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클러 앤드 코흐(H&K) G36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독일군. G36 자동소총은 등장 당시 세계 최고라는 찬사를 받으면서 40여 개국에서 도입됐다. 하지만 최근 치명적인 결함이 드러났고, 독일군은 더 이상 G36 자동소총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 위키피디아
헤클러 앤드 코흐(H&K) G36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독일군. G36 자동소총은 등장 당시 세계 최고라는 찬사를 받으면서 40여 개국에서 도입됐다. 하지만 최근 치명적인 결함이 드러났고, 독일군은 더 이상 G36 자동소총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 위키피디아

핀란드가 독립하기 전 1865년 제지회사로 설립된 노키아는 그 유구한 역사만큼 수차례의 파산 위기를 겪었고 사업 분야를 수시로 바꿨을 만큼 부침이 있었다. 어느덧 과거의 이야기가 됐지만, 1998년 모토롤라를 제친 후 2011년까지 무려 14년 동안 세계 정상을 굳건히 지키던 휴대전화 분야의 공룡이기도 했다.

노키아는 주로 중간재만 만들었기에 사실 긴 역사에 비해 최종 소비자들에게 많이 알려진 기업은 아니었다. 1990년대 초 휴대전화 사업을 본격 시작할 때 내수 시장이 작아 처음부터 대외 판매에 사활을 걸었다. 그런데 당시 외국의 소비자들이 노키아를 일본 업체로 오인하는 바람에 얼떨결에 판매에 도움을 받았다.

이 에피소드와 관련해서 많이 회자되는 것이 국가 브랜드다. 외교, 경제, 군사, 문화처럼 국가 이미지 형성에 영향을 주는 요소는 많지만 기업과 상품도 그중 하나다. 소비자가 선호하는 상품을 기업이 만들면 자연스럽게 국가의 평판도 좋아진다. 그리고 명성을 얻은 국가의 기업에서 만든 것이라면 일단 신뢰하는 선순환이 일어난다.

1990년대는 일본 전자 회사들이 세계 시장을 석권하던 시기여서 단지 일제라는 이유만으로도 판매에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그래서 일부 소비자들이 발음 때문에 일본 기업으로 오해했다는 점은 노키아에 상당한 프리미엄으로 작용했다. 일부러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초창기 휴대전화 시장 진입에 덕을 본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일본 못지않게 국가 브랜드 덕분에 비즈니스 세계에서 많은 이득을 보는 또 하나의 대표적인 나라가 독일이다. 특히 자동차, 기계, 화학 분야는 가히 세계 시장을 이끈다고 단정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비자들이 품질을 신뢰하기에 여타 국가에서 생산한 동급 제품보다 독일제의 비싼 가격을 당연하게 여길 정도다.

그런데 지난 2015년에 그처럼 독보적이었던 명성에 금이 가는 커다란 사건이 벌어졌다. 오랫동안 폴크스바겐이 차량 검사를 받을 때와 일반 주행 시에 디젤 엔진의 공해 물질 배출량이 달라지도록 고의로 기계를 조작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흔히 ‘디젤 게이트’로 알려진 이 사건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사기였다.

폴크스바겐이 독일 경제를 이끄는 대표적인 거대 기업 중 하나인데다, 사건 조사 과정을 통해서 정계와 자동차 업계 간에 추악한 로비와 금품수수 정황 사실이 드러나면서 독일 산업계에 대한 신뢰도가 추락했다. 독일이라는 국가 이미지와 폴크스바겐이라는 회사를 믿었기에 소비자들의 배신감과 실망감이 컸다.

한때는 독일 자동차 회사들의 주도로 ‘클린 디젤’이라는 말까지 나오면서 디젤 승용차가 도로의 주인공이 될 것처럼 여겼었다. 하지만 환경 문제를 해결하고 강력한 힘도 낼 수 있는 기술은 처음부터 없었다. 결국 2018년 독일 연방법원은 각 도시의 디젤차 시내 주행 금지조치를 허용하는 판결을 내렸다. 세계 유수의 자동차 제조업체들이 앞다퉈 디젤차 생산을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무기 분야라서 일반 대중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같은 시기에 상당히 비슷한 사건이 하나 더 있었다. 2014년 6월, 독일 국방부가 성능 결함을 이유로 G36 자동소총의 주문 정지 조치를 내렸다. 이 결정은 마치 디젤 게이트처럼 세계 군사 관계자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2012년 클린 디젤 캐나다 투어라는 명목으로 선전에 나선 폴크스바겐의 디젤 승용차들. 결과적으로 모두를 속인 사기 행위였다. / 폴크스바겐
2012년 클린 디젤 캐나다 투어라는 명목으로 선전에 나선 폴크스바겐의 디젤 승용차들. 결과적으로 모두를 속인 사기 행위였다. / 폴크스바겐

한번 실수가 국가 브랜드 추락으로

두 차례의 거대한 전쟁을 치른 경험에 더해서 튼튼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독일은 무기 분야에서도 상당한 명성을 구축한 나라다. 비록 패전국이 되면서 일부 무기의 개발과 보유에 제약을 받고 있지만, 전차·장갑차·야포 같은 대부분의 무기는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다. 가장 기본이 되는 제식 화기인 소총도 마찬가지다.

총기의 명가인 헤클러 앤드 코흐(H&K)가 개발해 1997년부터 배치된 G36은 탄생 당시부터 최고의 자동소총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40여 개국에 판매됐다. 그런데 2013년 아프가니스탄에 파견된 독일군이 교전 중 명중률이 형편없이 떨어지는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는 불만을 제기했고 이에 따라 대대적인 조사가 벌어졌다.

독일 국방부는 연속 사격을 가하면 총신을 감싸고 있는 플라스틱 재질에 변형이 생겨 명중률이 저하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경량화를 위해 신소재를 많이 도입했지만 정작 이 신기술이 원인이었던 것이다. 총기가 당연히 갖춰야 할 기본적인 내열성을 대수롭지 않게 처리한 대가는 이처럼 컸다.

2016년 H&K가 자신들의 잘못이 아니라며 소송을 제기해 현재 송사가 진행 중이지만 독일 국방부는 더 이상 G36을 사용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디젤 게이트와 달리 H&K가 고의로 문제점을 감추거나 왜곡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사건은 독일제 무기에 대해 가졌던 신뢰도에 엄청난 타격을 줬다.

물론 이를 독일 전체로 일반화할 수 없으며 여전히 폴크스바겐과 H&K는 업계를 선도하고 있다. 하지만 위의 사례는 독일제라면 무조건 신뢰할 수 있다는 믿음에 금을 가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최고 위치에 있던 정치인이나 연예인이 한 번의 잘못으로 인기가 추락하듯이 오랜 세월에 걸쳐 쌓아온 국가 브랜드도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명심해야 할 반면교사라 할 수 있다.