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집에까지 일을 싸 들고 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 어린 자녀 앞에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학원에 보내는 것 이상으로 학습에 대한 동기부여가 된다.”

덴마크 의료 기업 콜로플라스트의 배금미 신임 NSE(North and Southeast) 아시아 총괄사장은 전도유망한 여성들이 자녀 교육에 대한 부담으로 제대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을 안타까워했다.

콜로플라스트는 인공 항문(장루)·배뇨관리 제품(카테터), 치료 목적의 피부관리 제품 등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글로벌 기업이다. 세계 42개국 80여 개 사무소에서 9000여 명의 임직원을 거느리고 있다. 지난해 매출은 약 2조원이었다.

배 사장은 18세 되던 해에 가족과 함께 미국 시카고로 이민을 떠났다. 이후 미국 메릴랜드주립대에서 경영학을, 서던일리노이대에서 경영학 석사(MBA) 학위를 받고 GM(제너럴모터스) 디트로이트 본사 마케팅 부서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쌍용그룹 기획실과 프랭클린템플턴, 웨스틴조선호텔, DHL코리아, 존슨앤드존슨 등을 거쳐 2014년 콜로플라스트 코리아 지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콜로플라스트에서는 매년 30%가 넘는 성장률을 기록하며 한국 지사의 위상을 드높였고, 그 성과를 인정받아 2016년부터 콜로플라스트 홍콩 대표이사도 겸임해 왔다.

겉으로 드러난 경력만 놓고 보면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만 골라 다니며 승승장구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출근 안 하면 안 되냐”며 바짓가랑이 붙잡고 울며 떼쓰던 딸아이의 모습이 눈에 밟혀 하루에도 몇 번이고 퇴직을 고민하던 시절이 그에게도 있었다.

세월이 흘러 딸은 미국 아이비리그의 명문 프린스턴대를 거쳐 캘리포니아주립대 버클리 캠퍼스(UC버클리) 로스쿨 졸업을 앞두고 있다. 한국에서 국제학교에 다니긴 했지만, 대학입시 준비를 위해 수학학원을 몇 번 다닌 것을 빼면 과외 한 번 시킨 적이 없다.

지난달 콜로플라스트의 NSE 아시아 총괄사장에 취임, 중국을 제외한 아시아 전체 사업을 총괄하게 된 배금미 사장을 서울 마포구 도화동 콜로플라스트 코리아 사무실에서 만났다.


자녀를 잘 키우며 직장 생활도 성공일 수 있었던 비결이 궁금하다.
“고비가 없던 건 아니다. 싱글로 남았다면 더 빨리 승진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두르지 않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크고 작은 선택을 했고, 후회는 없다. 정말 힘들 때는 조금 돌아가기도 했다. 쌍용그룹 기획실 시절 딸아이가 어렸는데, 밤 늦은 시간까지 야근이 이어져 힘들었다. 고민 끝에 가족과 시간을 더 많이 보낼 수 있는 호텔 업계로 자리를 옮기기도 했다. 보수는 낮았지만, 마케팅 전문가로서 현장감 있는 경험을 다양하게 할 수 있어 이후 경력에 큰 도움이 됐다.”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일과 삶의 균형)에 대한 관심이 뜨겁지만 ‘워킹맘’에게는 두 영역의 구분이 쉽지 않을 것 같다.
“워킹맘들이 가장 걱정하는 부분이 자녀 교육이다. 그런데 자녀가 어느 정도 학년이 올라가면 엄마가 열심히 일하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된다. 어쩔 수 없이 집에서도 회사 일을 해야 하는 경우 아이에게 미안해하는 엄마들이 많은데, 자녀가 스스로 자기 앞가림할 수 있는 나이라면 그럴 필요는 없다. 미안해하지 말고 자녀 교육을 위해서라도 당당하게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좋다.”

엄마가 집에서 일하는 게 자녀 교육에 도움이 된다는 말인가.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자녀에게 좋은 본보기가 된다. 업무를 보는 동안 자녀는 옆에서 책을 읽거나 숙제를 하게 하면 된다. 딸아이도 내가 일하는 모습을 보고 ‘엄마처럼 되고 싶다’는 이야기를 종종 했다. 대신 시간이 되는 대로 자주 ‘사랑한다’고 이야기하고 스킨십도 많이 해줘야 한다.”

회식에 대한 부담은 없었나.
“요즘은 시대가 바뀌어서 국내 기업도 예전만큼 저녁 회식을 자주 하는 것 같지는 않다. 내 경우에는 업무 관련 미팅이나 회식을 점심에 많이 했다.”

여성 리더만의 장단점이 있을까.
“전반적으로 솔직하고 성실하며 윤리의식이 높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사회 분위기도 예전보다는 워킹맘들의 고충을 이해하는 방향으로 많이 바뀌었다. 약 3~4년 전부터 국내 지사장으로 여성을 물색하는 외국계 기업이 늘어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반면에 욕심이 없고 ‘정치’에 밝지 못하며 감정에 흔들리는 경우가 많다는 단점이 있다.”

콜로플라스트 지사장 취임 후 실적을 견인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한국에 있는 덴마크 기업’이라는 정체성에 충실하게 조직을 이끌었다. 덴마크 기업은 경쟁보다 인화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소수의 특출한 인재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룹 토의를 통해 ‘집단지성’의 힘을 빌리는 데 중점을 뒀다. 전체 회의를 자주 하는 것이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초기에 반발도 있었지만 1년쯤 지나니 익숙해졌다. 장기적으로 조직의 전반적인 경쟁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직원은 한국 사람이니 한국적인 접근도 필요한 것 아닌가.
“중요한 건 ‘동기부여’다. 사람마다 누르면 동기부여가 되는 ‘버튼’이 다르기 때문에 그걸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파악이 끝나면 각자의 재능과 관심사에 맞게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덴마크식 기업 문화를 접목해 ‘선진적인’ 기업에서 일한다는 자부심을 고취시키는 노력도 필요하다(웃음).”

다양한 분야를 거쳤는데 의료 산업의 매력이 있다면.
“예전에는 매출과 수익에 대해 많이 고민했는데 지금은 업무를 통해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한다는 보람이 크다.”

신임 총괄사장으로서의 포부는.
“한국과 일본, 홍콩, 대만 등 이미 잘하는 조직을 더 잘하게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태국, 베트남 등 잠재력이 큰 시장에서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조직을 정비해 나갈 계획이다. 이들 국가에는 아직 지사가 없는데도 연 25%씩 매출이 늘고 있다. 한류 영향으로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좋기 때문에 한국적인 이미지를 전략적으로 활용할 생각이다.”


▒ 배금미
서던일리노이대 경영학 석사(MBA), DHL 코리아 마케팅 총괄이사, 존슨앤드존슨메디칼 멘토사업부 아시아 총괄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