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대영박물관에 있는 아슈르바니팔 황제의 ‘사자 사냥’ 부조. 아시리아의 쟁쟁한 정복 군주들은 자신들이 벌인 전투와 사냥을 부조로 만들어 궁전 벽에 걸어 놓는 것을 좋아했다.
영국 대영박물관에 있는 아슈르바니팔 황제의 ‘사자 사냥’ 부조. 아시리아의 쟁쟁한 정복 군주들은 자신들이 벌인 전투와 사냥을 부조로 만들어 궁전 벽에 걸어 놓는 것을 좋아했다.

영국 대영박물관 최고의 작품 중 하나가 아시리아(메소포타미아 북부 지역에서 티그리스강 상류를 중심으로 번성한 고대 국가, 오늘날 이라크 지역)의 궁전에서 발굴한 전쟁화 부조(평면에 형상을 입체적으로 조각한 작품)들이다. 아시리아의 쟁쟁한 정복 군주들은 자신들이 벌인 전투를 부조로 만들어 궁전 벽에 걸기를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눈길을 끄는 부조는 아슈르바니팔 황제(기원전 687~기원전 627년)의 ‘사자 사냥’이다. 

아슈르바니팔은 아시리아의 전성기를 영위했던 황제다. 그는 역대 황제의 부조 중에서도 최고의 작품을 남겼는데, 그중에 평지에 발을 디디고 서서 자신에게 달려드는 거대한 수사자를 칼로 찔러 죽이는 장면이 있다.

황제가 정말 저렇게 위험한 대결을 했을까. ‘그냥 자신의 용맹을 과시하려고 그려 놓은 장면이겠지.’ 관람객들은 대개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아시리아의 역대 황제들은 이런 위험한 사냥을 즐겼다. 특히 사자 사냥을 무척이나 좋아해서 황제마다 수백 마리의 사자를 죽였다. 말을 타고 활을 쏘고 창으로 찌르기도 하고, 전차를 타고 사냥하기도 했다. 보통은 부하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최소한 몇 마리는 이 조각처럼 두 발을 땅에 붙이고 서서 사자를 찔러 죽였다. 화살을 맞아 부상을 입고 쇠약해진 사자이거나 또 무슨 특별한 조치를 했을 수도 있지만, 일대일 대결을 벌인 것은 사실이다. 아시리아에 이런 전통을 만든 계기는 바로 ‘강철검’이었다. 무딘 청동제 칼이었다면 누구도 감히 사자와 이런 대결을 벌이지 못했을 것이다.

강철무기를 최초로 사용한 제국은 지금의 터키 중부에 위치했던 히타이트였다. 그러나 강철무기로 진정한 제국을 건설한 나라는 아시리아다.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왕국으로 히타이트와 교역하던 아시리아는 히타이트로부터 강철무기를 수입했다. 그리고 히타이트보다 더 빠르게 성장해 히타이트를 위협했고, 마침내 메소포타미아에서 이집트를 아우르는 제국이 됐다.

청동기 시대에 등장한 강철의 위력은 충격적이었다. 강철검과 청동검이 부딪치면 청동검은 단박에 부러진다. 그보다 더 대단한 것은 강철검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자랑인 거대한 성을 무용지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기원전 2500년쯤부터 엄청난 성을 쌓았다. 

이중 삼중의 성벽, 빽빽하게 늘어선 방어탑, 내성과 외성으로 구분된 방어 구조는 3000년 이후 중세의 성들과 비교해, 더 훌륭하면 훌륭했지 못하진 않았다. 

그러나 이 성은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흙을 다지거나 구운 벽돌로 쌓아 강도가 약했다. 청동무기로는 어쩔 수가 없었지만 강철검으로는 곡괭이처럼 성벽을 뚫고 들어갈 수 있었다. 아시리아 전쟁화를 보면 병사들이 왼손에는 방패를 들어 머리 위를 방어하고, 오른손에는 검을 쥐고 성벽에 구멍을 내는 장면이 있다. 그만큼 강철은 대단하고 충격적인 무기였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다른 나라들이 청동무기로 무장하고 있는 시대에 당신에게 강철검이 있다면 어떤 군대를 양성하고, 어떤 전략을 세우겠는가.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은 정예 병사를 모아 최강의 전투사단, 무적의 군대를 만들겠다고 말하지 않을까. 그리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강철군단을 당해낼 군대는 없다. 우리는 어떤 적이든 무찌를 수 있다. 자 앞으로 나아가자.”

아시리아가 최강의 사단을 믿고 전쟁을 벌였다면 결코 제국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아시리아가 최강의 전투부대를 양성한 것은 맞다. 아시리아의 전투병들은 현대의 군사 전문가들도 찬탄할 정도로 정예였다. 그들은 평지·산악·물·숲을 가리지 않고 싸웠고, 어디서나 최고의 전투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아시리아는 강철이 병기뿐 아니라 도구로도 혁신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성벽을 뚫고 나무를 자르고 바위를 깨뜨릴 때 강철은 청동이 엄두도 내지 못하던 일을 해냈다. 보통의 사람들은 이것은 강철의 군사적 기능이 아닌 평화적 용도, 소위 민간 부문의 기능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시리아는 이것이 군사적으로 혁신을 가져오는 기능임을 알았다.

아시리아군의 최정예는 공병대였다. 아시리아는 역사상 최초로 대규모 공병대를 편성하고 전쟁에서 유용하게 사용했다. 아시리아 황제들은 전쟁에서 승리하면 공적비를 세우기를 좋아했다. 유명한 황제의 공적비마다 자신의 군대가 숲을 베고 산을 넘고 늪지를 건너 지금껏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루트로, 혹은 지금껏 어느 군대도 가지 못한 경로를 개척하고 빠르게 진격해서 적을 제압했다는 자랑이 나온다.


과거 기능에 묶이면 혁신 나오지 않아

아시리아는 공병의 기능에 주목하고 완전히 새로운 전략을 구상했다. 그들은 산과 숲을 가로지르며 적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빠르게 이동하고, 유리한 지형을 점거해 적을 쳐부쉈다. 덕분에 아시리아 군대는 쉬지 않고 제국의 국경을 빙빙 돌아다녀야 했지만, 그만큼 많은 승리를 거두고, 그만큼 많은 전리품을 거둬 병사들에게 나눠줬다. 그리고 제국을 확장시켜 나갔다. 

기원전 8세기에서 7세기 초에 아시리아의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와 센나케리브는 레바논과 팔레스타인을 정복했다. 그의 아들과 손자인 에살하돈과 아슈르바니팔은 이집트까지 정복했다.

아시리아가 초유의 성공을 이룬 비결은 무적의 강철검이 아니라 강철도구와 공병에 주목하고, 여기서 전에 없던 기동전략을 창안한 덕분이었다.

인류가 내연기관을 발명하자 자동차와 탱크가 등장했다. 제1차세계대전 이후 거의 모든 군인들은 탱크가 기관총 등의 무기로부터 보병을 보호하는 장비라고 생각했다. 0.1%도 안 되는 장교만이 탱크를 보고, 기동전이라는 새로운 전략을 구상했다. 독일 장교였던 구데리안은 이를 시도한 최초의 장교였다. 그는 탱크가 없어 트럭을 빌려, 후에 전격전이라고 불리는 기동전을 시연했다. 이 광경을 본 사령관은 구데리안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보게 이 트럭들은 밀가루를 나를 예정일세.”

탱크가 기총소사와 참호전의 고통으로 탄생했듯이 새로운 도구, 새로운 소재는 현실적인 필요에서 탄생한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그 기능에 묶인다. 하지만 아시리아가 그랬고, 전격전의 창시자들이 그러했듯이 위대한 리더, 위대한 경영자란 새로운 발명이 주는 새로운 가능성을 짚어 내고, 그것을 실현하는 조직과 전략을 창조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것을 보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서 리더는 지금 가능한 일 현재의 목표를 이루는 데만 집중하지 말고, 자신이 하지 못하는 일, 자신을 막고 있는 장애를 늘 기억하고 마음에 가시처럼 박아두고 있어야 한다. 모든 위대한 발명과 혁신적인 전략은 그 불편한 마음속 가시에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