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 공포증은 고소 공포증과 폐쇄 공포증의 합작품이다. 폐쇄된 공간에서 하늘 높이 떠 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두려움에 빠진다.
비행기 공포증은 고소 공포증과 폐쇄 공포증의 합작품이다. 폐쇄된 공간에서 하늘 높이 떠 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두려움에 빠진다.

중년 신사분이 진료실을 찾았다. 비행기 공포증 때문이다. 이분은 사업을 하시는 분이라 비행기를 자주 타고 다녔다. 그동안 아무 문제 없었는데 지난해 증상이 나타났다. 원인은 난기류 때문이다. 파리에서 인천으로 오는데 비행기가 갑자기 ‘쿵!’ 하면서 추락하듯이 가라앉았다. 그때 극심한 죽음의 공포가 덮쳐왔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고 숨이 막혔다. 승무원을 부르고 응급약을 먹었다. 겨우 진정했지만, 인천에 도착할 때까지 불안 속에서 죽을 것만 같았다. 이후 어쩔 수 없이 몇 번 더 비행기를 탔는데 그때마다 공포증상이 일어났다. 그 뒤부터는 비행기를 아예 타지 않았다. 제주도도 배로 이동했고 해외 출장도 다른 사람에게 맡겼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본인이 꼭 가야 할 상황이었다. 그것도 트라우마가 생겼던 파리였다. 한 달 전부터 불안하더니 출발 일주일을 앞두고 극심한 공포감이 왔다. 안심 명상, 이완 요법, 복식 호흡 등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어도 소용이 없었다. 견디다 못해 무슨 방법이 없을까 하고 진료실을 찾은 것이다. 그분은 불안하게 물었다.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 

비행기 공포증은 고소 공포증과 폐쇄 공포증의 합작품이다. 폐쇄된 공간에서 하늘 높이 떠 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두려움에 빠진다. 불안은 생각이나 의지로 컨트롤되지 않는다. 세상은 내 뜻대로 되는 것이 별로 없다.


비행기에서 숙면 취하면 불안 감소

그분에게 약을 처방했다. 약이라야 간단하다. 항불안제와 수면제다. 비행기 탑승 전까지 항불안제로 안정을 취하고 비행기를 타자마자 수면제를 먹게 한다. 파리까지 가는데 열두 시간 정도 걸리는데 그동안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푹 잘 수 있게 도와주는 약이다. 내가 장담하듯이 말했다.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 약 드시면 편하게 가실 수 있어요.” 그분은 걱정 반, 안심 반으로 약을 타 가셨다. 사실 나도 장담할 수는 없었다. 약이 개인에 따라 효과가 있을 수도 있지만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저 암시 효과를 주려고 확신에 찬 듯 말했을 뿐이다. 

그분의 불안을 충분히 이해한다. 나도 한 번은 비행기가 이륙하는데 극심한 공포를 느낀 적이 있다. 다행히 공포증으로 넘어가진 않았지만, 그 불안이 아직도 남아있다. 언젠가 우연히 들은 라디오 방송이 생각난다. 제주도로 효도 관광 가는 어르신들을 인터뷰하는데, 리포터가 한 할머니에게 물었다. “할머니, 비행기 타는데 무섭지 않아요?” 그러자 할머니는 “뭐, 나만 죽나? 다 같이 죽는데 뭘”이라고 했다. 그때 방송을 듣고 ‘픽~’ 웃음이 나왔다. 비행기를 같이 탄 사람들은 운명 공동체다. 무사히 도착해서 내릴 때는 무심히 흩어지는 사람들이지만 위기의 순간에는 삶과 죽음을 함께할 동지들이다. 신기한 인연이다. 비행기에서 내릴 때 같이 타고 오신 분들에게 속으로 덕담이라도 해야겠다. ‘좋은 인연이었습니다. 행복하게 사세요’라고.

잊고 있었는데 열흘이 지난 후 그 신사분이 찾아오셨다. 양주 한 병을 들고서. 비행기 타자마자 약 먹고 금방 잠들었는데 도착할 때 깼다고, 매우 편안하게 잘 다녀왔다고.


▒ 윤우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밝은마음병원 원장, ‘엄마 심리 수업’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