 연기로 이동했고, 그곳에 있던 제51사단은 경기도 남부로 다시 전개했다. 이처럼 연쇄적으로 부대 이동이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나, 사실 부대의 역사와 전통을 중시하다 보니 서류상으로 그렇게 바뀐 것뿐이었다.

수도사단은 이미 병력과 장비가 감축되어 귀국 당시에 실체가 사라진 상태였다. 하지만 워낙 역사적 위상이 큰 부대라서 제32사단을 수도사단으로 바꾸고 대신 제51사단을 제32사단으로, 제99여단을 제51사단으로 변경한 것이었다.

바꾸기도 힘들지만 희한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억지로 사수하려고 하는 것이 군부대의 이름이다. 그 정도로 중요한 가치이자 존재다.

남도현 군사칼럼니스트

  • 목록
  • 인쇄
  • 스크랩
  • PDF 다운
ⓒ 조선경제아이 & econom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