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토 페레러 달마우가 그린 ‘로크루아 전투’는 스페인의 테르시오 전술이 처참히 무너지는 최후의 장면을 담았다. 사진 위키피디아
아우구스토 페레러 달마우가 그린 ‘로크루아 전투’는 스페인의 테르시오 전술이 처참히 무너지는 최후의 장면을 담았다. 사진 위키피디아

필리포스 2세는 아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스승으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를 초빙하기 위해 엄청난 공을 들였다. 필리포스는 반란으로 파괴됐던 아리스토텔레스의 고향을 복원하고 노예로 팔려간 수천 명의 시민을 복권해 줬다. 심지어 아리스토텔레스가 애용하던 산책로까지 복원해 줬다.

그러나 정작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드로스에게 무엇을 가르쳤는지, 그 교육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이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라는 명성과 교양 교육 외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것이란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는 학자들도 많다.

이런 회의적인 시선에는 인문학의 본질적 고민이 깔려 있다. 바로 ‘인문학이 실생활에 무슨 도움이 되느냐’는 것이다. 전쟁서에서도 인문학은 마찬가지 취급을 받는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장은 탁상공론과는 거리가 멀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어떤 무기보다 많은 병사를 죽인 무기가 탁상 위의 종이’라는 씁쓸한 농담도 있다. 인문학과 현장의 만남은 어려운 것일까. 포연이 피어오르고 순식간에 젊은 생명이 사라지는 전장에서는 더욱 불가능한 것일까.

총과 대포가 전술을 변화시키기 시작한 것은 16세기부터였다. 중세의 지배자였던 은빛 갑옷의 기사단이 검은 화약이 토해내는 철 조각에 목숨을 잃기 시작했다. 17세기가 되자 왕과 귀족들도 완전히 새로운 룰과 전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난감했다. 검은 연기를 토하는 죽음의 막대기는 전쟁사에서 전례 없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총기는 빠른 속도로 진화했다. 15세기 말에 창병과 총병의 비율은 4 대 1로 창병이 많았다. 16세기에는 이 비율이 1 대 1이 됐고, 17세기 후반이 되자 총병이 창병의 5~6배 수준으로 늘었다. 총의 성능도 무섭게 발전했다. 총기는 17세기 들어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도 사격할 수 있는 수준으로 개선됐다.

17세기에는 로마의 고전을 연구하는 방법이 유행했다. 단순한 이론가뿐 아니라 야전을 경험한 실전 지휘관들도 고전 연구에 탐닉했다. 화약을 알지도 못했던 로마 군단의 전쟁사와 전술 교본이 17세기 전쟁에 도움이 됐을까. 아마 당시에도 회의적 의견을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로마 고전 연구 결과를 신전술에 적용했고, 유럽 대륙을 놀라게 했으며 전쟁의 역사를 바꿨다. 네덜란드는 스페인에 맞서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16세기 스페인은 세계 최고의 부와 육군을 보유한 강력한 제국이었다. 이런 스페인과 네덜란드의 싸움은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처럼 보였다.

네덜란드도 그 사실을 알았다. 이들은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기 위해서는 영리해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분주히 움직였다. 그들이 찾아낸 절대원칙은 ‘물자와 인력이 밀리는 군대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효율을 높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허점을 공략하기로 했다. 스페인은 16세기에 창병과 총병을 결합한 ‘테르시오’라는 전술을 썼는데, 이는 총이 근접전에서 갖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스페인은 창병이 세로로 긴 직사각형 방진을 형성하고 총병이 앞과 옆에 늘어서게 했다. 총병이 사격하고 창병의 뒤로 숨으면, 창병이 전진해서 백병전을 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 전술은 뒤 열의 병사들은 별로 싸울 일이 없었기에 병력이 낭비된다는 단점이 있었다.

네덜란드군은 이 점에 착안해 대형을 세로로 긴 종대가 아닌 횡대로 바꾸었다. 테르시오 대형 하나에 필요한 병력은 약 2000명이었는데, 네덜란드는 이를 800명, 500명으로 줄였다. 횡대 대형은 한 번에 일제 사격을 하는 총병의 수를 늘릴 수 있어서 화력을 2배 이상 강화할 수 있고, 뒤 열에서 노는 병사를 줄일 수 있다.

스페인군은 대형이 작아지면 백병전이 벌어졌을 때 적의 충격에 약하다는 점 때문에 횡대 대형을 도입하지 않았다. 병사들의 훈련이 부족하고, 질이 떨어지는 병사가 많은 것도 문제였다. 이들을 실전에 적응시키기에 제일 좋은 방법이 밀집대형의 후방에 붙여넣어서 제한된 역할을 하면서 전쟁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었다.


고전에서 배운 軍의 리더십

네덜란드군은 이 고민을 여러 작은 대형이 서로 돌아가면서 움직이고 엄호해 주는 방식으로 해결했다. 여기에 더해 대형을 잘게 쪼개고 얇게 한 만큼 줄어드는 용기와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과 가능성을 고전에서 배웠다. 먼저 엄정한 군기를 강조했는데, 이때 군기는 폭력과 처벌을 강화하는 게 아니라 군 전체의 규율과 신뢰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는 약탈, 횡령, 폭력이 일상화된 유럽 국가들의 군대 분위기와 차별화하는 방식이었다. 당시 유럽 군대들은 행진할 때마다 민가를 약탈하고, 민폐를 끼쳤다. 지나가는 길에 아이나 부녀자를 납치해 돈을 받고 풀어주는 인질극도 흔하게 벌였다. 이따금 인질을 되돌려줘야 한다는 사실을 깜빡 잊곤 했다. 전쟁사의 진리 중 하나는 힘없는 사람에 대한 폭력에 익숙해진 군대는 날이 갈수록 비겁해진다는 것이다.

네덜란드군은 군인들의 월급날을 정확하게 지켜줬다. 로마가 직업군인들을 합리적인 시스템을 기반으로 한 군기와 군율로 다스린 것처럼 말이다. 이는 군기와 사기, 책임감에 제일 중요한 요소였다. 합리적인 병영 생활을 정착시키자 단숨에 네덜란드군은 주민에게 신뢰받는 군대로 변모했다.

여기에 더해 네덜란드는 하급장교, 부사관, 상위병사를 대폭 늘리고 그들의 리더십과 책임을 분명히 했다. 병사들의 계급도 세분화하고 계급이 하급병사를 괴롭히는 특권이 아니라 늘어난 보수에 맞는 책임감과 능력, 국가에 대한 헌신의 표상임을 분명히 했다. 로마군이 병력이 10배 이상이었던 갈리아, 게르만군과 싸워서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 중 하나가 백부장, 중대장, 고참병사로 이루어진 리더십 체계 그리고 이들이 주도하는 임기응변이었다는 점을 참고했다.

전술가들이 고전을 통해 찾아낸 방법은 싸우는 법이 아니었다. 고전은 인간의 잠재력 그리고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군대와 전술 개혁의 가능성을 알려줬다. 현재는 당연한 것으로 보이는 모습도 고전을 통해 보면 이 상황이 매우 제한적이고 특수한 현상임을 깨달을 수 있다. 고전은 인간 세계가 훨씬 넓고 심오하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