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빙(樹氷)이 늘어선 하코다 산에서 스키를 즐기는 모습. <사진 : 이우석>
수빙(樹氷)이 늘어선 하코다 산에서 스키를 즐기는 모습. <사진 : 이우석>

지긋지긋한 기억이지만 막상 떠나보내려면 아쉬움이 남을 때가 있다. 겨울이 가는 것이 그렇다. 미끄럽고 추운 계절. 주점·커피숍엘 가도 두꺼운 옷이 의자 하나씩 차지하고, 또 무얼 하나 찾으려면 뭐 그리 주머니가 많은지, 모든 것이 번거로운 악동 계절이 이제 스쳐 지나듯 멀어지고 있다.

하지만 막상 겨울을 떠나보내려니 아쉽다. 설 지나 꽃이 피면 바로 봄, 이때부터 눈이 그리워지기 시작한다. 이럴 땐 겨울을 좀 더 오래 붙들고 있는 일본 도호쿠(東北) 지방 여행이 좋다.

일본은 강설량이 많은 나라다. 도호쿠와 홋카이도 지방의 강설량은 어느 정도 인구가 모여 사는 도시 중 세계 최고 수준이랄 수 있다.


경이로웠던 겨울왕국과의 첫 만남

특히 아오모리(靑森)는 눈으로 유명하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은 니가타(新潟)가 배경이지만 강설량은 아오모리와 아키타가 더 많다. 아오모리는 하루이틀 새 2~3m씩 내려 쌓이는 것이 예삿일이다. 그중에서도 눈이 가장 많이 온 날, 아오모리에 갔다.

눈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왔단 얘기를 이미 들었던 터라 일정이 걱정됐다. 안전벨트에 묶인 채 창밖을 보니 드넓은 설원이 눈에 들어온다. 음영 이외에 색을 가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하얀 땅. 공항에서부터 눈벽 터널이 만들어졌다. 공항에서 나온 순간 봅슬레이 코스처럼 펼쳐진 차도 양쪽으로 족히 3~4m는 쌓인 눈벽이 신선한 충격을 줬다.

‘눈의 나라’ 아오모리에서 즐길 수 있는 것은 생각보다 많다. 우선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많은 눈을 감상하는 것. 그리고 그 눈을 제대로 즐기는 것이다.

한입 베어물면 달큼한 향이 확 퍼지는 아오모리 사과와 추위를 피해 홀짝홀짝 기울이는 뜨거운 사케 역시 필수 사항이다.

아오모리는 이를테면 일본의 ‘땅끝마을’이다. 우리나라 땅끝 해남과 다른 점이 있다면 아오모리는 혼슈의 북쪽 끝이란 점이다. 이 하얀 나라에는 엄청난 눈 속에 많은 즐길거리가 숨어있다.

마지막으로 아쉬움 없이 겨울을 즐기기 위해선 스키가 필수다. 아오모리 하코다(八甲田·1584m)산은 인공설이 아닌 자연설에서 즐기는 파우더 스키로 유명한 곳이다. 케이블카를 타고 하코다산 정상까지 올랐다. 케이블카는 무척 낡았다. 우리네 스키장처럼 ‘최신형’ 곤돌라가 아니다. 캐빈 안은 추웠고, 흔들흔들하며 한참을 올랐다.

밑에서 볼 때는 맑았지만 막상 정상(약 1300m)에 도착했을 때는 눈앞이 온통 눈보라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팔을 뻗어봤는데 팔꿈치부터 하얀 눈보라 속으로 들어가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하코다 맛세쓰(抹雪·가루 눈) 스키체험이 될지 조난체험이 될지 모를 일이었지만 어쨌든 내려가기로 마음먹었다. 마치 술취한 사람처럼 비틀대며 좁은 코스를 내려갔다. 데굴데굴 구르며 산 정상 부근에서 헤매던 도중, 나는 간신히 폴에 의지한 채 멈춰섰다. 온통 하얀 눈보라 속 설인 같은 괴물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수빙(樹氷·나뭇가지에 붙은 눈이 얼어붙어 거대한 눈덩이로 변한 모습의 나무)이다. 거인처럼 서있는 모습 탓에 일명 ‘스노 몬스터’라 불리는 수빙. 키가 껑충한 토속 침엽수(도도마쓰)가 불어오는 눈보라로 겹겹이 하얀 얼음으로 싸여 생겨난 기경(奇景)이다.

신기한 수빙을 둘러보다 다시 한번 깜짝 놀랐다. 살짝 걷힌 안개 사이로 이런 수빙가 군단처럼 수백, 아니 수천 그루 포진한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진시황의 병마용갱, 아니 반지의 전설에서 본 듯한 오크군단. 그 무엇보다도 실감나는 수빙 군단을 살짝살짝 피하며 내려오는 것이 바로 하코다의 스키다.


아오모리 후루가와 시장의 별미 ‘놋케동’ . <사진 : 이우석>
아오모리 후루가와 시장의 별미 ‘놋케동’ . <사진 : 이우석>

일본 국민보양온천지 1호 스카유 온천도 인기

기이한 스노 몬스터들 사이를 떼굴떼굴 굴러다니며 어렵사리 내려왔다. 몸은 성치않았다. 그런데도 마음이 너그러워진 것은 뜨거운 온천에 몸을 녹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하코다산 아래 스카유(酸ケ湯)온천은 300년 전 상처 입은 사슴이 온천에 몸을 담그며 치료하는 것을 보고 발견했다는 곳(대부분 온천은 이런 이야기를 하나씩 가지고 있다)으로 일본에서 병을 치료하는 ‘탕치(湯治)온천’으로 유명한 곳이다. 60년 전에 이미 국민보양온천지 1호로 지정된 명천이다.

게다가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이곳이 남녀혼욕을 허용하는 곳이란 점. 혼욕탕은 남녀가 각자의 탈의실에서 욕장으로 들어오면 서로 만나게 되는 구조다. 탕 한가운데 작대기로 구분해 서로 넘어가지 못하게 해놓았다.

아오모리 풍경을 감상한 후 청정 원시림으로 유명한 오이라세(奧入瀨)로 떠났다.

고불고불한 숲길을 휘감아 도는데 이 길 역시 양쪽이 온통 하얀색이다. 22㎞나 이어진 계곡은 일본인들에게 이름난 트레킹 코스다. 걷기 좋은 데크를 깔아놓은 덕에 숲속 눈 아래로 흐르는 계곡물을 따라 걸어볼 수 있다.

계곡은 거대한 산정 칼데라호인 도와다코(十和田湖)에서부터 내려와 오이라세강으로 이어진다. 중간에 내려 폭포를 구경했다. 햄버거빵처럼 둥글둥글한 눈덩이를 이고 있는 바위 틈으로 아직 얼지 않은 낙숫물이 청명한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얼추 20m는 넘어보이는 폭포는 도로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어 쉽게 다녀올 수 있다.


▒ 이우석
성균관대 미술교육학과, 여행기자협회 회장, 14년째 여행·맛집 전문 기자로 활동 중


여행수첩

가는 길 대한항공이 매일 인천~아오모리를 운항한다. 문의 : 북동북 3현·홋카이도 서울사무소(www.beautifuljapan.or.kr)

먹거리 아오모리는 명품 사과로 유명하고 품질 좋은 사케도 많다. 일본 사케 랭킹에서 상위권을 차지하는 덴슈와 조파리 등은 이미 잘 알려진 아오모리 사케 브랜드. 검역 때문에 사과를 직접 가지고 올 수는 없지만 아오모리 사과를 이용한 애플파이, 사이다, 건사과칩, 사과캐러멜 등 상품이 많아 선물용으로 좋다. 아오모리 후루가와 시장에선 독특한 방식의 ‘놋케동’이 별미. 시장 안에서 공깃밥을 사고, 신선한 가리비·연어알·성게알·회 등 다양한 토핑을 취향대로 하나씩 구입해 얹어 먹는 방식의 덮밥이다.

가볼 만한 곳 아오모리 항구와 시내를 360도 조망할 수 있는 아스팜(아오모리관광물산관), 아오모리 등불축제 ‘네부타’를 전시해놓은 와랏세 네부타 마쓰리 박물관, 비틀스 멤버였던 존 레넌의 미망인 오노 요코의 설치작품과 키가 4m에 이르는 ‘서 있는 여자’ 등이 전시된 도와다현대미술관도 꼭 들러봐야 하는 코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