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개봉한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블랙 호크 다운’은 1993년 모가디슈 전투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사진 영화 ‘블랙 호크 다운’ 스틸컷
2001년 개봉한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블랙 호크 다운’은 1993년 모가디슈 전투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사진 영화 ‘블랙 호크 다운’ 스틸컷

1993년 10월 3일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 한복판. 미군 특수부대와 소말리아의 제5대 대통령이자 무장 군벌(軍閥) 모하메드 파라 아이디드의 민병대 간에 처절한 혈전이 벌어졌다. 이 전투는 미국 기자 마이크 보우덴의 저서 ‘블랙 호크 다운(Black Hawk Down)’에 생생하게 소개됐고, 영화계의 거장 리들리 스콧 감독의 연출로 영화로 만들어져 널리 알려졌다.

델타포스와 레인저 중대로 구성된 미군 특수부대는 대낮에 아이디드의 회의장을 급습하겠다는 대담한 계획을 세운다. 아이디드를 체포하면 최상이고, 그게 안 되더라도 그의 수족들을 체포해 이 세력을 해체하는 것이 목표였다.

6주가 지났는데도 뚜렷한 성과가 없자 지휘부는 초조해졌다. 초조함은 인간의 판단력을 흐리게 한다. 미군은 자신들을 둘러싼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아이디드 세력만을 공격하는 ‘핀셋 처방’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미군이 처음부터 민간인 희생 가능성을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는 의미다. 초조함이 대규모 시가전이나 민간인 희생에 대한 우려를 간과하게 만들었다.

미군은 이 작전을 한 시간 안에 끝낼 예정이었다. 작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선 △아이디드파가 모여있는 호텔 올림픽에 헬기로 침투하고, 델타포스가 내려가 목표물을 제압한 뒤 △레인저중대는 건물 네 귀퉁이로 강하해 도로를 통제하고 △‘블랙 호크’ 헬기 4대와 ‘리틀 버드(little bird·작은 새)’라고 불린 휴즈500 헬기가 건물 주변을 돌면서 엄호한다는 계획이었다. 이후에는 미군이 체포한 자들을 태우고 순조롭게 빠져나오기만 하면 임무 완수였다.

미군은 트럭과 험비(HMMWV·미군의 4륜 구동 자동차)로 호송대를 꾸렸다. 이 호송대는 작전대로라면 회의장 한 구역 아래에서 대기하다가 미군 병력과 체포한 사람들을 태워서 나올 계획이었다. 15분 정도 달려 시내 중심가만 벗어나면 미군 기지였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라는 게 미군의 예상이었다.

미군은 ‘작전을 수행하는 도중 민병대의 저항이 있을 수 있겠지만, 위협적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겪은 소말리아군의 저항은 허공에 사격하고 도망가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작전 시작 전 미군 병사들은 “돌멩이에 맞지 않게 조심하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런데 정작 작전을 개시하자 상황은 미군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격렬한 총격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더 놀라운 건 구름처럼 몰려드는 수천명의 사람들이었다. 민병대와 비무장 민간인들이 섞여 있었고 노인, 여자, 아이들도 있었다. 병사들은 아연실색했다. 민병대 일부는 주민들을 인간 방패로 사용했다. 공중에서 로켓탄과 미니건을 갈겨야 할 미군 헬기는 민간인과 무장 세력을 구분할 수 없었다.

한 시간 안에 끝나리라 생각했던 전투는 소말리아인들의 무기로는 절대 격추할 수 없다고 믿었던 블랙 호크의 추락으로 양상이 바뀐다. 공중을 돌던 블랙 호크 4대 중 1대가 민병대가 발사한 로켓포 RPG에 꼬리날개를 맞고 전투지에서 한 구역쯤 떨어진 곳에 추락했다. 그간 로켓포로 헬기를 맞추는 것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개선된 기술을 개발했고, 이들은 소말리아를 비롯한 아프리카에 노하우를 전수한 상태였다.

결국 블랙 호크 61호는 격추됐다. 인근에 있던 리틀 버드가 잽싸게 생존자를 구출해 탈출했다. 미군은 블랙 호크 1대가 격추됐음에도 기존 작전을 강행했다. 그 결과 20분만에 블랙 호크 64호기가 61호기처럼 꼬리 날개를 맞고 추락했다. 64호기 탑승자 가운데 조종사 한 명만 살아남았다. 다른 블랙 호크에 탑승해 이 광경을 지켜보던 저격수 2명은 살아남은 조종사를 보호하기 위해 상공에서 하강했다.

병력을 태우고 기지로 귀환하려는 호송대에 추락 현장에 가서 살아남은 아군을 구조하라는 임무가 떨어졌다. 도로 양쪽에서 쏴대는 총탄과 RPG 세례를 뚫고 험비와 트럭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정확한 추락지점을 몰랐으므로 하늘에서 지켜보던 공중 정찰 헬기에서 지시하는 대로 움직였다.

시키는 대로 운전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음에도 작전은 실패했다. ‘명령과 실제 운전 간 시차’라는 복병이 있었다. 헬기는 호송대를 향해 “똑바로 직진, 다음 사거리에서 좌회전”과 같은 식으로 명령을 내렸다. 정찰용 헬기에서 지상으로 중계하고, 그곳에서 다시 공중 작전 통제소로 명령이 내려졌으므로 계속 달리던 호송대와 시차가 발생했다. 공중 정찰 헬기는 “아니, 아니 지나쳤다. 다시 다음 사거리에서 좌회전 해라”고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다.

호송대는 끝내 추락한 헬기에 도착하지 못하고 총알 세례를 받으며 거리를 빙빙 돌았다. 적진에서 수십 분간 방황한 트럭과 험비는 벌집이 됐다. 방탄 차량이라고 해도 총알을 무한정 견뎌낼 수는 없다. 병사들 절반이 크고 작은 부상했다. 그제야 미군은 장갑차량을 준비하지 않고 적진 한복판에 뛰어든 것을 후회했다.

마침내 호송대는 접선을 포기하고 기지로 탈출했다. 남은 병사들은 시가에 고립됐다. 미군 헬기 부대가 야간 전투를 감행하며 엄호한 덕에 이들은 겨우 살아남았다. 다음 날 유엔군과 미군 부대가 투입돼 구출 작전을 벌여 생존자들이 탈출했다. 투입한 미군 병력 160명 중 19명이 사망하고 70명이 부상했다. 부상자 상당수가 다시 군 복무가 불가능한 상해를 입었다. 소말리아 측 피해는 더 무섭다. 사상자가 1000명이 넘는 것으로 전해졌다. 정확한 수치는 파악하기 어려우나, 그 중 상당수가 민간인이었다고 한다.


명령 체계의 중요성 보여주는 사례

이 전투의 문제점 두 가지는 절박함으로 인한 지나친 낙관 그리고 혼란스러운 지휘 체계다. 미군의 통제 체계는 사령부, 공중 정찰 헬기, 공중 통제소, 현장 지휘부로 구성돼 있었다. 이 체계는 최첨단 장비와 노련한 지휘관들의 절묘한 결합으로 보였다. 투입조가 적진에 소리없이 잠입해 목표물을 탈취하고, 공중 정찰 헬기가 적의 지원 차량을 박살내고, 호송부대가 신속하게 들어가 부대원을 태우고 돌아올 때는 말이다.

하지만 실제 전투에서 시가전이 벌어지자 이 지휘 체계는 혼란에 빠졌다. 정보가 뒤죽박죽 섞이고 판단과 책임을 서로 미뤘다. 그 사이에 병사들은 헛되이 전쟁터를 방황하다 피를 흘렸다. ‘명령 체계를 어떻게 구성할 것이냐’는 모든 조직이 안고 있는 고민이다. 깔끔한 테이블 위에서 결정을 내릴 때는 명령 체계의 중요성이 드러나지 않는다. 현장에서 뒤섞이게 되고, 1초 빠른 결정이 승부를 좌우하는 순간에 명령 체계의 진가가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