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세황 초상화
강세황 초상화

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문인화가이자 미술평론가였다. 시서화(詩書畵)에 모두 뛰어나 정조대왕으로부터 ‘삼절(三絶)의 예술’이란 소리를 들었고, 궁중화원부터 재야의 선비까지 신분과 지위를 넘나든 교유를 하였기에 ‘예원(藝苑)의 총수’로 불렸다. 그래서 18세기 ‘조선의 르네상스’를 꽃피운 일등공신이라고 한다. 그는 64세나 된, 너무 늙은 아버지로부터 3남 6녀 중 막내로 태어났으니 건강하게 장수하기 어려운 조건이었지만 요즘의 100세 정도에 해당되는 79세까지 장수했다.

4대째 장수한데다 3대가 내리 ‘가문의 영광’인 기로소(耆老所)에 입소했다. 70세 이상 중신들을 공경하기 위한 기구인 기로소는 나이만 차면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문신으로서 정2품 이상의 관직을 거친 자여야만 자격을 얻었다. 조부, 부친 그리고 표암이 문과 급제에 종2품 이상의 벼슬 그리고 70세 넘게 장수한 매우 드문 집안이다. 증조부 강주(姜籒·1566∼1650)는 85세까지 장수한 천재 시인이었다.

조부 강백년(姜栢年·1603∼81)도 79세까지 장수했고 대단한 시인이었다. 25세에 정시문과에 급제해 승지, 관찰사, 판서를 거쳤고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됐다. 부친 강현(姜·1650~1733)도 역시 84세까지 장수했다.

26세에 진사시에 장원하고 31세에 정시문과에 급제한 뒤 관찰사, 도승지, 형조판서, 대제학, 한성판윤 등을 지냈다.

표암은 일찍부터 그림에 자질이 있어 열 살 때 예조판서인 아버지를 대신해 도화서(圖畵署) 생도(生徒) 취재(取才)에 심사관으로 직접 나서 등급을 매긴 일도 있었다고 한다. 요즘으로 보면 국립 미술대학 입시에 초등학교 4학년짜리가 심사위원이 됐다는 얘기로, 예술유전자를 물려받았던 것이다.


표암의 ‘영통동구’. 송도를 여행하며 바위의 웅장함을 그린 ‘송도기행첩’중 한 장면이다. <사진 : 국립중앙박물관>
표암의 ‘영통동구’. 송도를 여행하며 바위의 웅장함을 그린 ‘송도기행첩’중 한 장면이다. <사진 : 국립중앙박물관>

적게 먹고 많이 걸어

노론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남인인 표암의 집안은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게다가 맏형이 이인좌의 난에 가담했다는 누명을 쓰고 유배를 가게 되면서 역적으로 낙인 찍히고 벼슬길이 막히며 살림도 어려워졌다.

25세 때 남대문 밖 처가의 빈집으로 옮겼다가 32세 때는 처가인 안산으로 내려와 30년 가까이 머물렀는데, 몰락한 양반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삼순구식(三旬九食), 즉 굶기를 밥 먹듯이 할 정도로 몹시 빈궁한 생활을 했다. 그 바람에 부인이 45세에 세상을 떠나는 등 ‘죽지 못해 사는 것’처럼 힘들고 어려웠지만 선비의 본분을 지켰다.

그랬기에 아들 중 둘이나 과거에 급제했다.

또 부친이 청백리였던데다 젊은 시절부터 궁핍하게 생활했으니 성인병에 걸릴 일은 없었다고 봐야겠다. 특히 성호 이익과 교류했으니 소식(小食)이 건강에 좋다는 것은 알았을 것 같다. 물론 많이 걸어 다녔을 것이고.

표암은 그림을 벗하며 시를 짓고 글씨를 쓰며 살았기에 기나긴 백수 시절이 결코 무의미하지는 않았다. 학문과 예술 전반에 두루 전념했고 이름난 화가였던 정선, 심사정 등과 교류하며 김홍도 같은 제자를 기르기도 했다. 그리고 직접 산에 가서 풍경을 보고 그리는 ‘진경산수화’를 그렸다.

당시에는 지방 관리들이 친한 벗들을 초청해 명승을 구경하고 이를 글과 그림으로 남기는 문화가 유행했는데, 표암은 45세 때 개성유수의 초청을 받아 여행하면서 ‘송도기행첩’을 남겼다. 57세에는 차남 강흔이 현감으로 재임할 때 변산 일대를 유람하며 ‘우금암도’를 남겼다.


그림에 대한 지치지 않는 열정

환갑을 맞으면서 인생의 전환점이 왔다. 장남 강인이 급제해 궁중연회에서 영조대왕을 만났는데, 영조는 이전에 알았던 표암의 부친 강현을 기억해 냈다. 영조가 표암의 근황을 물으면서 옛 충신의 아들이 육십이 넘도록 벼슬도 못하고 안산에서 궁핍하게 생활한다는 사연을 듣게 됐다. 그래서 영조는 표암에게 종9품 영릉참봉을 제수했고, 곧 사임하자 다시 종6품 사포서 별제에 임명했다. 그동안 닦은 학문이 워낙 뛰어났기에 64세 때 기로과, 66세 때 문과정시에 당당히 장원급제했다. 이후 한성부 좌윤, 호조와 병조참판을 거쳐 71세에는 한성부 판윤이 됐고 호조판서까지 지냈다.

표암은 관직에 나가면서부터 영조의 뜻을 받들어 그림을 중단했지만 다시 붓을 잡기까지 10년 동안 미술평론가로 활동했다. 그래서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 등 유명 서화가들의 작품에 방대한 양의 평을 남겼다. 말년에는 자화상, 초상화 등을 그렸다. 사군자도 즐겨 그렸는데, 매난국죽을 묶어서 한 벌로 그리는 새로운 형식을 창안하기도 했다. 또 청나라를 통해 들어온 서양 채색화법에 관심을 갖고 서화에 대한 안목과 식견을 쌓으며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계속했다. 79세에 붓을 놓을 때까지 꾸밈없이 소박한 필치, 맑고 고운 채색법 등으로 자신만의 개성 있고 독자적인 화풍을 보여줬다.

표암의 삶은 ‘예술혼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기에 그것만으로 장수비결이 되기에 충분할 것 같다. 역경을 딛고 60세가 넘어서도 20년 가까이 많은 활동을 한 삶을 느껴보는 그 자체가 건강에 도움이 될 것으로 여겨진다. 73세 가을에는 연경(베이징)에 갔다. 육로로 6개월 넘게 걸리는데다 추위로 인해 고생이 이만저만 아닌데, 당시 건륭황제가 자신의 칠순 축하연에 70세 넘은 사신을 보내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표암은 잘 다녀왔을 뿐만 아니라 그의 서화가 중국에까지 이름이 났다고 한다. 76세 때는 회양부사에 임명된 장남을 따라 금강산을 유람하면서 기행문과 실경사생화 등을 남겼다. 등산로도 변변치 않았을 것인데.


▒ 정지천
동국대 한의과대학 졸업, 한의학박사, 동국대 한의대 한방내과 교수 서울 동국한방병원 병원장, 서울 강남한방병원 병원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